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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출신 문인탐방>
<‘논개’의 민족시인 변영로>
변영로는 <논개> 한편으로 민족시인의 대부(代父)로 평가받는다.
우리 국민이라면 <논개>라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충절의 여인 논개, 구국의 투사로서 그 이름은 영원히 남아 있다.
그 충절의 애국심을 뜨거운 시혼으로 담아낸 변영로, 그로 인해 의기(義妓) 논개는 영원불멸의 호국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변영로(1897-1961)는 중앙고보를 3년 수료하고(3회 해당) 이화여전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33년 도미하여 산호세 대학에서 영문학을 수학하였다.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 <신동아> 편집장을 지냈고, 해방후 성균관대, 해사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펜클럽 회장, 대한공론사 이사장을 역임하고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여받았다.
그는 문재(文才)가 뛰어나 이미 13세 때 한시를 지었으며, 특히 영시창작이 특출하여 <청춘>지에 <코스모스>라는 영시를 발표하였다.
신문학 초기에 영시창작은 단연 이채로운 것이었다.
한국문학의 해외문단 소개에 첫 삽을 든 것이다.
1918년 모교인 중앙고보 영어교사로 재직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발송하여 한국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변영로는 3.1운동 지도자였다.
변영로는 변영만, 변영태 두 형을 두었는데 맏형은 판사, 변호사였고, 둘째 형은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들을 ‘한국의 3소’(중국의 대문호 3인, 소순과 두 아들 소식(소동파), 소철)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단활동은 이미 <청춘>에서 시작됐으나 ‘폐허’, ‘장미촌’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화 된다. 역시 그의 대표작은 <논개>(1922)다.
아리답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남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 시가 실린 『조선의 마음』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되었다. 시집에는 우리 민족과 국권을 상징하는 임을 소재로 한 것이 태반이었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뛰어난 시어의 조탁(彫琢)과 연마는 한국 현대시의 시적 가능성을 열어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변영로는 대주가였던 바 그의 주력(酒歷) 일화를 담은 수필집 『명정40년』도 베스트셀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