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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시의 개척자, 김달진>
김달진(1907-1989)은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불교적 세계관을 시화(詩化)하여 한국 불교시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아울러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한 노장철학의 무위자연 사상을 펼친 시인이기도 했다.
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문예사조를 배격하며,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정신주의가 그의 시적 상상력의 근간이었다.
그는 서구사조가 만연하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전통과 정서,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전통주의, 민족주의 시인이었다.
1907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김달진은 중앙고보를 다니다 신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후에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를 졸업했다.
그는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득도하여 불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함양 백운사 화과원에서 승려로서 반농반선(半農半禪)의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동양불교문화연구원장을 거쳐 동국대 역경위원으로 『고려대장경』 번역에 몰두했다.
아울러 『법구경』을 번역하여 발간하기도 했다.
한시 번역에도 관심을 기울여 『장자』, 『한산(寒山)시집』, 『금강산삼매경론』을 내고 1989년에 한국의 한시집 3권을 출판한 바 있다.
이러한 번역작업을 통해 육화(肉化)된 불교정신과 동양주의가 시 창작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장편 서사시집 『큰 연꽃 피기까지』는 부처의 일대기를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에 불교정신문화원에서 ‘한국 고승성덕’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불교정신과 동양의 무위자연의 사상으로 요약된다.
일체의 서구사상, 서구 문예사조를 배격하고,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시를 썼다.
시의 중심 소재는 자연인 바 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꿨던 것이다.
해방 후 자유민보, 동아일보의 기자생활을 했고, 선린상고, 경북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54년에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시인, 승려, 기자, 교사, 교수, 한학자 등 다양한 마스크를 통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 대인(大人)이었다.
1929년 시 <잡영수곡(雜泳數曲)>으로 문예공론에 등단한 후 동아일보에 <나의 뜰>, <유점사를 찾아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개시했다.
특히 그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이 이채롭다.
위 두 작품 외에도 <화과원시>, <유점사의 추억>, <추야장>, <샘물> 등이 그것이다.
당시 민족적 저널리즘을 대변하며 문단계의 중심이던 동아일보에 작품이 게재되는 것은 문인들의 꿈이었다.
이를 볼 때 그의 작품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된다.
김달진은 서정주 김동리, 유치환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을 이끌었다.
‘시인부락’은 당시 문단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감각주의와 기교주의를 탈피하고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성을 바탕으로 휴머니즘을 추구한 동인이었다.
김달진의 시세계인 동양주의, 자연주의 사상과 맞닿았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대구에서 결성된 ‘죽순’ 동인이 되어 영남 문단을 이끌었다.
자연친화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한 『청시(靑柿)』, 『올빼미의 노래』 같은 창작시집을 통하여 그의 동양주의,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김달진은 동양정신과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정신주의 시를 쓴 서정주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김달진은 한국어의 미적 특징을 잘 살려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후에 수필집 『선거일기』(1990)가 출판되었다.
2005년 고향 진해에 김달진 문학관이 들어섰고, 1990년부터 김달진 문학상 제정과 함께 김달진 문학제도 매년 열리고 있다.
*봄에 펼쳐지는 진해 군항제 때 김달진 문학관에 들러서 벚꽃 향기와 함께 김달진의 문학혼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