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 교우(중앙고보) 교우 6.10만세운동 뉴스 _<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을 찾아서> > 교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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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418회 작성일 2021-06-16 11:04
권오설 교우(중앙고보) 교우 6.10만세운동 뉴스 _<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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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안동역에 도착한 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안동 임하면에 있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었다. 정문으로 들어가서 보이는 첫 번째 건물이 권오설 선생의 철관이 모셔져 있는 '독립관'이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철관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안동이 발칵 뒤집혔죠. 저도 뒤늦게 달려갔고, 학계 인사뿐만 아니라 언론사 기자들도 몰려왔습니다. 소나무 재질의 사과 궤짝 같은 송판으로 만든 나무 관에 철판을 두른 뒤 납땜을 했더라고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왜 철관에 가뒀을까


한준호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의 증언이다. 왜 일제는 선생의 주검을 철관으로 가뒀던 것일까? 철관이 모셔져 있는 독립관 벽면에는 부친 권술조 선생이 쓴 제문이 인쇄돼 있고, 이곳에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한 부장은 "일제 경찰은 철관을 바꾸려는 것을 막았지만, 권술조 선생이 '이 관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묻을 수 없다'고 버텨서 어쩔 수없이 납땜을 한 관을 열어보았다"면서 "얼굴에 독을 쓴 자국이 역력했다고 적었다"고 말했다. 


결국 고문 흔적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제 경찰은 철관을 바꾸지 못하도록 했고, 공동묘지에 무덤의 위치도 정했다. 또 봉분도 쌓지 못하게 한 뒤 6개월여 동안 밤낮없이 묘지를 감시했다.  


"부친 장례식날에 일제 경찰은 작업 인부 몇 명과 가족 등으로 인원수를 제한했어요. 그날 풍산에는 까마귀 떼(제복 입은 일본 순사)가 바글바글했고, 안동에서 가일마을까지 50리길에도 까마귀 행렬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왜 그랬겠어요? 그냥 놔두면 장례행렬이 제2의 만세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겠죠."(권대용)


[수곡고택] 우암 권준희 광복회 고문, 전 재산 털어 독립자금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권오설 선생의 6·10만세운동 이야기에 앞서서 다시 가일마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노동서가와 생가터의 중간 지점,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된 수곡고택이 나온다. 1792년(정조16) 권환이 도학에 심취했던 조부인 수곡 권보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종가집이다. 


2일 기자 일행이 방문했을 때에는 수리 중이어서 문이 잠겨 있었지만, 겉모습만 봐도 이곳에 살았던 분들의 가세를 짐작케 했다. 이 집은 일제 강점기 때 군자금 모금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우암 권준희(1849~1936)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그의 손자인 권오상(권오돈) 선생은 2005년 독립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이다.


"증조부님은 광복회 고문이셨습니다. 가일마을에서 손꼽히는 천석꾼 집안이었지만, 전 재산을 털어 독립자금에 보탰죠. 증조부 후손들 중 독립운동한 사람이 10여명이 넘습니다. 부친은 형무소에서 나온 뒤 보름 만에 돌아가셨고, 저는 소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 때만 생각하면...(눈물)"


수곡고택에 살았던 권오상 선생의 양아들 권대송(81)씨의 말이다. 권오상 선생은 권오설 선생과 촌수로 치면 14촌간으로 4살 아래였지만 한 동네에 살면서 어울렸다. 1924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화요회계 청년운동단체인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권오설 선생의 지도로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권오상 사회장] "풍산까지 9km... 만장 1만개가 가득"


학생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할 때 권오설 선생과 함께 6·10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거사 직전인 6월 7일 권오설 선생 등의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고, 만세운동 때 뿌릴 '격고문' 등의 전단은 전부 압수됐지만 권오상 선생 등이 주도한 학생운동 조직은 발각되지 않았다. 


그 뒤 권오상 선생은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기, 격문을 제작해 거사 당일 만세운동을 성사시켰다. 그해 8월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권오상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을 살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석방됐다.


"부친은 집에 온 지 보름만인 6월 3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지독한 고문 때문이지요."


지난 6월 3일, 권오상 선생의 기일에 묘소를 찾은 권대송씨의 말이다. 그는 친동생인 권대인(77)씨와 이날 동행 취재한 오마이뉴스 권우성 사진부장(권대인씨의 아들)과 함께 묘소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린 뒤 말을 이었다. 


"족보에도 당시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풍산까지 9km 정도 되는 길인데, 만장 1만여 개가 가득 들어찼다고 하더라고요. 중앙고보 출신으로 연전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서울에서 학생들이 죄다 내려왔다고 합니다."  


권대인씨는 "1984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내에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독립유공 기념비가 세워졌고, 2014년에는 연세대학교가 명예졸업증서를 줬다"고 덧붙였다.


[6·10만세운동] 이념을 초월한 좌우 합작


"권오설 선생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을 당시 북한은 없었습니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도 있었고, 상해임시정부도 레닌으로부터 받은 군자금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념을 떠나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게 최우선 목표였고, 그것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죠."


한준호 부장의 말이다. 그는 "권오설 선생이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가장 큰 의의는 '좌우 합작'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3·1운동 이후, 좌우 이념 대립으로 분열된 전체 독립운동 진영을 아우른 통일전선체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당초 권오설 선생은 해외로 망명한 김단야 선생과 함께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해 4월 25일, 융희황제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자 광무황제 국상을 기해 일어난 3·1운동처럼 6월10일 융희황제 인산일에 대중적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는 6·10투쟁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제2의 3·1운동'을 기획했다. 지도부는 대한독립당이라는 좌우 합작단체를 만들고 인산당일 만세를 부르며 격고문과 태극기를 뿌리기로 결의했다. 권오설 선생은 이를 위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중앙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조직했다. 사회주의 계열로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조선노동총동맹을 참여시켰다. 민족주의 계열은 천도교 구파가 나섰다. 


좌우 이념을 망라한 조직이었지만, 객관적 조건은 3·1운동 때보다 나빴다. 3·1운동 때 크게 데인 일본은 융희황제 인산일을 앞두고 군대와 경찰 총동원령을 내리고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 탑골공원에는 중무장한 기관총 소대도 배치했다.


결국 만세운동 직전인 6월 4일 일제에 의해 시위 준비 작업 일부가 적발됐고, 권오설 선생은 7일 체포됐다. 하지만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6월 10일 융희황제의 장례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권오설 선생과 함께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가 뛰어나오면서 만세를 불렀다. 6·10 만세운동의 신호탄이었다. 55개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면서 항거했다. 


학계에서는 6·10만세운동이 3·1운동에 비해 시위 규모는 작았지만, 혹독한 탄압 속에서 성공했고, 특히 좌우 합작으로 이룬 개가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철관, 그 후] 살아남은 자의 도리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7년형 구형에 5년형을 선고받은 권오설 선생의 모든 심문조서의 첫 문답은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다른 분들의 조서는 대부분 존댓말로 되어 있는데, 부친은 항상 반말 투였죠. 이것만으로도 꼿꼿한 기개를 알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왜, 네 놈들이 나를 취조하냐. 우리가 네놈들을 취조해야지'라고 소리치기도 했어요. 하지만 가일마을에서는 항상 신분이 낮은 아이들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고 다니셨던 분입니다."


권오설 선생의 양아들 권대용씨의 말이다. 권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해 이가 두 개 빠졌을 때에는 고문 경관 4명을 독직폭행죄로 고소하기도 했다"면서 "일본 본토까지 알려져서 관계자는 책임추궁을 당했고, 고문했던 일본 순사는 후일 쓴 수기에서 자기 가족들이 테러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했다"고 적기도 했단다. 


이처럼 감옥에서도 당차게 싸웠던 권오설 선생은 1930년 7월, 출옥을 100일 앞둔 4월 17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조선공산당 창립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뒤 철관에 갇힌 채 가일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날 인터뷰를 마치면서 권대용씨에게 부친 권오설 선생이 2005년에서야 뒤늦게 서훈을 받은 것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는 답변 대신 반문했다.  


"서럽습디다. 당시 중국으로 피신을 갔던 사람들도 모두 빨갱이여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지 않아야 하나요? 독립을 위해 목숨도 버렸는데, 살아남은 자들이 '빨갱이 공산당'이라고 난리를 쳤죠. 왜놈들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뒤 '빨갱이 독립운동가'라고 손가락질했어요. 이게 살아남은 자의 도리입니까?"


그는 기자와 헤어지기 직전에 권오설 선생의 철관과 함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된 제문을 펼쳐보였다. 부친 권술조 선생이 쓴 제문의 길이만도 무려 4m, 한지에 깨알같이 쓴 글자는 5000자가 넘는다고 했다.


"조부는 이 제문에서 '내 눈을 저 놓은 곳에 달아놓고 너의 대서특필을 기다리겠노라'라고 소망했습니다. 그 제문을 보면서 '할아버지, 이제 그 눈을 저에게 넘겨주세요'라고 다짐했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정부는 작년 12월 6·10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95년만인 6월 10일 오후 6시 10분에 김부겸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구 훈련원 공원에서 정부 주관 행사로는 처음으로 기념식을 연다. 융희황제의 인산 행렬이 돈화문을 출발해 금곡으로 가던 중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8곳 중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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