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60회) 교우_ <가요사회사8>_<자유부인과 춤바람> > 교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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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909회 작성일 2021-07-13 09:37
김영철(60회) 교우_ <가요사회사8>_<자유부인과 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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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과 춤바람>


1) <자유부인>의 충격과 파문


1954년에 발표된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물경 14만 부가 팔려나간 한국 최초의 베스트 셀러였다.  일제 강점기 베스트 셀러였던 이광수의 <무정>을 능가한 인기작이었다.

 정비석은 193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졸곡제>로 등단하여, <성황당>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순수문학 작가였다. 

<성황당>에서 서낭신을 숭배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토속신과 로칼리즘(localism)을 접목시켰고, <제신제>에서는 기독교 교리와 인간의 욕망의 갈등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었다.  그러던 그가 <자유부인>을 발표하면서 일약 대중, 통속작가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자유부인>은 1954년 1월 1일 <서울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8월 6일로 끝난 총 215회의 장편소설이다. 연재 중 급격히 발행부수가 오르다가 연재가 중단되자 무려 5만 2천 부가 급감했던 사실은 <자유부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증거다. 이는 마치 춘원의 <무정>이 게재된 <매일신보>의 발행부수가 치솟았던 현상과 흡사하다. 1917년의 ‘무정 현상’이 1950년대 ‘자유부인 현상’으로 재현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남 주인공 장태연은 국문과 교수였고, 부인 오선영은 현모양처의 아내였다. 오선영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친구를 따라 간 동창회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동기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친구의 소개로 파리양행에 취직하고 춤바람에 휩쓸리면서 마침내 이웃에 사는 신춘호와 불륜에 빠지게 된다. 신춘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나자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 파리양행 사장 한태석과 불륜 직전까지 가게 된다.

남편 장태연도 미군부대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러 다니다가 미모의 타이피스트 박은미를 만나 미묘한 애정관계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자기행동을 반성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다는 해피엔딩이다. <자유부인>은 이처럼 무분별한 남녀의 애정을 다룬 통속 애정물로 볼 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전후 시대의 사회적 단층을 파헤친 문제작이었다. 

1950년대 전후 사회의 단면은 3가지 ‘바람’으로 상징된다.  춤바람, 치맛바람, 곗바람이 그것이다. 해방 후에 밀려온 서구 자유주의 풍조에 휩쓸려 황금 만능주의와 물질적 욕망, 자유로운 에로티시즘의 추구가 춤바람, 치맛바람, 곗바람으로 표출됐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유부인>이 발표되던 1954년에 터진 박인수 사건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70여 명의 여성들을 농락한 희대의 성추행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자유부인>은 퇴폐적이고 음란하다는 혹평으로 필화사건에 휩싸이면서 오히려 세간의 관심을 끌어 모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서울 법대 교수이던 황산덕과 정비석과의 논쟁이 인기에 불을 붙였다.  황산덕이 대학교수의 명예를 모독했다는 글을 발표하자 정비석이 반론에 나선 것이다. 황산덕은 ‘문화, 문학 파괴자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된다’는 말을 남겨서 더욱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여성단체에서는 전체 여성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작가를 경찰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경찰 조사에서 북한의 지령금을 받고 남한 사회의 부패한 모습을 과장해서 드러낸 것이라는 혐의까지 받았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한때 금서(禁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논란으로 <자유부인>은 세간의 관심을 끌고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 작품으로 1950년대는 그야말로 <자유부인>의 시대가 됐다. 

 ‘자유부인’이라는 단어는 바람난 여성의 대명사가 됐고, 춤꾼 신춘호가 사모님을 유혹하며 부르던 ‘마담’이라는 단어가 유한마담의 동의어가 됐다. 사기꾼으로 등장한 백광진의 말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요’는 말은 퇴폐와 허영의 유행어로 시대를 풍미했다. 

국문과 교수였던 남편은 미모의 타이피스트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부인은 이웃에 살던 남자와 춤바람에 휩쓸린다는 내용은 당시로서 매우 충격적이었다.  1954년이면 전쟁 직후여서 사회가 대혼란을 겪던 시기였고, 그 와중에 수많은 전쟁 미망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큰 변화가 생겼다.

 의당 여성들의 가치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여성 정체성의 혼란에 기인한 성윤리의 파탄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바, 이를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 바로 <자유부인>이었던 것이다.  ‘자유부인’의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기존의 성윤리에 억매인 여성성을 초월하는 상징적 용어였던 것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집이라는 울타리에 속박된 노예 상태를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구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의 실천적 도구가 바로 춤이었다. <자유부인>은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5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개봉 하루 전날까지도 지나친 애정묘사 때문에 허가가 안 나왔으나 마침내 개봉된 후 수도극장은 인산인해, 물경 14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인기를 몰아 1957년에 <속자유부인>이 나오고, 1969년(김지미 주연), 1981년(윤정희 주연), 1986년, 1990년 (고두심 주연)으로 속편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아마도 한편의 소설이 6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는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자유부인>은 문학사 뿐 아니라 영화사에서도 하나의 전설을 만든 작품이었다.  그 만큼 <자유부인>은 1950년대를 풍미한 사회적 키 워드(key word)였다. 1956년에 상연된 영화 <자유부인>에 백설희가 부른 <아베크 토요일>이 삽입되었다.


"돌아오는 토요일은 분홍 치마에

꽃단장을 고이 하고 속삭일 날이라나

그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면

사랑이 타오르는 아베크의 토요일"

-백설희, <아베크 토요일>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분홍 치마를 입고 꽃단장한 자유부인이 밀회를 즐기는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사랑이 타오르는’ 정열의 로맨스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자유부인’이었던 것이다.


2) 여성해방의 아이콘


1950년대에서 ‘자유부인’은 단지 소설이나 영화 타이틀로 끝나는 용어가 아니라 여성해방, 여권신장의 대명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말하자면 여성해방의 아이콘(icon)이 되었던 것이다. 

 그 만큼 <자유부인>은 한국 사회사, 여성사에서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온 획시기적인(epoch-making) 작품이었다. 하지만 세속에 물든 타락한 여인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다음 노래가 이를 반증한다.

"나이롱 양단 호박단 신무늬 들어 왔어요

아주머니 나이에는 밤색 빛깔 넘버원 

백금반지 파라솔 오메가냐 순금 팔찌요

요새는 그것이 유행입니다

자유부인 되지 말고 옥동자를 많이 나아서

군문으로 입대시키세요"


-황정자, <저무는 국제시장>


황정자가 부른 <저무는 국제시장>(1957)이다.  나이롱, 양단, 호박단, 비로도를 걸치고 백금반지, 순금팔찌를 두른 자유부인의 초상화를 현란하게 그려내고 있다.  모두 국제시장을 통해 들어온 외래품들이다.  자유부인들은 옷차림만 화사한 게 아니고 병역기피에 앞장 선 특권층이기도 했다. 노래에서 역설적으로 아들 낳아 군대 입대시키라는 말이 나온다.  동시에 정치군인들이 특권층에 속했던 당대 현실도 반영하고 있다.

이 노래를 보면 자유부인은 그야말로 1950년대를 대표하는 특권층의 사치와 허영을 대변하는 대명사였음을 알 수 있다.  여성해방, 인권옹호라는 긍정적 의미 외에 특권층 여성들의 부패와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는 야누스(Janus)적인 이중성을 가진 것이 ‘자유부인’이었다. 문제는 그 작품이 1950년대 태풍처럼 불던 춤바람 유행에 촉진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춤바람이라는 불구덩에 기름을 쏟아 부은 것이 <자유부인>이었다.  ‘자유부인’이 추던 춤은 1950년대를 휩쓸었던 맘보였다. 

 전쟁은 절망과 욕망이라는 양면성의 얼굴을 빚어낸다.  모든 것을 잃었고 희망마저 무너졌다는 절망감, 좌절감에 휩싸이면서 동시에 어짜피 그럴 바에야 순간순간 인생을 즐기자는 욕망과 욕구가 분출되기 마련이다. 춤바람은 이러한 절망에서 비롯한 퇴폐적 욕망의 분출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춤바람에 휩쓸렸던 것이다.  거기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양의 댄스뮤직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말하자면 195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큰 흐름이 된 댄스음악은 전후의 시대상황과 서양음악의 수용이 맞물려서 상호작용을 일으킨 양식이었다. 거기에 미국문화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도 함께 작용하였다. 미국문화는 서구문화의 상징이고 고급문화이기 때문에 이를 추종해야 한다는 대중심리가 캬바레문화, 춤문화를 선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춤바람은 50년대의 유행병이 되었다. 여기에 뒤질세라 너도나도 춤바람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맘보 바람은 1950년대 자유부인을 잉태한 대표적인 댄스곡이다. 쿠바 출신의 페레스 프라도(Perez Prado)의 <체리 핑크 맘보>(Cherry Pink Mamboo)는 맘보붐의 기폭제가 되어 서울거리를 휩쓸었다. 이 노래가 현인의 번안곡으로 불리면서 온통 거리는 ‘맘보, 맘보, 맘보’의 천국을 이루었다. 현인이 이 곡을 번안하여 부름으로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현인은 맘보가 한국 땅에 정착하는데 기여한 <나포리 맘보>(1956)도 불렀다.  명실공히 현인은 맘보의 한국 정착에 기여한 선구자였다.

맘보붐은 전통 민요에까지 침투하여 우리 민요가락과 맘보 리듬이 혼합된 퓨전 양식까지 산출하기에 이른다.  닐리니 타령, 도라지 타령, 태평가에 맘보 가락이 덧붙혀져 기묘한 퓨전 댄스곡이 태어 난 것이다.  맘보가 우리 전통민요를 잠식하는 정도였으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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