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라는 전제조건, <font color=blue>이승철(66회)</font> <경향신문&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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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남북대화’라는 전제조건
이승철|논설위원
1994년 10월21일 북한과 미국이 서명한 이른바 ‘북·미 기본합의문’의 3조3항이다. 한국 정부는 당시 “본 합의문이 대화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남북대화에 착수함”이라고 번역해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정부는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이행과 남북대화 재개에 합의했다는 설명자료까지 첨부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합의문의 내용은 달랐다. “조선은 기본 합의문에 의하여 대화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따라 북남대화를 진행할 것이다.” 북한은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만큼 남북대화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합의문의 내용은 달랐다. “조선은 기본 합의문에 의하여 대화를 도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따라 북남대화를 진행할 것이다.” 북한은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만큼 남북대화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영어 합의문의 접속사 ‘as’ 때문이었다. 남북대화를 강력히 요구해온 한국은 이를 ‘때문’으로, 남한 무시 입장을 취해온 북한은 ‘따라’라고 해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남북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면서 김영삼 정부와의 대화를 거부해 사실상 남북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해석이 힘을 발휘했다.
최근 북한의 남북 비밀접촉 폭로로 사실상 남북대화가 물건너 가면서 17년 전의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지금의 상황에 당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올해 초 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 재개라는 3단계 수순을 마련해 북한을 제외한 관련국들로부터 동의를 받았다. 정부는 이를 한반도 문제에 대한 ‘실질적 주도권 행사’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남북대화 재개를 북·미대화와 6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3단계 해법은 북한의 비밀접촉 폭로로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미국과 중국을 통해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기에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여전히 남한을 우회한 북·미대화는 없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아무도 자신하지 못한다. 하물며 북한과 접촉면을 넓히고 있는 중국은 일러 무엇하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남북대화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 정부의 해법보다도 해법 자체가 갖는 취약성에 있다. 정부의 주장대로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남북이 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미대화, 그리고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순리에도 맞고 효과적인 방안이다. 그러나 대화에는 상대방이 있다. 불행하게도 어느 일방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순식간에 헛된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1994년에 이미 경험한 바다.
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북한의 대화 거부로 중대기로에 서 있다. 계속 북한에 남북대화를 압박하면서 미국과 중국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해법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것인가.
결국 시간이 판정을 내리겠지만 후자밖에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보자. 미국은 로버트 킹 북한 인권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대북 인도적 지원과 인적 교류, 재미동포의 이산가족 상봉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지난 주말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3년8개월 만에 방미해 미국 매사추세츠주를 시작으로 시범 공연에 들어간 것은 북·미관계에서 미세한 변화를 보여준다.
북·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이후 황금평과 라진·선봉에서 경제특구 개발 착공식을 갖는 등 겉보기에 일단 경제분야에서 협력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경제특구의 추진 속도와 실적을 예단할 수 없지만 변화는 변화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의 대응방향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우리가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긴장완화와 북핵 해법에 나선다면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의 발언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북한이 폭로한 남북 비밀접촉 사실은 정부의 대화노력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서 입장을 강화시켜 주는 요소다. 그렇지 못하고 남북대화라는 전제조건을 고수한다면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려워질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 전제조건은 어떠한 사안을 푸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덫이 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전제조건으로 인해 오히려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지금은 정부가 한반도 해법을 재검토하고 현명한 방안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최근 북한의 남북 비밀접촉 폭로로 사실상 남북대화가 물건너 가면서 17년 전의 장면이 떠오르는 이유는 지금의 상황에 당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올해 초 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 재개라는 3단계 수순을 마련해 북한을 제외한 관련국들로부터 동의를 받았다. 정부는 이를 한반도 문제에 대한 ‘실질적 주도권 행사’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남북대화 재개를 북·미대화와 6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3단계 해법은 북한의 비밀접촉 폭로로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는 미국과 중국을 통해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기에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여전히 남한을 우회한 북·미대화는 없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아무도 자신하지 못한다. 하물며 북한과 접촉면을 넓히고 있는 중국은 일러 무엇하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남북대화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 정부의 해법보다도 해법 자체가 갖는 취약성에 있다. 정부의 주장대로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남북이 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미대화, 그리고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순리에도 맞고 효과적인 방안이다. 그러나 대화에는 상대방이 있다. 불행하게도 어느 일방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면 순식간에 헛된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1994년에 이미 경험한 바다.
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북한의 대화 거부로 중대기로에 서 있다. 계속 북한에 남북대화를 압박하면서 미국과 중국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해법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것인가.
결국 시간이 판정을 내리겠지만 후자밖에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보자. 미국은 로버트 킹 북한 인권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대북 인도적 지원과 인적 교류, 재미동포의 이산가족 상봉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지난 주말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3년8개월 만에 방미해 미국 매사추세츠주를 시작으로 시범 공연에 들어간 것은 북·미관계에서 미세한 변화를 보여준다.
북·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이후 황금평과 라진·선봉에서 경제특구 개발 착공식을 갖는 등 겉보기에 일단 경제분야에서 협력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경제특구의 추진 속도와 실적을 예단할 수 없지만 변화는 변화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의 대응방향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우리가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긴장완화와 북핵 해법에 나선다면 한반도 문제에서 우리의 발언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북한이 폭로한 남북 비밀접촉 사실은 정부의 대화노력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서 입장을 강화시켜 주는 요소다. 그렇지 못하고 남북대화라는 전제조건을 고수한다면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려워질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 전제조건은 어떠한 사안을 푸는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덫이 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전제조건으로 인해 오히려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지금은 정부가 한반도 해법을 재검토하고 현명한 방안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