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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되는 금융·방송 사업확장엔 저돌적
검찰의 태광그룹 수사가 전방위로 펼쳐지면서 2009년 3월 터졌던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사건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검찰이 '조직적 로비'로 판단해 재수사에 나설지 주목된다.
지난해 3월 태광그룹 계열 케이블TV 업체인 티브로드의 문모 팀장은 서울 신촌의 한 룸살롱에서 술을 마신 뒤 김모 씨 등 청와대 행정관 2명과 방송통신위원회 신모 과장에게 '2차 성접대'를 하다 적발됐다.
당시는 티브로드가 경쟁업체인 큐릭스를 인수·합병하는 것을 승인 받기 직전으로 방통위는 승인 심의를 무기한 연기했다. 이후 해당 공무원들은 모두 사표를 냈고, 검찰은 청와대 행정관 2명을 성매매 혐의로, 방통위 신 과장과 티브로드 문 팀장에게는 뇌물수수 혐의를 추가로 적용해 기소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태광그룹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서 태광그룹 측이 방통위와 청와대 등에 조직적인 '인맥관리'를 했다는 진술이 나오고 있다. 검찰은 "이호진 회장 측이 방통위와 청와대에 우호적인 인사를 만들려고 학벌과 인맥이 좋은 직원을 추천해 각종 작업을 벌였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접대'가 일개 직원과 공무원들 사이의 우발적 '술판'을 넘어 조직적인 로비 차원에서 실행됐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게다가 경찰에 홍보지침 이메일을 보냈다는 이유로 2009년 2월 사직한 전 청와대에서 매체·여론담당 행정관 이모 씨가 이 회장의 외사촌인 것으로 알려져 궁금증은 더 커지고 있다.
편법 상속 의혹으로 시작돼 정관계 로비로 확대되고 있는 검찰의 칼날이 과연 어디까지 향할까. 검찰은 조만간 이 회장을 소환해 조사한다는 방침이어서 이번 주가 수사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태광산업 이호진 회장은 누구
상속·증여세 포탈 및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호진(48·사진) 태광그룹 회장은 재계의 대표적인 '은둔형 오너'로 불린다. 재계 40위의 그룹 규모와 화려한 혼맥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이 한번도 없고,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민 적도 없다.
대원고와 서울대 경제학과(81학번)를 졸업한 이호진 회장은 미국 코넬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딴 뒤, 뉴욕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1996년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35살의 나이에 그룹의 모기업인 태광산업 사장이 됐다. 이 회장의 부인 신유나씨는 롯데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식품 회장의 맏딸이다.
이 회장은 그룹의 모태인 석유화학·섬유산업에서 탈피해 금융 및 방송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쌍용화재와 예가람저축은행에 이어 투자자문사와 증권사까지 인수하면서, 기존의 흥국생명과 더불어 '생명보험-손해보험-증권-자산운용-저축은행'에 이르는 종합 금융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특히 방송 분야에서는 워낙 빠른 속도로 외형을 팽창하면서 잡음이 많았다. 1998년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인 티브로드를 세워 케이블방송업계 1위에 올라섰으며, 2009년 큐릭스를 인수함으로써, 씨제이(CJ) 등 다른 재벌 계열 케이블방송사들을 제치고 업계 1위 자리를 굳혔다.
한편 이 회장이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에 출국했다가 지난 15일 귀국한 것과 관련해 태광그룹 관계자는 "지인들과 7박8일 일정으로 네팔 트레킹을 다녀온 것"이라며 검찰 수사와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이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준비해서 애초 일정대로 다녀온 것"이라며, 검찰 수사와 관련해서는 "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이후 얘기할 부분이 있으면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이 과정에서 이씨의 역할은 단순히 그룹 회장의 안주인에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과거 생산량이 엄청나게 많았던 태광산업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무자료' 계약을 많이 했는데, 이 때 사용된 현금이 대부분 회계장부에 반영되지 않은 채 이씨에게 전달됐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렇게 조성된 부외자금을 태광산업 차명주식과 부동산, 무기명 채권 등을 구입하는 수법으로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의혹을 검찰에 제보한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는 "태광그룹이 현금으로 보유한 수천억원대 비자금은 이씨가 관리했고, 회사 운영도 80% 이상 이씨가 뒤에서 다 지휘했다"며 "이씨의 자택에도 비자금이 일부 보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태광그룹에서 '실세 중의 실세'는 다름아닌 이씨이고, 그가 재무 문제에 대해선 거의 모든 전권을 행사했다는 말이다.
실제로 태광그룹 일부 임원들이 2004년 이호진 회장의 세습경영과 경영능력 등을 문제삼아 퇴진운동을 벌였을 당시, 이들은 먼저 이씨를 찾아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룹 내에서 이씨가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2007년 태광그룹의 쌍용화재 인수 과정에서 발견된 차명계좌에 대해 검찰이 "이호진 회장 계좌가 아니라 이씨가 관리한 계좌"라고 판단해 이씨를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한 것도 뒤집어 보면 결국, 이씨가 그룹 비자금 관리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방증한다.
때문에 태광그룹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선 이씨 조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검찰은 이미 이씨를 출국금지했으며, 이르면 이번 주 안에 소환조사하겠다는 방침 아래 주변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화려했던 그룹 운영과는 별개로 이씨의 가정 생활은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이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자 경영에 참여한 장남 식진씨는 그룹 부회장까지 올랐으나, 2003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차남 영진씨도 태광산업 입사 후 흥국생명, 고려상호신용금고 등에서 중역으로 활동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 2004년 3남인 이호진 회장이 그룹의 후계자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기택
- 출생
- 1937년 7월 25일, 경북 포항시
- 소속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 학력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 경력
- 2008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현.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나 부산상고를 거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A) 학위를 받았다.
포항에서 태어났으나 학창시절 대부분과 정치경력은 부산에서 보냈다. 1960년 고려대 학생위원장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해 4.19의 도화선을 당겼다. 이후 젊은 나이에 정계입문을 하여 1961년 민주청년회 경남위원장을 역임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3공, 유신 시절
1967년 신민당 소속의 전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부산 동래구로 지역구를 옮겨 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까지 오르는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김영삼, 김대중의 양김씨와 이철승과 같은 거물 틈새에서 당내에 자신의 계보까지 조직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1976년 신민당 사무총장에 선출되었고, 1979년 초 신민당 부총재에 피선되었다.[2]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1] 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를 받았다.[3] 그러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김대중계열이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순식간에 이철승의 호적수가 되었다. 승부는 2차 투표로 넘어갔다.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였고 이기택은 이를 받아들인다.[3] 2차 투표에서 김영삼 378표, 이철승 367표로 근소한 차로 김영삼은 역전승을 하여 신민당 총재에 선출될 수 있었다.[3]
5공, 6공 시절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제11대 국회에서는 출마하지 못했지만 도미,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지냈다. 그뒤 구정치인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자 1985년 12대 총선에서 부산 해운대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때 정치규제에 묶여 일선에 나설 수 없었던 양김씨를 대신했지만 실권이 별로 없던 이민우 신민당 총재 아래에서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87년 신민당이 내세운 직선제와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내세운 내각제 사이에서 개헌논의에 진척이 없어 정국이 파국으로 치닫자, 민주화 조치가 이루어지면 내각제 개헌도 무방하다던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둘러싸고 야당내에 갈등이 증폭되었다.[1] 그리하여 이민우를 비롯한 신민당 내의 대여타협파와 결별하기 위해 양김씨가 자신의 계파의원들을 모두 신민당에서 탈당시켜 새로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때 이기택은 소속 계보 의원들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하였지만 통일민주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후 전두환이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여 15일간 단식하였다. 신민당 부총재 이후 통일민주당 부총재 등을 지냈다.[1]
1987년 6월 6월 항쟁이후, 여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이기택은 비로소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하고 다시 통일민주당 후보로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그해 9월과 10월 통일민주당의 대권 경선을 놓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갈등을 벌이다가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차렸으나 이기택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1988년 통일민주당의 부총재에 재선되고, 1989년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겸임했다.
1990년 이후
1990년 3당합당시 결국 참여를 거부, 김영삼 등과 결별하고 함께 삼당합당을 거부한 노무현, 김정길, 무소속 의원인 홍사덕, 이철등과 함께 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어 꼬마민주당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후 평민당과 야권통합협상을 벌였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4]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4]1991년 개헌후 처음 벌어졌던 기초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9월 10일 합당에 합의하여 9월 16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서 "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 함께 공동대표가 되어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해운대를 떠나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2년 5월 26일 제14대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경선에서 김대중 대표최고위원에게 석패하였다. 12월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자, 일약 야당총수가 되었다. 1993-1994년에는 제1야당의 총수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당내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동교동계와 번번이 신경전을 벌이며 주도권 다툼을 하였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공천권을 둘러싸고 동교동계와 잦은 충돌 끝에 결국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민주당은 여당을 밀어내고 서울시장을 차지하는등 지방선거에서는 사실상 승리하였지만, 이미 이기택을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김대중은 동교동계 의원 전원을 민주당에서 탈당시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고, 이어 1997년 고향 포항의 보궐선거에서도 출마하지만 낙선하였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서울시장이었던 조순을 대통령후보로 영입하였지만, 소수정당의 한계를 느낀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합하여 한나라당으로 합당하면서 이에 참여하였다. 불운하게도 이회창이 대통령선거에 패하여 이기택은 또다시 야당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에 대한 중진급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이회창은 많은 중진들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이때 공천에서 탈락한 김윤환, 김광일, 그리고 재야인사인 장기표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부산 연제구에 다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해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2002년 부산상고 후배이자, 과거 민주당 동지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지지유세에 나서기도 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참여정부 노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피력하며 정치적인 참여를 거부했다. 2007년에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7대 대선에서 [5] 한나라당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뒤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다.[1]
이후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을 거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 후보로 지명되던 김덕룡이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통합특보에 임명되면서[1] 2008년 9월 정부로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수석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명박 지지에 대한) "보은성 인사"의 논란이 일었다. [6]
검찰은 태광이 그동안 로비를 펼친 정·관계 인사 100여명의 리스트를 확보해 수사를 확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잇따라 불거지는 태광그룹 의혹=태광그룹 계열사인 흥국생명 해직 노조원들로 구성된 '해직자 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는 18일 "이 회장 일가가 흥국생명 지점 보험설계사들의 명의를 도용해 1997∼2000년에 만기가 돌아온 계좌에 저축성 보험 313여억원을 운용했다"며 "2001년 이후 만기되는 계좌에도 500여억원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해복투는 "1억∼2억원씩 분산 예치하는 방식으로 조성된 돈은 이 회장 일가 비자금으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해복투는 이 회장 일가가 계좌에 돈을 입금하며 보험설계사에게 돌아가야 할 17억원 상당의 보험 유치수당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해복투가 이 문제를 2003년 6월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으나 검찰은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해복투 관계자는 "전형적인 봐주기 수사였다"고 말했다.
태광의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을 수사 중인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이원곤)는 태광그룹이 그룹 차원에서 관리한 정·관계 인사 100여명의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단은 지난 16일 검찰이 부산 가야동에 있는 태광산업 소유의 한 골프연습장을 압수수색해 확보했다. 검찰은 명단에 있는 인사들이 태광의 케이블 방송과 금융사업 확장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수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흐지부지됐던 의혹…로비력 어느 정도길래=태광그룹을 둘러싼 의혹이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사정기관들이 과거 태광그룹을 상대로 한 조치도 논란이 되고 있다. 검찰, 경찰, 국세청 등이 같은 의혹을 내사하거나 수사해놓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거나 무혐의 처분을 했기 때문이다.
태광그룹의 케이블방송 사업확장 과정에서 불거진 로비 의혹에 대한 검찰의 내사도 도마에 올랐다. 서울인베스트 박윤배 대표는 "태광은 (케이블방송 권역을 확대하는 내용으로) 방송법을 개정하기 위해 철저한 '기획 로비'를 펼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4월 이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했다.
지난해 3월에는 방송사업 확장과 관련해 '성접대' 사건이 불거졌지만 서울서부지검은 청와대 행정관 2명을 성매매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수사를 끝냈다.
방송사업 확장 과정에서 태광그룹의 큐릭스 불법 인수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불법 혐의가 분명한데도 큐릭스 인수 승인이 나는 모습을 보면서 착잡했다"고 말했다. 2007년 특별세무조사에서도 태광그룹은 검찰 고발을 피했다. 이 회장이 선대 회장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상속세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었는데, 국세청은 추징금 수백억원만 부과하고 검찰에 고발하지는 않았다.
태광그룹이 2006년 쌍용화재(현 흥국화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도 이 회장 어머니인 이선애(82) 태광산업 상무이사가 직원 명의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인수 직전 쌍용화재 주식을 집중 사들였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하지만 검찰은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을 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댓글목록
애국애족정신에 근간하야
한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는
독재에 저항하는 북한민주화가 이룩되어야
분단의 땅을 초월하여 자유와 민주의 통일물결이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