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글은 56회 정원기교우가 56사이트에 올린글을 본인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 글입니다.
인촌의 매일신보 기사가 날 즈음의 한국 상황을 살펴보자.
일제는 중일전쟁을 이르켜서 많은 병력을 필요로하여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한국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려고 했다.이름하여 "총동원령" 이었다.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이었다.이런 상황하에서 의연히 버틴 사람들을 욕할것이 아니라
일제의 만행을 욕함이 마땅한 역사의 소명이다.이런 잔혹한 총독부 정책을 일일이 열거하여
우리민족이 다시는 이런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게 알려주는것이 역사가들의 의무라고 본다.
친일파들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천진무구한 생각은 소아병적인 발상이다.
당시의 무능한 왕과 대신들 때문이다.당시의 정치지도자의 책임이다.
1905년의 을사조약이 맺어짐으로서 이런 백성들의 비극의 인자는 배태된것이다.
고종에게 을사조약 결제를 받으러 가다가 졸도를 하여 "을사5적신"을 면한 사람도 있다.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죄는 하늘을 찌른다.
전 각료가 사직을 하고 등청을 거부해야 했으며,고종은 부엉이 바위로 갔어야 맞다.
이등박문의 상복을 입으라고 욱박질렀을때 차고 있던 일본도로 할복했어야 한다.
인촌이 매일신보에 기고했다는 기사는 중일전쟁이 피크에 달했을때 즉 병력자원이 엄청나게
필요할때,사회적 명망이 높은 인사의 이름을 도용하여 총독부가 그들의 기관지에 낸
기사에 불과하다.그의 친필서명이 없다.
전 조선의 유지들은 전부 "중추원"의 의관으로 임명하여 강제로 친일을 하게 했다.
수백년 전해 내려온 유교사상으로 보면,내가 후일 불명예나 손해를 보더라도 조상의
묘소를 잘 보전하고 후손이 번창하도록 하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후손이 번창하도록 하려는 사상이 골수에 밖혀 있을때,그들을 협박하여 자행한 행위이다.물론 그중에는
일제로 부터 받은 권한을 행사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도 있다.그러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진정한 학자적 양심으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고 한다면,"친일인명사전"보다 더 급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을것이다.
우선 왜 일본에 이렇게 허망하게 침략 당했을까?
고종황제의 통치력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을까?
영친왕은 이등박문의 사망시에 삼개월간 상복을 입는것 보다 차라리 자결을 택하는것이 낫지
않았을까?
최고의 친일파는 고종황제가 아닌가? 죽음으로서 백성들을 봉기 시킬수는 없었나?
얼마던지 연구해야만 할 주제는 많다.
항일에 관한 시 몇수쓰고,총독부와 반대방향으로 집을 짓고 사는것도 항일이다.
도시락 폭탄 몇개 던지는것도 항일이다.
의병을 이르켜서 항전하는것도 항일이다.
민족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고
민족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초석을 놓고
민족혼을 살리면서 정론을 펼수 있는 언론사를 반석위에 올리려는 일은 어째서
항일이 아닌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는 미국국민을 향하여 수차례
한국의 교육열이 한국발전의 원동력이되고 있다.미국민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한국교육의 원조중의 한사람이 인촌이다.
그 사람이 친일파고,애국가를 만든 사람이 친일파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중국의 백이숙제처럼 수양산 고사리만 먹다가 다 죽어야 한다는
논리이다.만약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폭탄투하를 지시하고 조정한 백법 김구선생도
살아서 돌아올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과 운명을 같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십수년전에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펀치볼에 사업상 여러번 간적이 있다.
그곳은 행정구역상 양구군 해안면 이었는데,해안면장 하는 분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육이오가 끝나고 3년여 동안 집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낮에는 국군이 진주하고,밤에는 반드시 인민군이 와서 식량도 구하고 사상교육도
시켰다고 한다.이것이 불법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할수 없었다고 한다.사상이나 법 보다는 우선 살아남는것이 급선무였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부역했다고 잡아가면 될까?
가장 큰책임은 국군통수권자에게 있다,.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죄가 가장 큰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육이오때 서울을 사수한다고 방송을 하고,자기는 대전으로 피난을
먼저 갔다.
"친일 인명사전"을 만든것은 패착이다.이유는 간단하다.임금이 나라를 빼앗기고 황후가
총에 맞아 죽고,황손이 적장의 죽음에 상복을 입는판에 그때 백성의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한 일들을 들추어내서 명단을 만든것이 얼마나 천부당만부당한 일인가?
차라리 "항일인명사전"을 만들었어야 맞다. 국민 거의다가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친일"이었는데
기준도 모호하고 결과도 감정에 치우칠수 밖에 없다.
친일규명을 하기위한 국가기관에 한 정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그의 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스승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깊이 관련되었음이 백일하에 들어났다.
국민의 혈세를 사용하여 국민을 사분오열 시킨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항일운동"보다 더 치열하게 한 대통령이 등용하는 사람은,유신 시절에 유신헌법에
법관이 된 사람은 쓰지 말았어야 맞다.다른 변명을 한다면 일제 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를 한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러면 왜 그들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는가? 그것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1)좌파정권 10여년간의 가장 강렬한 화두는 "조중동"을 파멸시키고,기득권자들을 꺼꾸러 트려서 새로운
그들 위주의 대동세상을 만드는것 이었다.
그래서 기득권 체제에 불만을 가진 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시켰다.
기득권자들의 계보는 조선말엽 혹은 일제강점기의 엘리트 구룹이었다.일본이나 미국에 유학을하고온
사람들과 그들의 후예가 주류였다.무주구천동에서 밭농사 하던 사람이나,강원도 화전민들이
친일,항일의 논의 대상이 될리가 없다.그래서 그들의 후예는 마음놓고 책을 만든것이다.
(2)과거시험 합격은 입신양명의 도구였는데,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에 생긴것이 "고등문관 시험"
이었고,이 시험의 합격자들이 지도자 계급으로 등장하였으며,새로운 정치체제하에서 사법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싸그리 친일파가 되고만다.그래서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에 따른 사법부는 100%로 친일파로
이루어 진 셈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초대 대한민국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절에 등룡된 공무원은 전부 "군사독재자"의 앞잡이라는 논리와 같다.
엄청난 논리의 비약이며 희대의 코메디이다.이 논리대로 하면 노무현 대통령도 앞잡이가 된다.
화전민이 지하실에서 태극기라도 몇장 그리다가 주재소에 잡혀가면 "독립투사"가
된다. 그들에게는 국민의 혈세로 연금이 지급되고 있다.
(3)좌파정권의 눈에든 어용학자들로 구성된 위장된 민간단체에서 찾은것이 대 히트였다.
"조중동"의 설립자들의 "친일파 화"로 조중동의 영향력을 대폭 약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한국민중들의 "친일 알레르기" 증세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 였다.실로 대박감 이었다.
조선일보의 방응모!
중앙일보의 홍진기!
동아일보의 김성수!
그들의 잘못된 점만 삿삿히,낫낫히 현미경을 들고 뒤진결과 나온것이 "친일인명사전"이다.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와 친일파의 공격!
아주 그럴듯한 대의명분이다.그러나 양머리에 개고기 였음을 알아야만 한다.
이 좌파 학자들은 남한주도로 통일이 되면 "친북파 인명사전"의 맨앞에 오를 사람들임을
널리 천명하는 바이다.
이런 경도된 절름발이 사상은 종단간에는 김일성 집단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남한의 북침설"을
신봉하게되었고,북침의 앞잡이는 이승만과 맥아더로 보는 역사관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한민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권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르른다.
이런 전도된 사상을 퍼트리려고 하였으나 다중(多衆)에게 먹혀 들리가 없다.
먹혀들지 못하게 하는 선봉에는 조중동이라는 보수언론이 있었고,가장큰 장애가 되었다.
공산주의의 정치력은 "선동"으로 부터 나온다.과거 우리는 "선동의 달인"들에게 한없이 당했다.
그래서 선동의 도구로 "친일파 색출"을 택했다.정부수립이 된후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후에야
친일파 색출을 하는 위대한 영도자가 탄생한것이다.
친일파 색출을 하게되면 이승만 정권에서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부칠수가 있고,
일일이 참여정부의 정책에 딴지를 걸고 나오는 소위 "보수"세력들의 조상을 부관참시 할수 있는
일거양득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부대되는 이익은 더욱 컸다.
정권을 걸다싶이한 난공불락의 "조중동" 공격을 쉽게 할수있는 묘책도 된다고 판단했다.
내 기억으로 노무현 대통령시절에 기억나는 것은 조중동의 공격 밖에 없다.
조선일보의 설립자,방응모1
중아일보의 설립자,홍진기!
동아일보의 설립자,김성수!
이들 모두를 친일로 공격할수 있는 묘책을 발견 한것이다.
그래서 만들자고 한것이 '친일인명사전"이고,이를 기획한 기관을 법으로 만들든것이 "친일규명위"였고
그 조직에는 정권의 게슈타포가 대거 포진을 하였다.
"친북인명사전"은 반드시 만들어야만한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 국민들이 "항북"(반공)을 했으니까 그렇다.
북한주민은 같은 민족이지만 "김정일 정권"은 분명히 "반민족적 집단"이다.
이들과 "우리 민족끼리"라고 외치는 사람도 "반민족 집단"이다.사상 유례가 드물게 같은 민족이면서
자기가 통치하는 국민을 3백만명이나 굶겨죽였고,그때 그는 불란서 보르도 포도주를 즐기고 있었다.
불란서 보르도에서는 빈티지가 좋은 포도주가 만들어 지면 세계의 명사들에게 연락을 하는데
김정일도 그 명사에 포함 된다고 한다.현재도 그의 저택 지하에는 1만여병의 최고급 포도주가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그 포도주는 북한동포의 핏빛으로 물든것 아닌던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 이런 악종은 처음이다.정말로 세계적인 수치를 우리는 당하고 있다.
이러한 일을,행위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5천년 역사를 지키는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친일"은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왕과 주요 신하들의 즉 지도자들의 무능력 탓이다.
그들의 무능력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난을 선물한것이다.
그러나 "친북"은 분명하게 "대한민국"이 존속하고,세계속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으며
국력이 세계 10위권 전후의 상태에서 이루어 졌다,더구나 북한과는 대조가 되지 않게 행복하게
잘 살고있는 상태에서 순전히 자의로 이루어진 행위이다.
대한민국의 국군의 적은 중국도,일본도 아닌 북한이 주적이다.
북한은 모든 중장거리 미사일은 남쪽으로 포문을 겨냥하고 있는 상태에서
대통령이 외교담당 장관과 통일담당 장관만 데려 간것이 아니고
국군 최고위 인사와 간첩잡는 기관의 장을 대동하고 주적의 나라에 가서
"우리민족끼리"라는 어설픈 화두를 내걸고 샴페인을 터트렸다.
"친일 인명사전"을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만든 사람들은 "친북인명사전"에 오를것임을 확신한다.
춘원 이광수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랐고,"친북인명사전"에도 오를것이다.
한국의 대 문호인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것이 아니라,우리 민족의 비극의 역사를 먼저 한탄 함이
옳다고 본다.다시는 이런 굴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함에 "친일인명사전"이 얼마나 기여할까?
의문이 앞선다.
댓글목록
무엇을 해야할지를 정하지 않으면서 누군가 무엇을 한것에 이리도 분개한다면, 이민족은 분개만 하고 살아야만 한답니까?
이젠 됐다고 봅니다. 비록 그 진위야 차후 그 후손들이 가려야 하겠지만서도 있는 기사 있는 증거를 갖고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작성된 자료에 의문을 앞세울려면, 그에 합당한 자료를 구해서 반박을 해야할겁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세월을 낚는 태공이 되는 편이 더 발전적이지 않을까요?
백이숙제와 이승만의 비교는 태공이 되어야 이해할수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