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글은 56회 정원기교우가 56사이트에 올린글을 본인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 글입니다.
인촌의 약력을 보자.
청년기에 인촌은 문맹의 백성을 보며,먼저 자기부터 신학문을 배워서 그것을 기초로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들에게 전수 시킴으로서 민족의 저력을 배양시켜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하에 동경유학을 결심하고 1908년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1914년 동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뒤 그해 7월 귀국한다.
이후에 인촌은 교육계몽에 뜻을두고, 1914년 가을 사립 중등학교를 세운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그러나 그 계획은 총독부로부터 거절당하므로 무산되고 만다.
1914년말 인촌은 최남선,안재홍 등 동경유학시절의 동창들과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중등학교 설립안을 만들어 총독부에 제출하였으나 또 거절당한다.
이때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운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그는 이때 반대가 매우 심한 부모님들을 설득하여
1915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한다.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청년시절을 꿈을 하나 이룬 셈이다.
인촌은 조선 식민치하에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의 무명과 비단을 수입하여 입고다니며, 조선의 시장을
일본제품이 지배하므로 민족산업을 이르켜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조선인이 만든 무명으로 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의 교복을 만들어서 입히고 싶은 욕망도
포함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1917년 경영난에 빠진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여,1918년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어서 죽어가던 조선의 면직업에 불을 짚힌다.
더욱 민족기업을 발전시키위하여, 1919년 별도로 "경성방직주식회사"를 만들어서 일본 면직물
업체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1923년부터 1935년까지 기업이 번창하여 1939년에는 만주에도
공장을 차려서 수출까지하게 된다.아마도 한국 최초의 수출업체가 이닌가 추측해 본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파리 강화회담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하자
인촌은 송진우에게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기고 독림운동 준비를 시작한다.동경유학시절의 학맥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주로 중앙학교의 숙직실을 이용하였다.
3.1 운동을 준비하다가 일본 밀정에게 들켜서 잡혀간다.
1920년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송진우와 경영을 시작한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가 평양의 독립운동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총독부가 신문배포를 금지
시켰으나 인촌은 배포해 버렸다.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총독부로부터 검열,삭제,배포금지,정간 등
수없는 시달림을 받았다.
1935년 베르린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의 사진을 지워버려
폐간을 당했다.1937년 다시 복간되었다.동아일보는 네번 폐간을 당했고 인촌은 그때마다 총독부에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당한다.
1926년 순종임금의 국장일에 6.10 만세 사건이 중앙고등학교 학생들 주도로 발생한다.
이때 학생들이 학교의 존립을 걱정하자,인촌은 걱정하지 말고 잘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한다.
1929년 구라파 여행길에, 상해 임시정부에 들러 임정요인들을 격려하고 임정이 운영하던 학교에
거금을 기부하고, 도산 안창호선생등을 찾아뵙고 위로하여 감격을 받는다.
1932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한다.
오늘의 고려대학교의 모태였다.
1940년 일제가 동아일보 등 민족신문을 강제 폐간 시키자,인촌은 귀향하여
1945년까지 칩거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어느하나 "친일"의 흔적도 없다.
이 사실은 누구나 다아는 인촌의 약력이다.
친일파 두목이 만든 신문사를 총독부가 폐간 시킨것인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친일파가 가장 심하게 날뛸때 ,그야말로 친일파가 가장 물이 좋을때
인촌은 고향에서 세월을 낚고 있었다.
만약 인촌이 진짜 친일파 두목이라면,그가만든 동아일보를 폐간 시킨 총독이나,물좋을때
물때를 놓지고 고향에 내려간 인촌,그 두사람은 저능아 일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째서 좌파 떨거지들은 "친일 인명사전"에 자신있게 올렸을까?
왜 인촌을 친일파로 몰지 않으면 않되었을까를 깊이 깊이 삭여보아야만 한다.
근거를 찾지 않고 건드리기에는 너무나 인촌이 거물인것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총동원해서 보니까,"터니까 먼지가 나더라!"라는 근거를 찾았다.
실로 그들의 대박이었다.
댓글목록
싸움에도 전술과 전략이 있는 바, 수십년간 계속되던 일제 강압 상황에서 때로는 정면돌파,
때로는 우회 때로는 후퇴까지도 모두 큰 맥락에서 "전술"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할
겁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할 때 그것을 굴복으로 보는 시각은 매우 편협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판명 기준을 보고 있노라면 저희가 어릴 때 동네에서 하고놀던
"십자가 놀이"가 생각 나는군요. 금만 밟으면 바로 아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