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본문
광적으로 책에 빠져 서점 직원이 된 젊은이
《노란 불빛의 서점》은 서점에 매료돼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서점을 찾
는다는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
다. 저자 루이스 버즈비는 열다섯 살 때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읽고 난 후 광적으로 책을 탐닉
하는 젊은이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그
는 서점을 찾지 않았다. 서점이란 단순히
책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업스타트 크로’란 서점에 가보고서 거기에 완전 매료됐다. 업스타
트 크로는 셰익스피어를 일컫는 말인데, 그의 비약적인 출세를 시기했던 동
시대인이 경멸조로 붙여준 별명이다. 루이스는 업스타트 크로의 딱히 무엇이
라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과 편안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나는 서점을 나오면서 책값을 치르고 더불어 입사원서도 청구했
다. 내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업스타트 크로는 2년 가까이나 나를 채용
해주지 않았다. 나는 끈질기게 매달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매주 그곳에 가
있었으며, 문학 지식 테스트에 세 차례나 응시했다.
서점 매니저는 친절하고 우호적이었지만, 고등학생을 채용하는 데는 얼마
간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여름, 매니저는 선반에
책 얹는 일을 도와달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멋지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일거리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살기 안성맞춤인 도시를 찾아
낸 것만 같았다. 서점으로 나를 이끈 게 무엇이었는지는 몇 년이 지난 지금
도 딱히 표현할 수 없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의 손에 책을 쥐어줄 때의 만족감을 잊을 수 없어 업스
타트 크로에서 4년을 일했다. 이후에도 프린터스 서점에서 6년, 그리고 서점
외판원으로 7년을 일했다. 그는 서점에서 일할 때의 기분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책이 든 상자가 도착한다든지, 그 상자에서 쏟아져 나올 책들만 생
각하면 감격에 겨워 몸을 떨었다. 지겹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요즘도 서점에 가면 복도에 늘어선 책상자들 쪽으로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
가 ‘어이, 일손이 부족하지 않소?’ 하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다.”
루이스는 서점에서 느긋함과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설명이다.
책은 느림을 동반한다. 시간을 요한다. 글을 쓰는 일, 책을 펴내는 일, 읽는
일이란 죄 늘어지는 일이다. 400쪽짜리 책 한 권이면 집필에만도 몇 년이 걸
리거니와 출판되기까지는 그 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을 구입한 뒤에는 그걸 읽는 독자는 며칠이나 몇 주, 때로는 몇 달에 걸쳐
한 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씩을 보낼 작정을 해야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책의 다양한 특성들을 소개한다. 우선 발견의 기쁨을 제공
한다. 그의 친구의 일화가 여기에 해당된다.
내 친구 리즈 스자블라는 열아홉 살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처음 알았는
데 어느 날인가는 학교를 빼먹고 집에 남아서 전날 밤에 읽기 시작했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아주 끝장내버렸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는 베르
무트 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리즈는 그 책에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자
기도 모르게 어머니가 평소 술을 보관해두는 캐비닛을 뒤지러 급히 주방으
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베르무트 술이 거기 떡하니 모
셔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유잔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베르무트를 따라
거실에 있는 큰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틈틈이 술도 홀짝이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술이 얼근히 취해오자 가끔씩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빈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 정신. 서구문학이 일궈낸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꼽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이 책은 문학적,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돈키호테》도 가격 면에서 보면 다른 책들과 다를 게 없다. 저속한 정치가
들의 전기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서점의 위치도 책값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뉴욕 부유층을 상대하는 화려한 숍에서나, 황량한 바람을 맞
으며 서 있는 캔자스의 스트립 몰에서나 사고파는 값이 똑같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게 바로 책인 것이다.
아울러 책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루이스는 책을
통해 독자와 작가, 독자와 독자, 작가와 작가가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런 관
계는 보통 일대일로 이루어지는데, 작가 한사람이 강좌를 열어 강의하고 그
것을 독자 한 명이 경청하는 식이란 것이다. 존 어빙은 이를 한 천재가 다른
천재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책은 살아 있다
루이스는 이 책에서 “책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게 직격탄을 날린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문화
검시관들은 다투어 교양의
죽음을 선언했다. 먼저 1960
년대 초에 소설이 죽었고,
1980년대 말에는 서점 자체
가 죽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죽었거나 적어도 위독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
다.
그러나 이 주장을 반박할, 적어도 거기에 얼마간의 균형감각을 보태줄 다
른 숫자들도 있다. 자료에 따르면 2004년에 미국의 출판사들은 13만 5000권
에서 17만 5000권에 이르는 신간서적을 간행했다. 신간은 1년 평균 15만여
권, 하루에 411권이 나오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의 출판사들은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9세기를 통틀어 모아들였던 것보다 5만 권이나 많
은 신간을 매년 간행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숫자는 또한 규모가 가장 크다는 서점의 서가에 있는 책보다 5만 부 가
량 많은 숫자이다.
현재 인쇄된 책은 약 400만 권이 유통되고 있고, 절판된 책은 150만권쯤
된다. 앞서 100년간 130만 종이 발행되었으나, 1980년 이후에는 200만 종이
넘는 신간이 발간됐다. 이는 미국의 출판물에만 해당하는 숫자다. 미국인들
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책을 많이 출판하지만 국민 1인당 발행 권수로 치면
놀라울 만큼 저조하다. 영어권 국가들 중에서 미국은 영국, 캐나다, 뉴질랜
드, 오스트레일리아에 한참 뒤져 다섯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은 한 사
람당 2336권의 책을 발행하는 데 반해 미국은 고작 545권에 불과하다.
사회비평가가 교양 시대의 종언을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책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으니 말이다.
책값이 너무 비싸 책을 살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사례
를 들어 그렇지 않은 이유를 조근조근 설명한다.
여러분이 어린애였을 때 책값이 50센트쯤 했다거나,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
서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장본 소설 한 권에 25달러는 터
무니없는 사치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한 비교만으로 이 까다로운
고객이 책의 장기적인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이다.
요즘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표 한 장을 구매하려면 10달러가 든다. 2시간
가량 지나면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돈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적어도 20달러를
더 내고 DVD를 살 때까지는 그렇다. 400쪽짜리 소설은 아마 다 읽으려면 8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일단 책을 사면 그 내용은 당신 것이 되고, 머릿
속에 삼삼하게 떠오르는 기막히게 좋은 문단에 표시를 해둘 수도 있고,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찾아볼 수도 있다.
책은 영화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고, 더 사용자 친화적이다. 전기 없이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으며, 지금 절반쯤 지나고 있다, 3분의 1쯤 왔다, 끝에서
단 몇 장 남았다, 하는 식으로 손가락으로 흥분을 가늠하거나 조절하면서 항
상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인상 깊은 장면을 슬
로 모션으로 볼 수 있으나 거기엔 얼마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책 속의
한 구절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단어들의 힘을 빼앗아버
리는 일은 없다.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책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동력으로 삼아 그의 내부에 이미지들을 만든다. 책은 두뇌에 좋다. 신경학자
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는 사람의 두 눈이 멍하니 앞을 향하고 있
지만, 책을 읽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 신
체 움직임이 마음을 지배하는 뇌를 자극하고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드커버 소설 한 권을 구입하는 데 쓴 25달러로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와
인을 뺀 요리와 샐러드, 디저트를 사먹는 데 쓸 수가 있다.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지만 식사는 재빨리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책은 소화는 될지언정 결코 소비되는 일은 없다며 우리를 일깨운 바 있다.
여러 장르가 한데 어우러진 책
이 책은 루이스 개인의 경험담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 서점, 서적
외판원의 역사와 특이한 서점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
데 하나만 살펴보자.
영화 <비포선셋>에서 주인공
제시와 셀린느는 파리의 한 고서
점에서 우연히 만난다. 바로 그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세계 유명 문호들이 줄지어 드나
들었던 곳이다. 이 책에서는 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도 자세
하게 소개한다.
1919년 11월 17일 실비아 비치란 서른두 살
난 미국 여성이 파리 센 강 좌안의 뒤퓌트랑
8번가에 서점을 열었다. 뉴저지의 친척 아주
머니에게서 3,000달러를 빌린 비치는 전에 세
탁소였던 곳을 영어권 서점 겸 대여점으로 바
꾸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개점 즉시 센
강 좌안의 예술가들, 그러니까 영국과 미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작
가와 화가, 음악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비치는 가게를 안락한 장소로 만들고 싶어 했
고 자기 고객들에게 잠시만이라도 머물렀다
가라고 권하곤 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건재하던 20년
동안 정규회원이 되어 그곳을 드나든 작가들은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셔
우드 앤더슨,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D. H. 로렌스, 거트루드
스타인, 사무엘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1941년 12월에 폐점했다.
현재 노트르담 좌안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실비아 비치가 운
영하던 그 가게가 아니고 그녀의 서점에 경의를 표해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
다. 오늘날 이 서점의 전면에는 새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대부
분이 파리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 끈이 닿아 있다는 것 때문에 유명해
진 책들, 즉 율리시스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의 책들이다. 이 책들은 미
국에서 살 수 있는 최신판본과 다를 게 없지만 센 강변에서 구입했다는 이
유로 더 낭만적으로 보일 것이다.
이 책의 성격은 역자가 말미에 쓴 글에서 잘 나타난다.
아주 독특하게도 이 책은 여러 가지 장르가 한데 어우러져 읽으면 읽을수
록 흥미를 더한다. 처음엔 소박하고 평범한 일기처럼 시작되다가 책과 서점에
얽힌 일화가 따라붙으면서 어느새 한 탐서주의자의 뜨거운 성장소설로 탈바
꿈하는가 하면, 책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가 금세 연구열로 이어져
동서고금을 포괄하는 출판 비즈니스의 역사를 거침없이 펼쳐놓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편집이다. 노란 불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책들이 표지
를 장식하고 있으며 한 장 넘기면 노란 기름종이 위에
빈센트 반 고흐가 한 말이 쓰여 있다.
“언젠가 저녁 무렵 노랗게 물든 서점을 그려봐야겠다
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어둠속 영롱한 빛 같은
풍경을.”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에
선뜻 손이 가는 이유다.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 문학동네, 2009,이경수정리
《노란 불빛의 서점》은 서점에 매료돼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서점을 찾
는다는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
다. 저자 루이스 버즈비는 열다섯 살 때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읽고 난 후 광적으로 책을 탐닉
하는 젊은이로 바뀌었다. 하지만 당시 그
는 서점을 찾지 않았다. 서점이란 단순히
책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업스타트 크로’란 서점에 가보고서 거기에 완전 매료됐다. 업스타
트 크로는 셰익스피어를 일컫는 말인데, 그의 비약적인 출세를 시기했던 동
시대인이 경멸조로 붙여준 별명이다. 루이스는 업스타트 크로의 딱히 무엇이
라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과 편안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나는 서점을 나오면서 책값을 치르고 더불어 입사원서도 청구했
다. 내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업스타트 크로는 2년 가까이나 나를 채용
해주지 않았다. 나는 끈질기게 매달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매주 그곳에 가
있었으며, 문학 지식 테스트에 세 차례나 응시했다.
서점 매니저는 친절하고 우호적이었지만, 고등학생을 채용하는 데는 얼마
간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여름, 매니저는 선반에
책 얹는 일을 도와달라며 나를 불렀다. 나는 멋지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일거리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살기 안성맞춤인 도시를 찾아
낸 것만 같았다. 서점으로 나를 이끈 게 무엇이었는지는 몇 년이 지난 지금
도 딱히 표현할 수 없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의 손에 책을 쥐어줄 때의 만족감을 잊을 수 없어 업스
타트 크로에서 4년을 일했다. 이후에도 프린터스 서점에서 6년, 그리고 서점
외판원으로 7년을 일했다. 그는 서점에서 일할 때의 기분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책이 든 상자가 도착한다든지, 그 상자에서 쏟아져 나올 책들만 생
각하면 감격에 겨워 몸을 떨었다. 지겹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요즘도 서점에 가면 복도에 늘어선 책상자들 쪽으로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
가 ‘어이, 일손이 부족하지 않소?’ 하고 소리를 지르기 일쑤다.”
루이스는 서점에서 느긋함과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설명이다.
책은 느림을 동반한다. 시간을 요한다. 글을 쓰는 일, 책을 펴내는 일, 읽는
일이란 죄 늘어지는 일이다. 400쪽짜리 책 한 권이면 집필에만도 몇 년이 걸
리거니와 출판되기까지는 그 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을 구입한 뒤에는 그걸 읽는 독자는 며칠이나 몇 주, 때로는 몇 달에 걸쳐
한 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씩을 보낼 작정을 해야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책의 다양한 특성들을 소개한다. 우선 발견의 기쁨을 제공
한다. 그의 친구의 일화가 여기에 해당된다.
내 친구 리즈 스자블라는 열아홉 살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처음 알았는
데 어느 날인가는 학교를 빼먹고 집에 남아서 전날 밤에 읽기 시작했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아주 끝장내버렸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는 베르
무트 술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리즈는 그 책에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자
기도 모르게 어머니가 평소 술을 보관해두는 캐비닛을 뒤지러 급히 주방으
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베르무트 술이 거기 떡하니 모
셔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우유잔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베르무트를 따라
거실에 있는 큰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틈틈이 술도 홀짝이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술이 얼근히 취해오자 가끔씩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면서
빈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 정신. 서구문학이 일궈낸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꼽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이 책은 문학적, 역사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돈키호테》도 가격 면에서 보면 다른 책들과 다를 게 없다. 저속한 정치가
들의 전기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서점의 위치도 책값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뉴욕 부유층을 상대하는 화려한 숍에서나, 황량한 바람을 맞
으며 서 있는 캔자스의 스트립 몰에서나 사고파는 값이 똑같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게 바로 책인 것이다.
아울러 책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루이스는 책을
통해 독자와 작가, 독자와 독자, 작가와 작가가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런 관
계는 보통 일대일로 이루어지는데, 작가 한사람이 강좌를 열어 강의하고 그
것을 독자 한 명이 경청하는 식이란 것이다. 존 어빙은 이를 한 천재가 다른
천재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책은 살아 있다
루이스는 이 책에서 “책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게 직격탄을 날린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문화
검시관들은 다투어 교양의
죽음을 선언했다. 먼저 1960
년대 초에 소설이 죽었고,
1980년대 말에는 서점 자체
가 죽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죽었거나 적어도 위독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
다.
그러나 이 주장을 반박할, 적어도 거기에 얼마간의 균형감각을 보태줄 다
른 숫자들도 있다. 자료에 따르면 2004년에 미국의 출판사들은 13만 5000권
에서 17만 5000권에 이르는 신간서적을 간행했다. 신간은 1년 평균 15만여
권, 하루에 411권이 나오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의 출판사들은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9세기를 통틀어 모아들였던 것보다 5만 권이나 많
은 신간을 매년 간행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숫자는 또한 규모가 가장 크다는 서점의 서가에 있는 책보다 5만 부 가
량 많은 숫자이다.
현재 인쇄된 책은 약 400만 권이 유통되고 있고, 절판된 책은 150만권쯤
된다. 앞서 100년간 130만 종이 발행되었으나, 1980년 이후에는 200만 종이
넘는 신간이 발간됐다. 이는 미국의 출판물에만 해당하는 숫자다. 미국인들
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책을 많이 출판하지만 국민 1인당 발행 권수로 치면
놀라울 만큼 저조하다. 영어권 국가들 중에서 미국은 영국, 캐나다, 뉴질랜
드, 오스트레일리아에 한참 뒤져 다섯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은 한 사
람당 2336권의 책을 발행하는 데 반해 미국은 고작 545권에 불과하다.
사회비평가가 교양 시대의 종언을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책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으니 말이다.
책값이 너무 비싸 책을 살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사례
를 들어 그렇지 않은 이유를 조근조근 설명한다.
여러분이 어린애였을 때 책값이 50센트쯤 했다거나,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
서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장본 소설 한 권에 25달러는 터
무니없는 사치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한 비교만으로 이 까다로운
고객이 책의 장기적인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이다.
요즘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표 한 장을 구매하려면 10달러가 든다. 2시간
가량 지나면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돈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적어도 20달러를
더 내고 DVD를 살 때까지는 그렇다. 400쪽짜리 소설은 아마 다 읽으려면 8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일단 책을 사면 그 내용은 당신 것이 되고, 머릿
속에 삼삼하게 떠오르는 기막히게 좋은 문단에 표시를 해둘 수도 있고,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찾아볼 수도 있다.
책은 영화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고, 더 사용자 친화적이다. 전기 없이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으며, 지금 절반쯤 지나고 있다, 3분의 1쯤 왔다, 끝에서
단 몇 장 남았다, 하는 식으로 손가락으로 흥분을 가늠하거나 조절하면서 항
상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인상 깊은 장면을 슬
로 모션으로 볼 수 있으나 거기엔 얼마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책 속의
한 구절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단어들의 힘을 빼앗아버
리는 일은 없다.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책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동력으로 삼아 그의 내부에 이미지들을 만든다. 책은 두뇌에 좋다. 신경학자
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는 사람의 두 눈이 멍하니 앞을 향하고 있
지만, 책을 읽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 신
체 움직임이 마음을 지배하는 뇌를 자극하고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드커버 소설 한 권을 구입하는 데 쓴 25달러로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와
인을 뺀 요리와 샐러드, 디저트를 사먹는 데 쓸 수가 있다.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지만 식사는 재빨리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책은 소화는 될지언정 결코 소비되는 일은 없다며 우리를 일깨운 바 있다.
여러 장르가 한데 어우러진 책
이 책은 루이스 개인의 경험담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 서점, 서적
외판원의 역사와 특이한 서점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
데 하나만 살펴보자.
영화 <비포선셋>에서 주인공
제시와 셀린느는 파리의 한 고서
점에서 우연히 만난다. 바로 그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세계 유명 문호들이 줄지어 드나
들었던 곳이다. 이 책에서는 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도 자세
하게 소개한다.
1919년 11월 17일 실비아 비치란 서른두 살
난 미국 여성이 파리 센 강 좌안의 뒤퓌트랑
8번가에 서점을 열었다. 뉴저지의 친척 아주
머니에게서 3,000달러를 빌린 비치는 전에 세
탁소였던 곳을 영어권 서점 겸 대여점으로 바
꾸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개점 즉시 센
강 좌안의 예술가들, 그러니까 영국과 미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작
가와 화가, 음악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비치는 가게를 안락한 장소로 만들고 싶어 했
고 자기 고객들에게 잠시만이라도 머물렀다
가라고 권하곤 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가 건재하던 20년
동안 정규회원이 되어 그곳을 드나든 작가들은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셔
우드 앤더슨,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D. H. 로렌스, 거트루드
스타인, 사무엘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1941년 12월에 폐점했다.
현재 노트르담 좌안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실비아 비치가 운
영하던 그 가게가 아니고 그녀의 서점에 경의를 표해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
다. 오늘날 이 서점의 전면에는 새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대부
분이 파리와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 끈이 닿아 있다는 것 때문에 유명해
진 책들, 즉 율리시스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의 책들이다. 이 책들은 미
국에서 살 수 있는 최신판본과 다를 게 없지만 센 강변에서 구입했다는 이
유로 더 낭만적으로 보일 것이다.
이 책의 성격은 역자가 말미에 쓴 글에서 잘 나타난다.
아주 독특하게도 이 책은 여러 가지 장르가 한데 어우러져 읽으면 읽을수
록 흥미를 더한다. 처음엔 소박하고 평범한 일기처럼 시작되다가 책과 서점에
얽힌 일화가 따라붙으면서 어느새 한 탐서주의자의 뜨거운 성장소설로 탈바
꿈하는가 하면, 책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가 금세 연구열로 이어져
동서고금을 포괄하는 출판 비즈니스의 역사를 거침없이 펼쳐놓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편집이다. 노란 불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책들이 표지
를 장식하고 있으며 한 장 넘기면 노란 기름종이 위에
빈센트 반 고흐가 한 말이 쓰여 있다.
“언젠가 저녁 무렵 노랗게 물든 서점을 그려봐야겠다
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어둠속 영롱한 빛 같은
풍경을.”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에
선뜻 손이 가는 이유다.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 문학동네, 2009,이경수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