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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운치, 담장 밖에서만 즐기면 뭐해 | |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예부터 이어져온 명당 자리에 배타적 고급 주택가 이미지 덧입혀져 | |
현시원 기자 | |
‘나랏님’ 배출한 가회동 31번지 젊은 세대들은 락고재를 비롯한 아기자기한 한옥을 찾아 디지털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적극적으로 그 풍경을 담아간다. 체험하지 못한 대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층들은 전통 창호를 만드는 가회동 ‘청원산방’의 대문도 스스럼없이 연다. “대학생들 덕에 여러 번 사진 모델이 되었다니까요. 창호에 대해서 잘 몰라도 ‘너무 예쁘다’는 반응을 보이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반갑죠.” ‘청원산방’을 운영하는 심용식씨는 실제 주거 공간이자 공방인 한옥을 개방해, 문 밖에 선 이들을 안으로 초대한다. 가회동을 찾은 일반인들이 한옥 지붕이나 대문밖에 볼 수 없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져 실제 한옥 내부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것. “이름만 요란하게 ‘한옥 지역이다’, ‘북촌 한옥마을이다’ 말하지만 사실 개방된 한옥도 없는데 뭘 보라는지 안타까웠어요.” 이곳을 발견한 이들은 행운이지만, 사실 가회동에 와도 마땅한 한옥 운치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탐정이나 도둑처럼 주변을 배회하거나 서성이기 십상이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낮은 처마 지붕의 한옥은 점점 ‘내 것이기 힘든’ 고급 주택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있다. 사실 가회동 31번지는 옛말로 치자면 ‘나랏님’을 배출한 동네로 올해 초 특히 유명세를 탔다. 이미 가회동은 고급 한옥이 밀집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풍수지리에서는 예부터 오랜 전통이 숨쉬는 명당으로 꼽혀 왔다. 특히 2000년 초 시작된 서울시의 ‘북촌 가꾸기’ 프로젝트 이후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엔 많은 이들이 사적과 민속자료, 문화공간, 그리고 좋은 자연 풍광을 따라 이 근방을 찾는다. 한옥을 새로 꾸며 현대 가옥으로 탈바꿈시키는 가회동 안주인들이 늘어나며 몇 년 전부터는 집값도 대폭 올랐다. 가회동에서 40년간 부동산을 운영한 고아무개씨는 “옛날에는 택시가 들어오기 꺼려하는 구불구불한 길목이었는데, 어느새 있는 자들이 탐내는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중앙고와 공간사 건물도 주목하길 2004년 이후 가회동 일대 한옥 여러 채를 개조한 건축가 황두진씨는 “가회동에 필요한 것은 인위적인 한옥 박물관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한옥 이외에 가회동의 특성에 다양한 시선을 보내자고 주장한다. 그는 “가회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통 한옥이 많다는 것만이 가회동의 유일한 특성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근래 젊은이들에게도 매력적인 정취를 가진 곳으로 인식되는 가회동은 일반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자발적인 주거지역’으로 남아 있어야 인사동이나 삼청동이 겪은 상업화에서 비껴날 수 있다는 말이다. 황씨는 한옥뿐 아니라 인근에 있는 중앙고등학교나 공간사 건물을 주목해야 할 풍경으로 꼽았다. 3.1 독립운동의 거사가 배태된 중앙고는 명문 학교들이 모두 강남으로 이전할 때에도 강북에 남았다. 공간사는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로 꼽히는 건축가 김수근이 1971년 설계한 건물로 여전히 정교하고 세련된 구조물로 꼽힌다. 황씨는 “어떤 동네든 사람이 살기 좋은 주거지일 때 그 색깔이 마모되어도 빛날 수 있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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