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터뷰] 1960년대 숭례문 중수 당시 공사감독관 한옥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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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에 담긴 지혜 안다면, 복원 함부로 얘기 말아야"
[조선 인터뷰] 1960년대 숭례문 중수 당시 공사감독관 한옥문화원장
"돌 괴는 방식·나무 끼우는 방식에도 과학적 지혜
60년대 수리 땐 대목수들이 옛 방식대로 지어
강원도에서 목재 가져올 땐 뗏목 한강에 띄워
좌우 성벽 포함해 주변 본래 모습까지 되살리길"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2.17 22:59 / 수정 : 2008.02.18 04:15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것 같은 기분입니다…." 17일 서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화재 현장을 찾은 신영훈(申榮勳·73) 한옥문화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기 어린 눈으로 불타고 남은 숭례문을 응시하면서 "그래도 1층은 많이 살아 남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호가 '목수(木壽)'인 그는 평생을 한국 전통 건축을 짓고 알리는 데 몸바친 건축사가(建築史家)이자 대목수다. 특히 지난 1961~63년 숭례문 중수(重修) 당시에도 공사감독관으로 참여, 당대의 대목수들과 함께 숭례문을 해체했다 다시 짓기도 했다. 최근 한옥 설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던 그는 14일 귀국 길에 인천공항 서점 가판대에서 국내 신문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3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했던 숭례문이 나흘 전 불타 버렸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 때문이었다.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던 그는 "건물을 다시 짓는다고 해도 복원을 하기는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1960년대 초 숭례문을 수리할 당시의 상황은?
"숭례문을 수리했던 것은 6·25 전쟁 때 포탄을 맞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전쟁 당시 옆으로 지나가던 탱크의 진동 때문에 지반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치목(治木) 공사를 맡았던 이광규(李光奎)씨, 석축을 맡은 김천석(金千石)씨 같은 분들은 조선 왕조 대목수의 맥을 잇고, 옛집의 격(格)이 무엇인지 잘 아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평생의 경험과 정성을 숭례문에 쏟았고, 현대식이 아니라 옛날 방식대로 집을 지었다.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나 김상기 문화재위원장도 그분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
―그 때 보았던 옛 숭례문은 어떤 곳이었나?
"그 곳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돌을 괴는 방식, 나무를 끼워 넣는 방식 하나마다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가 스며들어 있었다. 대들보만 보더라도 길이가 다 달랐다. 목재마다 받쳐주는 힘에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면밀히 계산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과장도 지나친 장식도 없는,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대단히 견고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국에선 곧 숭례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 '복원(復元·復原)'이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원래 우리말도 아니고 일본말일 뿐더러, 어떻게 우리가 조선 초에 만들었던 그 건물을 원형대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새로 숭례문을 짓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중건(重建)'이라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21세기의 건물이다. 국보 1호 지정도 해제해야 한다. 일부 부서진 걸 수리했던 1960년대의 '중수'와는 상황이 다르다."
―2006년 만들어 놓은 숭례문의 정밀 실측도를 바탕으로 한다는데….
"재현이란 대충 형태만 같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선 옛날에 쓰던 도구가 완전히 다르다. 나무를 깎는 데 쓰던 목척(木尺)의 길이는 시대마다 차이가 난다. 돌 쌓는 데 쓰는 자와 나무 다듬는 데 쓰는 자도 다를 수 있다. 1960년대 중수 때도 그걸 깨닫고 옛날 척도를 일일이 다시 계산했다. 구조물의 비밀스런 곳에는 반드시 옛 치수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광규씨 같은 사람은 그때까지도 조선시대의 자를 가지고 있었다."
아호가 '목수(木壽)'인 그는 평생을 한국 전통 건축을 짓고 알리는 데 몸바친 건축사가(建築史家)이자 대목수다. 특히 지난 1961~63년 숭례문 중수(重修) 당시에도 공사감독관으로 참여, 당대의 대목수들과 함께 숭례문을 해체했다 다시 짓기도 했다. 최근 한옥 설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던 그는 14일 귀국 길에 인천공항 서점 가판대에서 국내 신문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3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했던 숭례문이 나흘 전 불타 버렸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 때문이었다.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던 그는 "건물을 다시 짓는다고 해도 복원을 하기는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1960년대 초 숭례문을 수리할 당시의 상황은?
"숭례문을 수리했던 것은 6·25 전쟁 때 포탄을 맞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전쟁 당시 옆으로 지나가던 탱크의 진동 때문에 지반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치목(治木) 공사를 맡았던 이광규(李光奎)씨, 석축을 맡은 김천석(金千石)씨 같은 분들은 조선 왕조 대목수의 맥을 잇고, 옛집의 격(格)이 무엇인지 잘 아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평생의 경험과 정성을 숭례문에 쏟았고, 현대식이 아니라 옛날 방식대로 집을 지었다.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나 김상기 문화재위원장도 그분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
―그 때 보았던 옛 숭례문은 어떤 곳이었나?
"그 곳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돌을 괴는 방식, 나무를 끼워 넣는 방식 하나마다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가 스며들어 있었다. 대들보만 보더라도 길이가 다 달랐다. 목재마다 받쳐주는 힘에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면밀히 계산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과장도 지나친 장식도 없는,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대단히 견고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국에선 곧 숭례문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 '복원(復元·復原)'이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원래 우리말도 아니고 일본말일 뿐더러, 어떻게 우리가 조선 초에 만들었던 그 건물을 원형대로 되돌릴 수 있겠는가? 새로 숭례문을 짓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중건(重建)'이라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21세기의 건물이다. 국보 1호 지정도 해제해야 한다. 일부 부서진 걸 수리했던 1960년대의 '중수'와는 상황이 다르다."
―2006년 만들어 놓은 숭례문의 정밀 실측도를 바탕으로 한다는데….
"재현이란 대충 형태만 같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선 옛날에 쓰던 도구가 완전히 다르다. 나무를 깎는 데 쓰던 목척(木尺)의 길이는 시대마다 차이가 난다. 돌 쌓는 데 쓰는 자와 나무 다듬는 데 쓰는 자도 다를 수 있다. 1960년대 중수 때도 그걸 깨닫고 옛날 척도를 일일이 다시 계산했다. 구조물의 비밀스런 곳에는 반드시 옛 치수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광규씨 같은 사람은 그때까지도 조선시대의 자를 가지고 있었다."
- 1960년대 숭례문 중수에 참여했던 신영훈 한옥문화원장이 17일 숭례문 화재 현장에서“부모님 상을 당한 심정”이라고 말하고 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그렇게 짓고 나면 나무가 뒤틀리고 변형된 뒤에는 완전히 다른 집이 돼 버린다. 게다가 기계톱 같은 요즘 연장을 가지고 깎는다면 나무의 질감과 맛이 전혀 달라진다. 옛 숭례문의 정신과 분위기를 잃어버린 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부분까지 세밀하게 신경을 써서 다시 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옛날에 숭례문을 지을 때는 강원도에서 서울로 목재를 보내는 방식도 달랐다. 일부러 소나무를 묶어서 뗏목을 만들어 한강에 띄웠다. 그러면 물에 젖는 과정에서 소나무의 송진이 물을 막기 위해 분출돼 아주 단단해진다. 지금 그렇게 하기가 쉽겠는가? 덕수궁 같은 데 가서 처마를 보면 나무가 갈라져 있는 게 다 그런 방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못 하나를 새로 만들더라도 모양은 비슷하게 할 수 있지만 똑같은 쇠를 가지고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건물 형태 속에 담긴 옛 어른들의 정신까지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최대한 거기에 가깝게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노력을 해야 할까?
"숭례문은 조선시대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 법식(法式)을 제대로 파악해 옛 사람들의 식견을 존중해야 한다. 석축부터 차근차근 점검하고, 불에 타 버린 나무들 중에서도 옛날 나무와 1960년대에 갈아 넣은 나무를 하나하나 분류한 뒤 쓸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나무를 다듬는 일도 반드시 현장에서 옛 재료들을 봐 가면서 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진행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주 새로운 양식으로 숭례문을 다시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자기 자식이 시원치 않다고 남의 집 가서 새 자식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는 건물을 중건할 때마다 당대의 건축양식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한옥의 건축양식이란 것이 없으니 옛 양식과 법식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재청에선 좌우 성벽까지 다시 만든다는 계획을 밝혔다.
"좌우에서 석축이 문을 끼고 있으면 옆으로 차가 지나가더라도 땅이 덜 흔들린다. 하지만 아무래도 큰 도로가 옆에 있다면 건물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번에야말로 일제가 성벽을 뚫고 만들어 놓은 새 길을 과연 그대로 둘 것인가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그곳 주변의 본래 모습까지도 살려서 진정 옛 문화가 살아나는 곳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번 화재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 '우리 것'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도, 제대로 교육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인사도 잘못됐다. 문화재 행정의 수장 자리에 우리 문화유산의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을 앉혀 놨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해인사나 부석사처럼 산골짜기에 있는 집에 불이 나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문화재는 관광상품일 뿐, 옛날 것에 대한 철학은 잃어버린지 오래다. 광화문 다시 짓는다고 가설덧집 만들어 놓은 꼴 좀 봐라. 옛 모습대로 중건하겠다는 경건한 자세란 찾아볼 수 없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국민 전체가 문화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목수' 신영훈씨는
'한옥의 장인(匠人)' '우리 시대의 목수'라는 말을 듣고 있는 건축사학자이자 고건축 전문가다. 1935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중앙고등학교 3학년 시절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문화재 전문가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고(古)건축 전문가 임천 선생을 만나 수원성 동장대 보수 공사에 참여한 뒤로는 고건축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석굴암, 화엄사 각황전, 쌍봉사 대웅전, 진주성 등 각종 중수·보수공사에서 감독관을 지냈다. 1960년대 초 숭례문 중수공사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 중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영국 대영박물관과 덴마크 국립박물관 한국실에 사랑방 등 한국 전통 건축시설을 건립했으며, 사진작가 김대벽씨와 함께 작업한 '역사 기행 시리즈'를 10권까지 냈다. 지난 2000년 한옥문화원을 설립해 후학 전문가들을 양성해 왔다. "주변의 산수(山水)를 고려하는 안목, 살아 숨쉬는 공간에 대한 철학, 가정의 안온함을 빚어내는 기술이 한 덩어리가 돼야 잘 된 한옥이 탄생할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것 같은 기분입니다….” 17일 서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의 화재 현장을 찾은 신영훈 한옥문화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기 어린 눈으로 불타고 남은 숭례문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는 “그래도 1층은 많이 살아 남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기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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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아버님과 같은 일을 하시는 군요.... 저의 집은 아버지까지 3대째 가업으로 고건축을 하고 계십니다...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더라구요...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숭례문 복원 어떻게 보시나요..... 누가 하던지 쉽지 않을 것이라더군요...복원을 잘 하든 못하든 국민들의 시선이 가장 무서울 것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