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불 시절을 떠올리며… <font color=blue>김창완</font>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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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논단] 연탄불 시절을 떠올리며…
한겨울 더운물 쏟아지는 요즘 지구상 16억은 전기사용 못해
한집 한등끄기 에너지 절약은 나와 이웃을 살리는 에티켓
김창완 가수·방송인
입력 : 2008.02.20 22:56 / 수정 : 2008.02.20 22:57
김창완 가수·방송인
얘야 연탄불 좀 갈아라. 구멍은 세 개만 맞춰." 열아홉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19공탄. 그 열아홉 개의 구멍 중에 세 개만 위아래가 맞게 밑불 위에 새 연탄을 올려놓으라는 게 어머니의 주문이었다. 겨울이면 늘 그러셨다.
위아래 연탄구멍이 잘 맞춰져 있으면 탄불이 빨리 타서 새벽녘에는 불이 꺼져 버렸다. 그렇게 되면 아침부터 이웃집에 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 연탄불이 없으면 방이 냉골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불은 늘 귀했다. 불 마개를 여닫는 것은 아낙의 고유 권한이었다. '뽑기'를 해먹는다고 번잡을 떨다 마개를 안 닫아서 연탄이 많이 타버리면 시커멓게 된 국자보다 탄불이 아까워서도 등짝을 한 대 더 맞아야 했다. 불을 늘 꺼질 듯 말 듯 하게 해놓았으니 머리맡 물 대접의 물은 얼어붙기 일쑤였고 아주 추운 날은 요강이 얼어 터지기도 했다. 집이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옷도 무명옷이 대부분이어서 보온성이 형편없었다. 겨울 솜이불은 두껍기만 했지 어깨 쪽이 들떠서 누가 풀썩거리기라도 하면 찬 공기가 구렁이처럼 기어들었다. 방안 공기가 차니까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서울의 전깃불 100개 중 40개가 원자력 발전으로 켜지는 지금, 연탄 때던 시절을 아련히 떠올리는 것은 아직 손가락, 발가락을 노끈으로 동여매는 듯한 추운 날의 통증이 기억 어디엔가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2008년 고속도로. 버펄로 떼처럼 차들이 지축을 흔들며 지나간다. 연탄 한 장으로 승용차가 한 2㎞ 남짓 달릴 수 있다. 하루 40㎞를 운행하는 사람이면 연탄 스무 장을 태워 버린 거다. 하루에 연탄 석 장. 연탄 200장이면 한 가족이 겨울을 났다. 이제는 서울서 부산 한 번 가는데 그만큼의 에너지를 쓴다. 물 대접이 얼어붙던 윗목이 없어진 아파트에선 한겨울에도 다 벗고 산다. 뜨거운 물이 언제나 쏟아진다. 마치 아파트 바로 밑에 용암이라도 있는 듯이. 공항에는 움직이는 길이 깔려 있고, 건물마다 승강기와 에스컬레이터가 지천이다. 도시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은 해가 떠야 지고, 대낮에도 휘황찬란한 빛을 쏟아내는 전광판은 네온사인을 금지했던 시절을 비웃고 있다.
풍요롭다. 화려하고 찬란하다. 하지만 세계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인구는 약 65억명 가운데 약 75%뿐이다. 나머지 25%인 약 16억명은 전혀 전기를 사용할 수가 없다. 집 근처에 나무가 전부 없어졌기 때문에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카르사카에 있는 마을의 여성들은 한 주에 수차례 땔감을 찾으러 4시간을 계속 걸어야만 한다. 선진국의 일상생활이 난민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사는 것은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이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오늘 거리에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죽을 거라고.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누구에게라도 친절하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있다"고 '종교의 종말'의 저자 샘 해리스는 말했다.
무절제한 에너지 낭비로 이웃을 피폐하게 하고 결국 생명의 요람인 지구를 병들게 한다면 우리 스스로 난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지는 동물과 식물의 도감이 해가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다. 매해 국제적인 규모의 환경회의가 열리고 매스컴이 총동원되어 지구 온난화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환경파괴 위협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버튼에 손을 대고 있는 까다로운 문제다. 엘리자베스 2세가 마차에서 내릴 때 그녀의 발 아래 있는 진창물 위에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깔았다는 월터 롤리(16세기 영국의 정치가)의 갤런트리(gallantry·여성에 대한 공대)가 기사도 정신의 발로였다면 한 등 끄기는 에티오피아의 고단한 아낙의 하루를 위로하는 당신의 아름다운 헌신일 수 있다. 에너지 절약은 이웃의 고통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수단이다. 나아가 이웃과 나를 살리는 도덕적인 행위이다. 21세기의 에티켓은 에너지 절약이다.
2008년 고속도로. 버펄로 떼처럼 차들이 지축을 흔들며 지나간다. 연탄 한 장으로 승용차가 한 2㎞ 남짓 달릴 수 있다. 하루 40㎞를 운행하는 사람이면 연탄 스무 장을 태워 버린 거다. 하루에 연탄 석 장. 연탄 200장이면 한 가족이 겨울을 났다. 이제는 서울서 부산 한 번 가는데 그만큼의 에너지를 쓴다. 물 대접이 얼어붙던 윗목이 없어진 아파트에선 한겨울에도 다 벗고 산다. 뜨거운 물이 언제나 쏟아진다. 마치 아파트 바로 밑에 용암이라도 있는 듯이. 공항에는 움직이는 길이 깔려 있고, 건물마다 승강기와 에스컬레이터가 지천이다. 도시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은 해가 떠야 지고, 대낮에도 휘황찬란한 빛을 쏟아내는 전광판은 네온사인을 금지했던 시절을 비웃고 있다.
풍요롭다. 화려하고 찬란하다. 하지만 세계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인구는 약 65억명 가운데 약 75%뿐이다. 나머지 25%인 약 16억명은 전혀 전기를 사용할 수가 없다. 집 근처에 나무가 전부 없어졌기 때문에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카르사카에 있는 마을의 여성들은 한 주에 수차례 땔감을 찾으러 4시간을 계속 걸어야만 한다. 선진국의 일상생활이 난민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사는 것은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당신이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오늘 거리에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죽을 거라고.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누구에게라도 친절하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묶여있다"고 '종교의 종말'의 저자 샘 해리스는 말했다.
무절제한 에너지 낭비로 이웃을 피폐하게 하고 결국 생명의 요람인 지구를 병들게 한다면 우리 스스로 난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지는 동물과 식물의 도감이 해가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다. 매해 국제적인 규모의 환경회의가 열리고 매스컴이 총동원되어 지구 온난화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환경파괴 위협은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버튼에 손을 대고 있는 까다로운 문제다. 엘리자베스 2세가 마차에서 내릴 때 그녀의 발 아래 있는 진창물 위에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깔았다는 월터 롤리(16세기 영국의 정치가)의 갤런트리(gallantry·여성에 대한 공대)가 기사도 정신의 발로였다면 한 등 끄기는 에티오피아의 고단한 아낙의 하루를 위로하는 당신의 아름다운 헌신일 수 있다. 에너지 절약은 이웃의 고통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수단이다. 나아가 이웃과 나를 살리는 도덕적인 행위이다. 21세기의 에티켓은 에너지 절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