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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쇼와 한국가요>
1) 미8군쇼의 등장 배경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였다.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치룬 후 남한에
주둔하여 1948년 8월 이승만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북한은 소련군이 진군하여 김일성 주재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그리하여 해방은 됐으나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군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은 대한민국 건국 후 일시 귀국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유엔군 일환으로 참전하여 한국에 주둔하게 된다.
그리하여 5-6만을 헤아리는 대규모의 미군들이 한국 땅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대규모 미군의 주둔은 한국 정치, 사회 변화는 물론 문화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대중가요 역시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 두드러진 것이 미군방송인 AFKN과 미8군 쇼무대였다.
AFKN은 정규 채널 2번으로 전국으로 송출됐다. 당시 KBS는 9번, TBC는 7번, MBC는 11번이었다. 몇 안 되는 한국방송 채널과 함께 1994년 반환될 때까지 장기간 방송됐던 것이다.
미군방송에서 흘러 나오는 팝송과 경음악이 젊은 청소년들이나 연예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군방송은 미국 현지에서 유행하는 최신 노래들을 한국에 전파하여 한국의 팝마니아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미군들은 미8군을 중심으로 용산기지는 물론 휴전선 주변, 후방 지원기지 등 전국 곳곳에 배치되어 한국 국방의 책임을 맡게 된다.
현역 군인 외에 그를 지원하는 민간인들,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규모의 미국인들이 한국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전국에 개설된 미군클럽이 260여 개나 됐던 것을 보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이역 만리 타국 땅에서 군 복무를 수행하는 군인들을 위해서 당연히 그들을 위한 흥행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8군쇼였다. 8군쇼는 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가 조직한 쇼단을 기초로 195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된 공연무대다.
용산 미군기지는 물론 전국 기지촌에 있는 각종 부대에서 공연을 가졌다. 8군 무대에 참여한 쇼단이 무려 50여 개였고 거기에 종사한 사람들이 연예인을 포함하여 수천 명이 넘었다.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고 미군들만을 상대로 한 쇼였지만 규모로 볼 때 대단히 큰 공연무대였던 것이다.
8군쇼는 1960년대 중반기까지 전성기를 보낸다. 하지만 1964년 월남전이 발발하면서 미군이 대규모로 월남으로 이전되며 쇠퇴기를 맞는다.
주한미군 감축은 어쩔 수 없이 8군쇼의 쇠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극장쇼나, ‘쇼쇼쇼’ 같은 티브 무대가 활성화 된 것도 8군쇼 위축에 영향을 끼쳤다.
2) 미8군쇼의 특징
8군쇼는 단순히 음악 공연만 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노래, 무용, 코미디, 촌극, 마술까지 동원된 일종의 버라이어티쇼(variety show)였다.
음악, 무용, 연극이 총체를 이루는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아우르는 쇼단 구성이 필수적이다.
악단은 물론, 가수, 무용수, mc, 코미디언, 마술사 등이 참여하는 대형쇼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헐리우드 쇼(이봉조)’, ‘베니 쇼(베니김, 김영순)’, ‘A1 쇼(김희갑)’, ‘서머타임 쇼(최상룡)’, ‘블랙아이스 쇼(박성원)’ 등이었다.
그 외에도 50여 개의 쇼단이 속출하였다. 그야말로 한국 가요사에 없던 쇼단 흥행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이전에 존립했던 각종 악극단이 쇠퇴하고, 8군쇼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버라이어티 쇼단이 등장한 것이다.
미8군 쇼단이 쇠퇴하는 1970년대 초반까지 흥행무대는 일반무대와 미8군 무대로 양분되어 경쟁을 거듭했다.
8군무대, 8군쇼단은 주한미군을 상대로 하는 특수 공연단이다. 하지만 공연수입이 월등했고, 최신의 서양음악을 공연한다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 의식이 작용하여 대부분의 가수, 연예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새로 등장한 신인들의 데뷔무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8군쇼에서 성공하면 기성가수의 영예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8군쇼는 신인가수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미군 영내에서 이루어지며 민간인이 참여할 수 없는 특수무대임에도 불구하고 8군쇼가 주목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8군쇼 무대에 서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실력이 필요하다. 8군쇼 운영단에서 3-6개월 간격으로 실시하는 오디션에 통과해야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가창능력은 물론 미국의 최신 유행곡을 원곡에 가깝게 부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영어 구사능력도 뛰어나야 했다.
비록 노래이긴 하지만 원음에 가깝게 부르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다가 미국식의 댄스율동, 퍼머먼스(performance), 무대매너도 필요했다. 한국식으로 점잖게 불러서는 인기가 없었다.
이러한 입사식(入社式)을 통과하기 위해서 연예인 송출회사가 따로 있었다.
송출회사는 연예인 선발부터 훈련까지 도맡아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화양’, ‘유니버셜’, ‘삼진’ 같은 것이 대표적인 연예인력 회사다.
3) 신인가수 양성소로서의 8군 무대
이렇게 해서 등장한 가수들이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쟈니리, 유주용, 김상국, 서수남, 신중현, 조영남, 윤항기, 이춘희, 이금희,
김계자, 윤복희, 정미화, 임희숙, 현미, 패티김 등이다.
이름부터 ‘패티, 위키, 쟈니’ 식으로 서양식 예명을 쓰고 있다. 이런 서양식 이름은 미군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밖에 ‘김시스터즈, 김치캣츠, 김보이즈, 퍼가이스’ 등 보칼그룹들도 8군 무대에서 활약했다. 이들 면면을 보면 1960년대 뿐 아니라 그 후 한국 가요를 이끌어간 핵심인물들이 총망라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자, 김상희 같은 토종 가수 몇 명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8군 무대에서 기량을 쌓았던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8군 무대는 한국의 대중가요를 이끌 동량(棟梁)을 배출하는 가수 양성소였던 것이다.
가수 뿐 아니라 이봉조, 김인배 등 유명 연주자나 작곡가들도 8군 무대에서 기량을 뽐냈다. 이렇게 보면 8군 무대는 1960년대 한국가요의 산실이자 도량이었다.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주요 인물을 살펴 보자.
<노란 셔츠의 사나이>(1961)로 1960년대 가요계의 문을 활짝 연 한명숙은 1950년대부터 ‘현시스터즈’ 멤버로 미8군 연예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최초의 여성 허스키 보이스로 평가받는 그녀의 창법은 8군 무대에서 기량을 닦은 결과였다.
그녀는 1960년대 명작곡가 손석우와 손잡고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검은 스타킹> 등을 발표하여 60년대 대표가수의
입지를 닦았다.
김시스터즈는 해방 후 최초의 여성그룹으로 평가받는다. 해방 전에 한국 최초의 걸그룹(girl group)이던 ‘저고리 시스터즈’를
계승하여 여성그룹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는다.
해방 후 김해송이 결성한 ‘K.P.K 악단’에서 활동하던 애자, 숙자, 민자 등 3명의 여성이 독립해서 결성한 걸그룹이 ‘김시스터즈’다.
애자, 숙자는 김해송, 이난영 부부의 딸이고, 민자는 이난영 오빠의 딸이니 결국 김시스터즈는 김해송, 이난영 2세들의 보컬
그룹인 셈이다. 이난영이 ‘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였으니 모녀가 대를 이어 한국 걸그룹의 역사를 쓴 셈이다.
이들은 8군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후 그 명성으로 1959년 미국 라스베가스까지 진출하여 K팝 한류의 원조가 된다.
10여 가지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뿐 아니라, 완벽한 조화를 이룬 하모니, 역동적인 율동과 무대매너가 미국인들을 단숨에
사로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창법과 무대매너는 이미 8군 무대를 통하여 미국식으로 훈련을 받은 덕분이었다. 따라서 김시스터즈의 라스베가스
진출은 8군 무대의 경험과 경력이 든든한 동력이 되어 준 것이다. 따라서 김시스터즈는 8군 무대가 낳은 걸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흑인풍의 끈끈한 목소리로 <밤안개>(1962)를 불러 스타덤에 오른 현미도 8군 무대에서 기량을 키운 8군 출신 가수다.
그녀의 특기인 소울(soul)풍의 블루스 리듬은 8군 무대에 적응하기 위해 개발한 창법이었다.
당시 미8군에는 상당수의 흑인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어필하는 보이스(voice)와 리듬이 필요했던 것이다. 벤 베니(Ben Bernie)
의 번안곡인 <밤안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히트곡이다.
그녀는 작곡자이자 8군 무대 섹소폰 주자였던 이봉조와 컴비를 이루어 <보고 싶은 얼굴>(1964), <떠날 때는 말없이>(1964),
<애인>(1966) 등으로 1960년대 대표가수로 입지를 굳힌다. 결국 두 사람은 이러한 인연으로 결혼에 성공한다.
8군쇼가 배출한 걸출한 디바(diva) 가수는 단연 패티김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음악 재능이 뛰어나 국악원에서 남도창을
익혀서 국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줬다. 클래식 성악도 공부하여 동서양 음악의 기초를 단단히 쌓았다.
그 역량으로 8군 무대에 올라 60년대 대표적인 디바 가수로 우뚝 서게 된다.
본명이 김혜자였던 그녀가 ‘패티김’이라는 예명을 얻은 것도 8군무대에서였다.
그가 당시 인기 정상에 있던 미국 가수 패티 페이지(Patti Page) 노래를 즐겨 불렀던 것에 주목한 8군 무대 트럼펫 주자
김영순이 ‘패티김’이라는 예명을 불러 준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한국의 패티 페이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한국의 패티 페이지가 아니었다.
8군 무대에서 실력을 쌓은 후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하여 미국 전역에 패티김 명성을 날리며 국제적 디바 가수로
떠오르게 된다.
<초우>(1966), <무정한 밤배>(1967) 등으로 인기를 올린 그녀는 마침내 1966년 TBC TV 고정프로 ‘패티김쇼’ 무대에 서면서 최고의 가수로 떠오른다.
여기서 만난 작곡가 길옥윤과 손잡고 <별들에게 물어 봐>, <사랑하는 마리아>, <9월의 노래>, <서울의 찬가> <그대 없이는 못살아> 등등의 명곡을 빚어낸다.
이처럼 한국 최고의 디바가수 패티김의 등장에는 8군 무대가 든든한 뒷받침이 됐던 것이다.
두 사람도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1960년대 히트작 <하숙생>(1966)을 남긴 최희준 역시 미8군 출신 가수다.
1959년 8군쇼에 팝송 싱어로 등장했는데 특히 흑인 가수 냇킹콜(Nat King Cole)의 목소리를 닮은 가수로 주목받았다.
냇킹콜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으나 후에는 따뜻하고 편안한 목소리의 발라드 가수로 인기를 모았다. 그의 히트곡
<모나리자>가 대표적이다. 최희준은 허스키하며 부드러운 창법으로 한국의 냇킹콜을 꿈꿨던 것이다.
그러한 가풍(歌風)은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내 사랑 쥬리안>, <진고개 신사>, <빛과 그림자> 등에서 빛을 발했다.
이러한 명곡들은 최희준이 8군 무대에서 냇킹콜을 꿈꾸며 일궈 온 리듬인 것이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불나비>를 불러 주목을 받은 김상국도 루이 암스트롱 보이스(voice)를 모방한 대가(大家)였다.
루이 암스트롱은 째즈의 신이었고, 트럼펫 연주의 왕이었다. 김상국은 8군 무대를 통하여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을 꿈꿨던 것이다.
<키다리 미스터 김>으로 알려진 이금희 역시 김광수 악단에서 기량을 닦은 후 8군 무대에서 빛을 본 가수다.
특히 그녀는 현란한 율동과 무대매너로 ‘미쓰 다이나 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어 8군 무대를 평정하였던 것이다.
유주용은 째즈 전문가수로 8군 무대에서 명성을 날렸고, 특히 독일계의 모친 덕으로 이국적이고 수려한 이미지로 뭇 여성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대표곡 <부모>는 수려한 인물답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중을 사로 잡았다.
위키리는 가수 능력도 뛰어 났지만 MC, 방송 진행자로 인기를 모았다. 1960년 8군쇼 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쇼단’에 입단하여
8군 무대에 올랐고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위키리라는 예명도 8군 무대에
오르면서 얻은 이름이다.
후에 TBC 쇼쇼쇼의 MC, KBS 전국 노래자랑의 초대 MC 등 사회자로서 역량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