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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출신 문인탐방>
<근대 시조의 개척자, 조의현>
조의현(1907-1985)은 1926년 <동아일보>에 <만류>라는 시조작품으로 데뷔하여 한국 근대시조의 기반을 쌓은 선구적 시인이다.
그는 근대시조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조운, 조남령과 더불어 영광이 낳은 3대 시조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회고적 에스프리를 형상화함으로써 민족주의 시조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1907년 전남 영광읍에서 태어난 그는 1930년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릿교대 영문학과(1935)를 졸업했다. 다시 1939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힘든 식민지 시절에 일본에서 두 개의 대학과 전공을 수료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 만큼 그의 학구열은 높았던 것이다. 도시샤 대학은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시의 대가인 정지용, 윤동주가 다닌 학교다. 지금 교정에 그들의 시비가 있다.
조의현의 문학혼은 일찌감치 중앙고보 재학시절에 싹터 1926년 동아일보에 <만류>를 발표하며 꽃핀다. 이 작품에 대하여 문단의 대부인 이광수가 ‘시조의 기체(본질)’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
이어서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하여 학생시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모두 중앙고보 재학시 작품들이었다. 문학의 성지(聖地)인 중앙고보를 널리 세상에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다양한 저널리즘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주로 <동아일보>가 핵심이어서 18편의 작품을 싣었다.
이로 볼 때 조의현은 <동아일보>가 낳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조의현은 당대 문학저널리즘의 중추였던 <동아일보>를 통하여 당당히 문단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흐름은 민족의식이다. 어린 시절 체험한 3.1운동은 그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여 다양한 작품을 통하여 표출된다.
중앙고보시 <동아일보>에 발표한 <영예의 죽음>을 보면 그의 시의식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사회, 인류, 민족을 위한 죽음이 뜻있는 ‘영예의 죽음’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이 그대로 작품에 투사되어 나타난다.
<영춘구가(迎春驅歌)>(조선일보)는 민족의 독립을 염원한 수작이다. 해방 후 발표한 <비원비수(祕苑悲愁)>는 분단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으며, <옥당과 그대들과 자유와>는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처럼 그는 투철한 역사의식, 현실인식을 작품으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해방 후 영광여중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자로서의 면모도 보여 주었다. 살아 생전 왕성한 작품 활동에 비해 작품집을 상재하지 못하여 아쉬움을 남겼으나 1997년 영광향토문화연구회에서 유고작품집 『창』을 상재하여 문단의 관심과 학계의 재조명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