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중앙고보) 교우, 살인적 고문 견디고 '6·10만세'를 지켜냈다 > 교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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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334회 작성일 2021-01-05 10:00
권오설(중앙고보) 교우, 살인적 고문 견디고 '6·10만세'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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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1897~1930)



1925년 4월, 비밀리에 창당대회를 치른 조선공산당(아래 조공)은 그해 일어난 대홍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수해 이재민 돕기 등 전국적인 운동에 결합했다. 전국을 돌면서 강연 등 농민·노동자에 대한 선전사업을 이어갔고, 각 직업별 노동조합의 창설에 힘을 기울이는 등 합법 공간을 활용했다.


그러나 11월 신의주에서 우연히 빚어진 활동가들과 일경 형사들과의 충돌은 조직에 치명상을 가했다. 조직 일부가 드러나게 된, 이른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박헌영의 공산청년회가 뿌리째 뽑혀 나갔고, 조직의 주요 활동가가 대거 검거되었다. 강달영(1887~1942)을 책임 비서로 한 조직 개편을 단행한 뒤, 망명을 꾀하려던 김재봉도 체포되면서 조공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박헌영에 이어 2대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책임 비서가 된 권오설은 인산일에 당이 대규모 시위를 주도해 침체한 독립운동의 열기를 되살리자고 제안했다. 당에 그만한 여력이 없다는 현실을 살핀 강달영은 이에 부정적이었지만, 권오설은 실무를 책임질 단위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천도교 청년 조직을 내세우며 이 계획을 밀고 나갔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권오설이 입당시킨 이들이 주요 간부였고, 천도교 쪽에도 사회주의 경향의 활동가들이 적지 않아서 거사를 같이하는 데 걸림돌이 없었다. 권오설은 노동절 시위 대신 인산일 항쟁으로 3·1운동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어쨌든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한 상황이어서 마땅히 거부할 명분이 없었으므로 시위는 공청이 책임지고 당은 지원하기로 하였다. 


권오설 고문을 이기고 '항쟁'을 지켜냈다


6·10항쟁을 준비하는 '투쟁특별위원회' 지도부는 권오설과 공청 중앙집행위원 박민영(2006 애족장), 이지택(1990 애족장)으로 구성됐다. 인산일 시위에 얼마나 많은 민중이 참가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만 장의 격문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권오설은 이 문제를 인쇄노동자 출신의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 박내원(2005 애족장)과 민창식(2007 애족장)을 통해 해결했다. 


민창식의 집에서 소형 인쇄기로 찍어낸 격문 5만여 장은 천도교 월간지를 발행하는 개벽사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권오설은 항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고자 잡지 <개벽>과 <신여성>을 이용해 전단을 배포할 생각이었지만, 계획은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격문 한 장이 중국 지폐 위조범을 쫓던 일경의 손에 들어가면서 개벽사는 급습당했고, 체포된 박내원은 거듭된 고문 끝에 권오설의 이름을 토해내고 말았다. 6월 7일, 권오설이 체포되면서 그가 그렸던 항쟁은 물거품이 되었다. 6월 10일까지 사흘, 그 죽음의 시간에 권오설은 살인적인 고문을 이겨냈다. 


남은 것은 그가 조직해 놓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아래 연구회)의 몫이었다. 별도의 격문을 준비하지 않았던 연구회에서는 단출하게 "이천만 동포의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다. 대한독립 만세"라는 문안의 격문을 밤새워 인쇄했다. 인쇄가 사직동의 회원 집에서 진행되어 뒷날 이들은 '사직동계'라고 불리게 된다.


연구회 말고도 순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인산일에 항쟁을 벌이자는 독자적인 흐름이 있었으니 중앙고보의 이동환(1990 애족장), 중동고보 김재문(1990 애족장) 등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통인동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거사를 모의하여 흔히들 '통동(通洞)계'로 불린다. 


국장 당일, 일제는 경찰뿐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 5천여 명의 병력이 사대문을 포위한 가운데 국장 행렬이 수은동 단성사의 파자교에 다다랐을 때였다. 돌다리 앞으로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가 뛰어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유면희 등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면서 행렬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공이 아닌 사직동계와 통동계가 수행함으로써 좌초할 뻔한 6·10 만세가 되살아난 것이다.


만세 시위는 당일에만 8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후 인천·개성·강경·홍성·공주·당진·전주·고창·구례·순창·병영·통영·마산·하동·원산·이원·평양·신천 등지에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이 투쟁으로 전국에서 약 5천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고, 7·8월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관련자 약 백여 명이 붙잡히는 등 검거 선풍이 이어졌다. 


시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선호(1991 애국장)는 안동 예안 출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상무를 맡은 핵심 간부였다. 유면희(1990 애족장) 역시 예안 출신으로 연구회 집행위원이었다. 연희전문 학생으로 공청 회원인 권오상(권오돈, 2005 애족장)과 중앙고보 학생 권오운은 권오설의 집안 아우였다.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권오상(1900~1928, 2005 애족장)과 체포되었다 풀려난 권오운(1904~1927)은 풀려석방 후 각각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했다. 


고문으로 순국한 권오설 '철관'으로 돌아오다


권오설은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안동 권씨가 세거해 온 가일(佳日)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일마을은 권오설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가 여럿이 태어나 당시 '모스크바 동네'라 불린 곳이다. 해방 후 북한의 중국 대사를 지낸 권오직(1906~?)은 권오설의 친동생, 조공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책임 비서 안기성(1898~?)도 가일 출신이다. 게다가 인근 풍산의 오미마을(오미리)에 김재봉(제1차 조공 책임 비서), 우롱골(상리)에 조공 중앙집행위원 이준태(1892∼?)가 있었으니 '모스크바'라는 이름이 지나치지 않다. 


고향을 떠나 대구고보와 중앙고보 등 여러 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가난 탓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권오설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스물둘이 된 1919년 가을이었다. 힘들게 배움을 이어온 청년은 놀라운 열의로 마을에 학술강습소를 세웠고, 문중의 노동서사(魯洞書社)에서 교육·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그는 발걸음은 교육운동뿐 아니라, 가곡 농민조합, 일직면 금주회, 안동청년회, 조선 노동공제회 안동지회(1920), 풍산 청년회(1922) 등에 참여하거나 그 조직·결성을 주도하는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의 활동은 풍산 소작인회 결성과 함께 소작 운동으로 진화하면서 새롭게 도약했다. 


당시 안동지방에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담보로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악랄한 방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일이 많았다. 빼앗긴 농토는 농민들의 소작지가 되었고 7할에 가까운 소작료 착취로 이어졌다. 


권오설은 1923년, 이준태·김남수 등과 함께 풍산소작인회를 조직, '지세의 지주 부담, 소작료 인하, 소작권 5년 이상 보장, 부역과 마름의 중간 수탈 반대, 소작료 운반 비용의 지주 부담'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풍산소작인회는 중소 지주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한 5천여 명 규모의 전국 농민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4년, 풍산소작인회가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들의 요구는 집단적 소작쟁의로 발전했다. 지주들은 일본인들의 협조 아래 소작인회 간부를 고발하고, 소작권을 박탈하는 등의 방식으로 소작인회를 탄압하였다. 


그해, 풍산소작인회의 대표로 조선노농총동맹의 창립대회에 참가한 권오설은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자신의 활동반경을 전국 단위로 넓히게 된다.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교양강좌를 담당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될 때, 권오설은 책임 비서 김재봉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노농총동맹 대표로 공청의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어 코민테른이 모스크바에 설립한 공산주의 운동가 교육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권오설은 20개월 넘게 미결수로 재판을 받다 1928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일경 조사 중 모진 고문을 받은 고문 경찰을 고소하여 법정투쟁을 벌이기도 한 그는 출옥을 백여 일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그 주검을 거둔 부친은 "고문한 흔적은 푸릇푸릇한 검은 점을 이루었으니 이 모두가 독을 쓴 자국이었다"라고 했으니 그는 고문으로 순국한 것이었다. 그날은 꼭 5년 전 조선공산당이 조직된 날이기도 했다.


4월 20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유해는 고향으로 옮겨졌다. 얄팍한 나무로 만든 관이 두꺼운 함석으로 만든 곽에 담겨 운구되었지만, 그의 유해는 봉분도 없이 함석 곽 그대로 마을 옆 공동묘지에 묻혔다. 


오랫동안 권오설은 고향 마을에서 '마을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2001년에 마을 앞 저수지 옆에 '항일 구국 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紀蹟碑)'가 세워졌지만, 그걸 두고 말이 많았다. 2005년 마침내 서훈까지 내려졌지만, 그러한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권오설과 함께 활동한 제3차 조선공산당(책임 비서 안광천)의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2005 애족장)의 아들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비문이 통곡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이 부끄러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여기 돌을 세워 선생의 이름을 새김은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조국의 자유를 추구한 그 의기가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며 민중 민족을 위하여 물불도 가리지 않았던 그 사상과 정신이 진실로 사무치게 그리운 까닭인 따름이다."


시대가 시대이기도 했지만, 잠행으로 이어간 활동 때문에 권오설은 남긴 사진이 거의 없다. 지금 남은 그의 모습은 스스로 '서대문 우리'라 부른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일까. 벽을 등진 그의 오른쪽 눈자위 부분이 훼손되어 일그러졌고, 가장자리도 하얗게 바랬다. 


순국한 지 75년 만에 그는 비로소 낡은 기록 속 역사에서 복권되었다. 그러나 분단으로 지워지거나 잊힌 역사의 갈피 한쪽에 쓸쓸하게 선 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다. 잊힌 시대와 삶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지 모른다. 

**자세한 기사는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06228&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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