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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출신 문인탐방>
<‘정계야화’의 방송작가 대부, 김기팔>
김기팔(1937-1991)은 ‘연속극 제조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 방송작가의 선도자였다.
<정계야화>, <제1 공화국>, <해바라기 가족>, <공부 갑부 김갑순> 등 이름만 들어도 김기팔의 이름은 쉽게 떠 오른다.
1960-70년대 TV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를 휩쓴 주인공이 바로 김기팔인 것이다. 그를 빼놓고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만큼 그는 한국 드라마의 지평을 열고 새 역사를 써 간 드라마의 대부요, 산파였던 것이다.
평남 평강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고를 졸업하고(49회) 서울대 철학과로 진학한다. 본명은 김용남이다.
지병으로 54세로 요절했다.
철학과 2학년 재학 중 한국일보와 국립극장이 공모한 현상모집에 <중성도시>(1959)가 당선되어 극작가로 데뷔한다.
다음 해에 KBS 연속극 100만원 현상모집에 <해바라기 가족>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해바라기 가족>은 축첩에 따른 가정파탄을 그려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가 방송작가로서 문명(文名)을 떨치게 된 것은 DBS(동아방송)의 <정계야화> 부터다.
6.25 전쟁 후 정쟁(政爭) 시대로 접어든 정치현장을 리얼한 시각으로 파헤쳤던 것이다.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던 김창룡 암살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등 민감한 문제를 생생하게 증언한 드라마였다.
1970.10-1973.1월까지 818회로 2년 넘게 방송된 화제의 드라마였다.
삼엄한 군부시절에 민감한 정치현실을 다룬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2번이나 방송심위에 걸려 중단되기도 했다.
그 만큼 민감한 문제였으나 역사를 증언하고 복구한다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버텨냈던 것이다.
1970년대를 산 사람 치고 <정계야화>를 안 들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의 드라마의 특징은 풍부한 자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사실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거의 실화에 가까운 다큐멘터리였던 것이다.
드라마로되 가급적 허구성을 배제하고 사실성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구(再構)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리얼리즘 다큐작가로 평가할 수 있다. 드라마 작가이자, 역사가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중들의 관심에 보답하려고 <제1 공화국>(1981), <제2 공화국>(1989) 등을 MBC TV 연속극으로 내 놓는다.
라디오 방송에서 TV 드라마로 영역을 넓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기팔은 정치 드라마의 선구자요, 선각자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나아가 경제 드라마 <거부실록>, <공주 갑부 김갑순>, <야망의 25시>, <욕망의 눈>을 발표한다.
가족 사회 드라마로는 <억새풀>, <아버지와 아들>, 역사 드라마 <개화백경>(KBS)도 있다.
해외로까지 관심을 돌려 멕시코 이민의 애환을 그린 <유카탄 아리랑>(DBS, 1969)도 발표했다.
명실공히 전천후 방송작가가 된 셈이다.
<정계야화>는 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방송대상’(1981), ‘한국연극영화 예술상’(1983), ‘한국방송공로대상’(1992), ‘백상예술대상’(1992)을 수상하였고, ‘방송인 명예인 전당’에 헌정되었다.
이러한 김기팔의 방송작가로서의 능력은 이미 중앙고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문예반장으로 다양한 작품을 쓰던 그는 <계우>, <계원순보> 편집장을 맡으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를과시했다.
특히 <계우> 33호는 내용이 기성 전문 잡지를 능가할 정도로 우수한 글로 가득 차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였다.
‘한국 사학의 제문제’, ‘농촌운동소고’등 사회성 짙은 문제들을 다룬 것이다.
연속극 제조기, 정치다큐의 대부로서의 면모는 이미 계산동산에서 발아(發芽)되고 있었던 것이다.
ㅡ60회, 김영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