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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취(雅趣)는 ‘고아한 정취, 취미’라는 뜻이다. 100세까지 살아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세가지 꼽으라면 건강과 친구, 그리고 취미다. 사람은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다. 딴 짓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구나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 시대라면. 평생 즐길 수 있는 한가지 취미는 삶의 훌륭한 동반자다. 현재의 나이와 상관없이 평생 가져갈 ‘백년의 취미’를 키워가고 있는 사람들을 취재한다. 》
‘지즐대는 파도 소리 파도로써 돌리운/먼 또는 가까운/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중략)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박두진의 ‘시인 공화국’)
신세계문학회 대표이자 문학 계간지 ‘운율마실’을 펴내고 있는 임인호 씨(51)는 재정전문컨설팅 회사인 아이앰플래닝 대표다. 월급쟁이 시절이나 자기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꾸준히 시(詩)를 써온 그는 “박두진 시인의 ‘시인 공화국’이 우리 문학회가 꿈꾸는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박두진의 ‘시인 공화국’에는 목수도, 운전사도, 주부도 모두가 시인이다. ‘크다란 걸 마음하여 적은 것에 주저하고/이글이글/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소처럼 잠잠한’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미(美)를 잡은 사제면서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인 시인들이 사는 공화국이다.
임 대표는 “문학이 더이상 특수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진솔한 삶을 담아내야 한다”며 ‘운율마실’ 창간의 변을 밝혔다. 더 이상 어려운 암호해독과 같은 난해한 시가 아니라 ‘일상성’과 ‘생활 속의 문학, 문학의 생활화’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신세계문학회에는 기성 문단에서 활동하는 시인도 있지만 주부, 건축가, 논술학원 강사, 택배기사, 중소기업체 CEO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문학을 사랑하는 모임이다. 신세계문학회는 2018년 초 학연과 지연 등 온갖 연줄로 꽉 짜여진 기성 문단과 문학회에 염증을 느낀 3명의 시인들이 모여서 결성했다. 그리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1년 뒤인 2019년 봄에 ‘운율마실’이라는 문학 계간지를 창간했다.
‘운율마실’ 최근호(2020년 12월)에서는 강릉에 사는 시인 박용녀의 시 15편을 특집으로 조명했다. 강릉에서 우리식당을 운영하며 다섯자녀를 키운 박 시인은 운율마실을 통해 등단했다. 그의 시 중 한 편인 ‘쌀을 씻다가’는 막걸리와 같은 쌀뜨물을 보면서 막걸리를 좋아하는 엄마를 생각한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엄마/수화기 너머로/혀 꼬부라진 발음에/반가움보다/앙칼진 말 한마디로/엄마의 가슴을/후벼 팠던 나//막걸리 때문이 아니었는데/엄마의 입 속엔/세 살짜리 아이가 있었는데//세월이 나를 철들게 해도/다시 오지 않는/시간들/엄마의 술빵이고 싶다.’
“박용녀 시인은 학력도 변변찮고 맞춤법이 틀릴 때도 있다. 물론 신춘문예와 같은 기성문단에서 심사한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누구보다 시인이다. 식당을 운영하면서도 매일 열정적으로 시를 쓰고, 시를 사랑한다. 누가 이 사람을 시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글만 잘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가 통과했던 삶의 영역, 굴곡, 일상 속에서 증명된 시가 우리가 추구하는 정체성이다.”
―‘운율마실’이란 뜻은 무엇인가.
“역사소설 ‘금강’(총 10권)의 저자인 김홍정 작가가 만들어 준 제호다. 운율은 말 그대로 음과 리듬이 있다는 뜻이고, 마실은 ‘이웃에 놀러 나간다’는 뜻이다. 부담없이 마실을 다니는 것처럼 편안하게 서로 운율을 나눈다는 뜻이다. 문학을 어떤 사조나 학문으로 할 생각은 없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는 것이다. 읽어주는 사람이 우리끼리라도, 자화자찬하는 격이라도. 우리 삶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면, 진솔하게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
―기성의 문학 출판사들도 어려운 형편에 새롭게 문학잡지를 창간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일텐데.
“김홍정 작가도 ‘희안하다. 쉬운게 아닌데’라고 하셨다. 당분간은 저를 비롯해 운영위원들이 십시일반으로 펑크나는 예산을 충당하면서 발행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문학회 정회원을 늘려가는 대중화를 통해 해결할 생각이다. 지금 신세계문학의 전체회원이 427명이고, 이 중 회비(연 10만원)를 내는 정회원은 42명이다. 만약 정회원 100명이 돼서 최소 일인당 5권의 책을 서로 구입하는 구조가 된다면 500권은 소모가 되고, 정회원이 1000명이 되면 1권씩만 사도 1000권이 된다. 이는 시집 출판시 1쇄에서 2쇄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마련해 준다. 다양한 후원회원 덕분에 필력은 있지만 책을 못내던 작가들의 출판비용의 부담을 덜 수 있고, 마음 놓고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운율마실’은 지난 2년간 기아자동차 후원으로 ‘청소년 문학상’을 시상했다. 앞으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운율마실 문학상’도 신설할 계획이다.
“문학도들에게는 원고료든, 상금이든 돈을 지불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게 내 평소 지론이다. 문학잡지에 글이 실리면 원고료를 준다니까 처음엔 다들 놀라는 모습이었다. 기성작가들이나 원고료를 받지, 대부분의 문학잡지들이 신인이나 아마추어들에겐 원고료를 안주는 게 관행이다. 신인들은 ‘실어만 줘도 영광입니다’하는 분위기다. 운율마실은 아마추어 작가의 시는 2편에 3만원(편당 1만5000원), 기성작가의 시는 2편에 10만원(편당 5만원), 소설은 30만원 정도 원고료를 드린다. 물론 현재는 보잘 것없는 액수이지만, 앞으로 더 늘려나갈 생각이다.”
―시인들도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시인 공화국’이 가능할까.
“우리 문학회에 사무국장을 하고 계신 분이 이상주 시인이다.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현재는 택배기사를 하고 있다. 택배를 하는 와중에도 정말 열정적으로 시를 쓴다. 옆에서 보기에 참 짠하다. ‘당신 같은 사람은 그냥 글만 써야 하는데’하고 말해주고 싶다. 시인으로 등단하더라도 꾸준히 시를 써 자기 시집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고 있다. 이들이 왜 글을 지속적으로 쓰지 못할까? 원고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되니까 결국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끝내게 되는 것이다.
문인들이 가난해야 한다는 등식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작가들이 맘놓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글을 써서도 먹고 살 수 있는 플랫폼을 발전시키고 싶다. 이를 위해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일상에서 시를 쓰는 문학회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문학상을 시상할 때 웹시, 웹소설 분야도 개방할 예정이다. 운율마실이 다양한 작가들의 문운(文運)을 열어주고, 프로모션과 매니지먼트를 해주는 기획사 역할을 담당하고 싶다.”
임 대표는 은행에 다니다 ING생명에서 신화적 인물로 불렸던 스타 재정전문상담사(FC)였다. 2004년에 그가 펴낸 ‘세계 최고의 보험 전문가를 꿈꾼다’(도서출판 삶과 꿈)는 8쇄까지 발행될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 고교시절 문예반이었던 그는 영업으로 바쁜 가운데도 꾸준히 시를 써왔다.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계기는.
“고객관리를 위해 우연하게 문복희 시인(가천대 교수)을 만났는데, FC였던 내게 시집 한 권을 선물하셨다. 나도 시를 쓴다고 하니까, 문 교수님께서 운영하시는 시 창작 교실에 오라고 초청해주셨다. 직장생활로 바쁜 나를 위해 대학로에서 저녁시간에 강좌를 만들어주셨다. 45세의 나이에 문학잡지인 ‘화백문학’과 ‘서정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신입사원들에게 재무설계나 영업에 대한 교육을 할 때, 기업체에서 강연을 할 때 끝날 때 즈음에 ‘제가 사실 문학도였는데 지금도 가슴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쓴 시를 한 편 읽어드리겠습니다’고 말하면 반응이 너무 좋았다. 고객을 만날 때도 책을 한 권 선물하면 느낌이 달랐다. 특히 문학을 좋아하는 고객들은 더욱 감동했다.”
―45세면 늦은 나이는 아닌가.
“45세에 등단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준비한 연금이 개시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45세까지 은퇴 후 삶에 대한 준비를 끝내놓고, 이후부터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것이 내 인생의 플랜이었다. 29세부터 45세까지 약 15년간 연금을 계속 부었다. 내가 재무설계사로서 한창 잘 나갈 때, 영업을 잘해서 내 연봉이 2~3억 대였다. 그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월 1200만원 씩 연금을 부었다. 45세부터는 죽을 때까지 연금이 월 평균 450만원씩 나오도록 준비했다. 지금도 회사는 운영하며 돈을 벌고 있으니, 인생 후반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문학회 일을 맡게 됐다.”
―인공지능(AI)의 시대 21세기에도 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은 것이다. 세상의 변화와는 반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에 대한 회귀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지,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해보는 시간이 온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더욱 그런 욕구들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한다. 요즘에는 목욕을 하면서도, 칼국수를 먹으면서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시상을 재빨리 메모해 둔다. 퇴근 후 저녁에 천천히 살을 붙여가면서 시를 쓴다.”
―현대 시는 너무 어렵지 않은가.
“요즘 문학잡지나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를 읽어보면 그런 것이 사실이다. 마치 암호해독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적 양반사상에 근간을 둔 관습이 문학판에도 만연됐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들만의 암호놀이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배운 사람이 그런 글을 쓰면 시인으로 뽑아준다. 신춘문예도 누가 심사하느냐에 따라서 풍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실 독학해서 맨땅에 헤딩하듯 글을 써서 당선되기란 쉽지 않다. 해체와 상징으로 가득한 난해한 암호가 학계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들의 사조가 되다보니, 두 번 세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가 범람한다. 그들만의 잔치가 벌어진다. 자기들은 암호를 해독하면서 ‘신선하네’하면서 즐거워하지만, 대중성에서는 공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 문학회는 그 방향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시인들도 무시하지 않는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일 뿐이니까 인정한다.”
―문학회에는 어떤 시인들이 있나.
“삶 속에서 생활시를 쓰는 분도 있고, 프로 시인에 도전하며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계신 분도 있다.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공부벌레도 있다. 그런가 하면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CEO인데, ‘와인’과 ‘사랑’이란 두 가지 주제로만 시집을 3권씩이나 낸 분도 있다. 누구는 너무 가벼운 시가 아니냐는 비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언제 시집을 3권이나 내 보았느냐고. 그 분은 나름대로 기여한 것이다. 어느 출판사 대표는 그 분의 시집 때문에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분이 시집 한 권을 거래처에 선물할 때 주고받은 기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머리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문학이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삶에 체화된 문학만이 이 시대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338390?s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