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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출신 문인 탐방>
< 한국 연극의 대부, 박승희>
박승희(1901-1964)는 중앙이 나은 또 한 명의 연극 선구자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연극단체인 <토월회>를 설립하여 수 많은 작품과, 배우, 연출자를 산출했다.
실로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현재 한국의 연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명실공히 한국 연극의 개척자요, 산파요, 대부(代父)였다.
박승희는 한말 초대 주미공사였던 박정양의 3남으로 태어났다.
박정양은 1887년 주미공사를 지낸 후, 귀국하여 1889년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서울시장)을 거쳐 1895년 대한제국의 내각총리가 되었다.
개화파로서 독립협회를 주도하였다.
이런 명문대가에서 태어난 박승희는 중앙고보(10회 졸)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중 이서구, 김기진 등과 함께 신극 단체 <토월회>를 조직하여(1923) 본격적으로 신극운동에 앞장 선다.
<토월회>는 그 동안 일본극을 모방한 신파극 시대를 벗어나 신극운동의 출발점을 이루는 획시기적인(epoch making) 단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토월회>를 기점으로 한국 연극은 진부한 신파극에서 현대극으로 비로서 탈바꿈 했던 것이다.
하기방학 중 전국순례 연극공연으로 농촌계몽 운동에 앞장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것도 큰 공로다.
토월회는 박승희가 만들고 투자한 박승희의 연극단체다.
1905년 부친이 죽자 그에게 받은 많은 유산을 거의 다 토월회에 쏟아 부은 것이다.
뿐 아니라 스스로 작품을 쓰고 연출하며 배우로도 나섰다.
희곡, 각색, 연출, 배우, 재정까지 극단의 모든 일을 혼자 담당했던 것이다.
창단 초기에는 마땅한 무대가 없어 단성사에서 공연하다가 1925년 전속극장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공연체제를 갖춘다.
1931년 일제의 강제해산으로 <태양극장>으로 개명하여 1941년까지 운영했다.
<태양극장>은 무대를 넓혀 중국 북간도, 일본까지 진출한 국제 단체가 되었다.
토월회 공연이 총 180 여 편이었는데 이 정도 공연은 신극 초기에 역사적인 사건이다.
자신의 창작, 번안, 번역 작품은 200여 편에 이른다.
대표 창작품은 <아리랑고개>, <사랑과 죽음>, <산서낭당>, <고향>, <요부> 등 십여 편에 이른다.
1931년에는 ‘방송극 협회’를 설립하여 ‘방송극’이라는 새로운 극양식을 개척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이애리수, 심영, 이서구 뿐 아니라 이월화, 최명화, 김민자 등 초창기 명배우를 배출한 것도 박승희의 <토월회>와 <태양극장> 덕분이었다.
이처럼 그는 명실공히 초창기 한국 연극 발전에 초석을 놓은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중앙은 명실공히 한국 연극의 개척자들을 배출한 연극 명문교로 재평가 받아야 한다.
한국 연극의 선구자 박승희, 서항석, 함대훈 트로이카가 모두 중앙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ㅡ60회 김영철 씀
아래 사진 토월회 회원들
동그라미 친 사람이 박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