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심판을 심판한다 … 칼 빼든 정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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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심판을 심판한다 … 칼 빼든 정해성
[중앙일보] 입력 2013.12.21 01:11 / 수정 2013.12.22 13:13축구협, 개혁 위해 선수 출신 임명
인맥 문화 바꾸고 신뢰 회복 나서
"심판 등급 세분화, 컴퓨터 배정도"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9일 이재성 심판위원장을 권고사직시켰다. 심판위원장이 심판 체력 테스트 부정행위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서다. 이재성 심판 이전의 심판위원장들도 줄줄이 문제를 일으켰다. A 전 심판위원장은 금품 수수와 관련해 불명예스럽게 물러났고, B 심판위원장은 특정 학교에 대한 편파 판정에 연루됐다는 논란으로 사퇴했다.
‘그라운드의 판사’인 심판은 공정함의 대명사가 돼야 한다. 하지만 심판 중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심판위원장이 잇따라 추문에 휩싸이는 게 한국 축구의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마침내 축구협회가 심판 개혁을 위해 칼을 빼 들었다. 심판위원장에 심판이 아니라 대표팀 코치와 K리그 감독을 역임한 정해성(55·사진) 경기위원장을 임명했다. 심판 개혁을 심판에게 맡길 수 없다는 특단의 조치였다. 개혁은 혁명보다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굳어진 관행과 문화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협회 일각에서는 위원장뿐만 아니라 심판위원도 비심판 출신으로 구성하자는 의견까지 개진됐다.
19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만난 정 위원장은 “당당하고 깨끗하게 일하는 심판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능력보다 인맥이 중시되는 비정상적인 풍토를 확 바꾸겠다는 거다. 그는 “원로 심판과 경기인 출신의 축구협회 사무국 직원, 심판 출신의 부위원장과 전문위원 등으로 구성된 객관적인 판정위원단을 먼저 구성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비리의 온상으로 꼽히는 심판 배정에도 획기적인 대책을 구상 중이다. 정 위원장은 “심판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통해 능력별로 심판의 등급을 세분화하고, 특정 경기에 어떤 심판을 배정할 것인지는 컴퓨터 추첨으로 정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심판위원장을 보필할 부위원장은 두 명을 둘 방침이다. 한 명은 평가와 배정을 담당하고, 다른 한 명은 교육과 국제 업무를 담당한다. 정 위원장은 “한국은 월드컵에 8회 연속 출전했다. 하지만 2002년 이후 월드컵에 주심을 한 명도 보내지 못했다. 영어를 잘하고 능력 있는 젊은 주심과 부심을 팀으로 구성하고 육성해 2018년은 안 되더라도 2022년 월드컵에는 한국의 주·부심 팀이 휘슬을 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가장 큰 문제는 심판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일선 지도자 중에는 “심판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본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많다. 반대로 심판들은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선수조차도 심판을 우습게 본다. 경기에 지면 심판 탓으로 돌리고 욕설을 퍼붓는 지도자가 많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정 위원장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보다는 지금부터 잘못된 문화를 바꿔 나가는 게 중요하다. 심판은 물론 지도자와 학부형도 함께 달라져야 심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깨끗하고 공정한 축구환경을 만들려면 지도자와 학부형도 심판을 활용해 이득을 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 위원장은 “심판은 늘 문제가 있는 대상으로만 언론에 비치는 게 불만스럽다. 문제를 일으키는 심판은 일부일 뿐이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휘슬을 부는 대다수 심판들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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