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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환(58회) 서울대 감독, “‘현장’에만 정답이 있는 게 아니더라”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4년째 맡고 있는 이광환 감독. 치열한 승부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는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 '현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법대로 야구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이 감독과의 인터뷰는 여운이 꽤 오래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일요일 서울대학교 보조운동장. 이른 아침부터 망치를 들고 운동장 한켠에서 시설물 보수 공사에 한창인 사람이 눈에 띈다. 서울대 야구부 유니폼을 갖춰 입고 연한 선글라스를 쓴 그는 바로 이광환(65) 서울대 야구부 감독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전한 뒤 무슨 일을 하고 계시냐고 묻자, 이 감독은 “전기단자함 문이 고장났는데 이 문이 안 닫히면 비가 올 때 누전이 될 것 같아서 문을 고치고 있는 중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한때 LG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프로야구의 선진 야구 시스템을 도입시키는 등 ‘자율야구’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감독은 그 후 한화 이글스와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 감독 역임 후 지금은 서울대 야구부 감독과 베이스볼아카데미 원장, 한국여자야구연맹 부회장, 한국티볼협회 고문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 정신없는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진정한 은퇴는 눈을 감을 때 하는 것”이라고 명언을 남긴 이 감독과 진심이 우러나는 대화를 나눴다.
프로야구를 호령했던 지도자가 ‘붙으면 지는 팀’으로 상징되는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이 팀에서 4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원래는 서울대 야구부를 맡을 생각이 없었어요. 서울대 내에 야구지도자 육성기관인 베이스볼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면서 야구부를 자주 보게 된 것이 결국엔 그 팀을 맡게 된 것입니다. 모른 척 할 수가 없더라고요. 1년 야구부 예산이 150만 원이 전부인데, 그 돈으로는 야구공만 사기에도 턱 없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서서 장비도 지원받아주고, 야구부에 들어온 선수들도 가르치고, 열악한 운동장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망치와 삽을 들고 돌아다니며 두드리고 삽질하면서 보내다보니 지금은 감독보다는 운동장 관리인 또는 야구부 선수들의 도우미가 된 듯해요. 솔직히 그게 더 편하고요.”
비가 내리는 서울대 보조운동장에서 야구부 선수들이 이 감독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야구부 선수들이지만 감독과 선수의 관계가 어느 야구부보다 편하게 다가온다.
승리만을 염원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아마추어 야구부를 맡게 되면서 여러 가지로 느끼시는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렇죠. 프로야구 선수들은 밥만 먹고 야구만 하는 사람들이고, 여기 선수들은 밥만 먹고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니까요. 남들은 1승에 목을 매지만, 우린 그런 성적에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야구하면서 성적이 떨어질까봐 더 걱정이죠. 그래서 전 팀 선수들 중에 학점이 3.5 이하로 떨어진 선수한테는 야구 안 시킵니다. 여기 선수들이 모두 과학고, 영재고 출신들이고 현재 서울대에서 올 A플러스를 받는 친구들도 있어요. 서울대 야구부에선 첫째가 야구가 아닌 공부예요. 두 번째도 야구가 아닌 과외이고요. 세 번째가 야구입니다. 과외는 학생들의 생업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야구는 안 해도 되지만 생업을 포기하면 학교 다니기가 어렵기 때문에 과외를 위해서 야구를 잠시 접을 수도 있는 게 이곳 특징입니다. 여느 학교 야구부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들이죠. 그렇다고 해서 야구부 생활이 편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운동 시간을 어기면 벌금을 내야 해요. 야구는 못해도 되지만 팀 규율이나 선수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퇴출됩니다. 그런데 모두 그런 규율을 잘 지키고 있어요. 야구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야구부를 맡고 느끼셨던 보람은 무엇일까요?
“흔히 야구의 발전을 시설 인프라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인적 인프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야구한 학생들이 졸업 후에는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사가 돼 있을 거라고 봐요. 그때 지금 갖고 있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사회인이 돼서도 쉽게 시들지 않을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 학생들이 야구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이곳은 야구인으로 봤을 때는 좀 별난 세상입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와는 완전 딴판인 곳이니까요.”
감독님은 우리 히어로즈에서의 감독을 끝으로 더 이상 프로팀과는 인연을 맺지 못하셨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나요?
“뱃놈이 산에 와 있으니 고기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는 KBO에서 경기감독관을 맡았어요. 일의 특성상 현장에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유영구 총재 당시 갑자기 아카데미 설립이 중요하다고 하셔서 이 베이스볼아카데미를 만들 게 된 거예요. 저를 적임자로 지정하시는 바람에 꼼짝 없이 학교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현장에 있고 싶었어요. 기회가 되면 또다시 (프로)감독을 해볼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여기 와서는 뭐, 이젠 포기죠.”
이 감독도 한때는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야구부를 맡고 베이스볼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그가 할 일이 현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프로야구 감독들 대부분이 젊은 지도자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감독님이 현장에 계실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나이 들어서 자꾸 욕심내면 안 돼요. 후배들이 할 일이 있고, 나이 먹은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꼭 현장에만 있어야 야구판을 위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감독만 바꾼다고 팀 전체가 달라지진 않아요. 팀 전력도 갖춰야 하고, 그런 팀을 만들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런데 우린 기다려주질 않잖아요.”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떠세요? 굉장히 바쁘실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침 일찍 KBO로 출근해요. 거기서 볼 일 보고 학교와서 이 놈들(서울대 야구부원들)이랑 놀다 보면 밤 9시는 훌쩍 지나가요. 출장도 많이 다닙니다. 여자야구도 있고, 유소년 야구도 봐줘야 하고 해서…. 휴일이 없어요. 휴식도 없고. 전 월 화 수 목 금 금 금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로팀 감독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아요. 그때는 한 팀만 돌보면 되지만, 지금은 다양한 형태의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니까 개인 시간 같기가 어렵더라고요.”
나이 드신 분들이 들으면 정말 부러워하실 말씀이세요. 감독님은 선수 생활을 언제 그만두신 건가요?
“1976년 쯤 됐을 거예요. 군대 갔다 와서 한일은행 유니폼을 벗고 은행원의 삶을 살았으니까. 당시에는 선수 출신이 정식 은행원이 되는 게 힘들었어요. 시험에 합격해야 대리 자리를 줬거든요. 운동만 오래하면 뭐해요. 나이 들어서 할 일이 딱히 없는데. 그래서 은행원 시험에 도전했었죠. 은행 대리로 근무하면서 중앙고 감독도 겸직했었어요. 엄밀히 따지면 지도자 생활의 시작은 중앙고 감독이었죠. 학교 재정이 좋지 않아서 무보수로 봉사한 셈이지만 그게 지도자 생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다 은행 측에서 감독 겸직을 못하게 했고, 제가 학교 감독을 그만두려 하니까 선배들이 강하게 만류했어요. 다른 직장 잡아줄 테니 은행 그만두고 학교 감독은 계속하라면서. 그때 한 타이어 업체에 경리부장으로 ‘빽’ 써서 들어갔어요. 당연히 중앙고 감독은 계속했고요. 프로가 생기면서 OB베어스 창단 코치가 돼 프로와 인연을 맺었죠. 만약 은행원을 택하고 학교 감독을 그만뒀더라면 지금의 이광환도 없었을 겁니다.”
LG 감독을 맡으신 후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자적인 시스템을 실행에 옮기셨어요. 그로 인해 반대의 세력과도 많이 싸우시지 않았나요?
“당시 전 야구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외국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어요. 일본과 메이저리그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코치로 팀 훈련에 참여했었죠. 그때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한국의 프로는 진정한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이고, 미국의 시스템이 진정한 프로라는 것을요. 그걸 도입해서 실행하려다보니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전까지만 해도 선수들이 야구장에 출근하는 시간이 경기 시작 2시간 반 전이었습니다. 전 4시간 전에 와야 한다고 주장했었고요. 이러다보니 저항들이 생기는 거죠. 늦게 나오던 습관을 갑자기 바꾸려 하니. 당시엔 라커룸도 없었어요. 복도에서 다 갈아입었죠. 샤워실요? 그런 게 어디 있었겠어요. 이런 환경조차 만들지 않고 말만 ‘프로’인 팀에서 진정한 프로 선수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광환 감독하면 '자율야구'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 감독은 자율야구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됐다고 말한다.
당시 굉장히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그때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신 덕분에 한국의 프로야구가 빨리 정착된 것 같아요. ‘자율야구’도 그때 생긴 단어잖아요.
“사람들은 자율야구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요. 자율은 풀어주는 제도가 아니었어요.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선수와 비디오를 보며 경기를 분석해야 할 선수, 타격, 수비 연습을 해야 할 선수 등 파트별로 나눠 자율을 보장해줬던 것이죠. 더욱이 투수 분업화 시스템도 당시에는 획기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오늘 선발 투수가 내일 마무리로 나오는 건 다반사였습니다. 내일 마무리가 모레 선발로 나오는 일도 있었고…. 그래서 선발과 중간, 마무리의 보직을 정하면서 투수 로테이션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미 제가 눈으로 보고 느낀 일본과 미국 야구가 있는데, 그들의 시스템을 모른 체 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 작은 야구판에서 ‘개혁’을 한다는 명분 때문에 100명에서 99명을 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당시엔 그 시간들이 아픔이자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그 시간들이 희열과 보람을 안겨줍니다. 세상의 이치도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모든 건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줬으니까요.”
지금 나이 어린 야구 팬들은 감독님 말씀이 마치 ‘옛날 영화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 같네요. 베이스볼 아카데미는 야구 지도자 양성 기관인데요, 이곳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곳 커리큘럼이 굉장히 엄격하다면서요?
“베이스볼 아카데미에는 세 개의 클래스가 있습니다. 유소년, 고등․대학, 그리고 프로 지도자반으로 나뉩니다. 70명의 교수를 비롯해 외부 강사, 프로야구 출신 강사 등을 포함하면 8,90명이 수강생을 상대로 강의에 나섭니다. 교수들한테는 개발비를 지급하면서 일반론적인 얘기를 빼고 반드시 야구와 접목해서 강의를 해달라고 합니다. 70명의 교수들 중 서울대 교수가 3분의 1 정도 됩니다. 교수들 수준이 높다 보니 전체적인 강의 분위기가 다른 곳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예요. 지도자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축구처럼 전문적인 교육기관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자격증도 따고 해서 정식 감독이 돼야 하는데, 지금 야구계는 선수 출신이면 다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보니 정작 공부해야 할 감독들이 공부에 소홀히 하고 있죠. 그래서 KBO에서 이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영어, 야구심리학, 야구사회학, 스포츠생리학 등 다양한 과목을 신설해서 정해진 과목과 학점을 딴 수강생들한테 라이센스를 부여합니다.”
베이스볼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야구 지도자의 공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하는 이 감독. 박찬호도 지도자를 하려면 정식으로 지도자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곳을 거쳐 간 유명 지도자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지도자들이 약 300명 정도 돼요. KIA타이거즈 김용달 코치는 여기서 교육받고 나가서 ‘용달 매직’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장채근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학생’이었죠. 항상 맨 앞줄에 앉아서 땀을 흘리며 필기했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20시간을 이수해야 KBO에서 정식 지도자 자격증을 줍니다. 시험 점수가 모자라거나 수업 참석율이 저조하면 절대로 자격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프로팀 감독들은 시즌이라 시간을 낼 수 없지만, 시즌 마치면 이곳에서 정규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박찬호도 야구 지도자하려면 여기 와서 공부해야 합니다.”
감독님의 생활을 들어보면 ‘은퇴’라는 단어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은퇴는 죽을 때 하는 겁니다. 인생의 은퇴는 죽음 아닌가요? 전 퇴직한 친구들한테 움직일 수 있을 때 가급적 많이 움직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약, 보약, 왜 먹습니까. 자신이 한 길을 걸었던 곳에서 봉사하면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낸다면 그게 진정한 보약 아닐까요? 전 야구판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다면 제주도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사람 농사는 평생 했잖아요. 인생의 마무리는 씨 뿌리고 물주고 거름 주면서, 배추도 심고 나무도 심으면서, 살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에 이 감독은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이 인터뷰 기사 쓸 때, 이 얘기 좀 꼭 써주세요. 서울대학교에는 각 기업체 이름을 딴 학과 건물들이 많이 설립돼 있어요. 대부분 대기업에서 지원한 건물들이죠. 그런데 서울대에 야구장을 세우려 하니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요. 지금 우리 애들은 돌바닥에서 야구하고 있거든요. 학교에서 지원을 해줬음 좋겠지만 예산이 부족하다고 난색을 표하더라고요. 만약 저한테 20억만 있으면 생활비 떼고 남은 돈은 전부 야구장 건립에 내놓고 싶어요.”
이 감독에게 건강 관리의 비결도 물었다. 그는 “지금은 아플 시간도 없어요. 애들(야구부원들) 데리고 막걸리도 한 잔 하고, 담배도 피우고, 할 건 다해요. 그래도 건강에는 이상 없어요. 아마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설명한다.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이 감독은 프로의 세계에서 쌓였던 오래된 스트레스를 조금씩 해소하고 있는 듯 했다. 이 감독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
치열한 승부의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즐기는 이 감독과의 만남은 잠시 시간 여행을 하고 온 듯한 느낌표들을 선사한다. 이미 프로팀 감독에선 은퇴했지만, 이광환 감독의 야구 인생은 여전히, 더 바쁘게 ‘현재진행형’으로 달리고 있었다.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