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30년 Ⅱ 거인, 그들의 이야기] <4> 홍성흔(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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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30년 Ⅱ 거인, 그들의 이야기] <4> 홍성흔
홍성흔은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원정경기나 전지훈련 등으로 해마다 6개월 이상은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어 미칠 지경이라고 한다.
그는 "1년에 6개월 정도는 아이들 얼굴을 못 본다. 홈 경기가 있는 날에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이후에 집에 가는 경우가 많다. 아빠로서는 빵점짜리"라고 아쉬워했다.
빵점 아빠는 올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 올해 결혼 10년차를 맞아 부인, 아이들과 함께 웨딩사진을 다시 찍는 것.
그리고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홍성흔은 다른 소원을 하나 더 조심스레 밝혔다.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는 것.
그는 롯데 유니폼을 입은 뒤 선수로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한다.
열정적인 팬들과 코칭스태프, 구단이 자신의 스타일과 너무 잘 맞는다는 것이다.
롯데에서 부족함 없이 야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방인이다.
팬들이 너무 헌신적으로 잘 해줘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으로 대접받는 데 대해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홍성흔은 "이방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떼버리고 싶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고 싶다. 롯데팬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남은 야구인생을 걸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48)
"이방인 아닌 진정한 롯데선수로 은퇴하고 싶어요"
그는 옆에 있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긍정의 에너지가 항상 충만하다.
야구장에 나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고 늘 말한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홍성흔.
그의 지론은 이렇다. "한 번 사는 세상입니다. 인상쓰면서 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야구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팀 성적이 처지고 있는 요즘은 어떨까.
지난 10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충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코칭스태프를 보면 큰 소리로 인사하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는 후배들의 어깨를 치며 기운을 불어 넣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성격 쾌활
프로 2년 만에 우승 자만
이후 10년간 우승 맛 못봐
롯데 이적 후 제2전성기
선수로서 경기 못할 때
가족의 격려 가장 큰 힘
평소와는 조금 다른 점도 있었다.
후배들에게 기본을 강조했다.
그는 "요즘처럼 팀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후배들의 생활자세를 먼저 본다.
라커 정리를 깨끗이 하는지, 한 발 더 뛰며 팀 분위기를 살리려 노력하는지를 살핀다"고 말했다.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란다.
홍성흔은 프로선수가 경기를 잘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일수록 기본적인 자세에 충실해야만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고, 팀도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홍성흔이 두산 베어스에서 롯데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지난 2009년 당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홍성흔은 당시 롯데 선수들이 경기에서 패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는 모습을 보고는 기가 찼다.
프로선수로서 기본 자세가 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는 선수들을 불러놓고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그는 "당시 롯데 선수들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경기에서 패하면 다음에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다부진 각오는 다지지 못할 망정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는 모습은 프로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포수 강민호는 요즘도 홍성흔에게 한 번씩 야단을 맞는다고 한다.
"강민호는 다른 선수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입니다. 하지만 경기 직전까지 집중을 하지 않아 가끔 야단을 치곤 합니다. 포수는 다른 8명의 선수를 모두 통제해야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홍성흔은 어릴 때부터 쾌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평소 생활은 물론 야구를 할 때도 그랬다.
그는 "사실 어릴 때는 까부는 스타일이었다. 성장해가면서 성격이 긍정적이고 밝게 바뀌었다. 이러한 나를 보면 주위 사람들이 즐거워진다고 얘기해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낙천적인 성격답게 야구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를 꼽았다.
우선 2001년 두산에서 우승했을 때를 떠올렸다.
"프로 입단 2년 만에 우승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승은 정말 쉬운 것이구나 생각했죠. 하지만 이후 10년 넘게 우승 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롯데로 옮긴 뒤인 2010년 26홈런 116타점을 기록한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당시 내가 가진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제2의 야구인생을 살았으나 얼마나 기뻤겠느냐"고 말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7년 시즌을 마치고 선수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다.
발목과 팔꿈치 수술을 동시에 받아 공조차 던질 수가 없었다.
야구선수가 공도 못 던지니 구단에서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야구선수가 공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밥을 떠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구단에서 날 받아줄 리 만무했죠."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해 겨울 대전으로 내려와 개인훈련에 매달렸다.
겨울이 가고 이듬해 시범경기가 시작됐지만 구단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야구를 그만둘까 생각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가족이 큰 힘이 됐다. 당시 서울에 살던 부인이 대전까지 내려와 그에게 힘을 보탰다.
"아내가 '야구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다. 걱정말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어요. 그 말이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
그는 추운 날씨에도 엄마와 함께 훈련지에 찾아온 3살 딸이 고구마를 건네주는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야구를 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해 홍성흔은 40% 삭감된 연봉으로 두산과 재계약했다.
큰 폭의 연봉 삭감에도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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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옆에 있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긍정의 에너지가 항상 충만하다.
야구장에 나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고 늘 말한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홍성흔.
그의 지론은 이렇다. "한 번 사는 세상입니다. 인상쓰면서 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야구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팀 성적이 처지고 있는 요즘은 어떨까.
지난 10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충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코칭스태프를 보면 큰 소리로 인사하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는 후배들의 어깨를 치며 기운을 불어 넣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성격 쾌활
프로 2년 만에 우승 자만
이후 10년간 우승 맛 못봐
롯데 이적 후 제2전성기
선수로서 경기 못할 때
가족의 격려 가장 큰 힘
평소와는 조금 다른 점도 있었다.
후배들에게 기본을 강조했다.
그는 "요즘처럼 팀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후배들의 생활자세를 먼저 본다.
라커 정리를 깨끗이 하는지, 한 발 더 뛰며 팀 분위기를 살리려 노력하는지를 살핀다"고 말했다.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란다.
홍성흔은 프로선수가 경기를 잘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일수록 기본적인 자세에 충실해야만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고, 팀도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홍성흔이 두산 베어스에서 롯데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지난 2009년 당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홍성흔은 당시 롯데 선수들이 경기에서 패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는 모습을 보고는 기가 찼다.
프로선수로서 기본 자세가 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는 선수들을 불러놓고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그는 "당시 롯데 선수들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경기에서 패하면 다음에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다부진 각오는 다지지 못할 망정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는 모습은 프로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포수 강민호는 요즘도 홍성흔에게 한 번씩 야단을 맞는다고 한다.
"강민호는 다른 선수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입니다. 하지만 경기 직전까지 집중을 하지 않아 가끔 야단을 치곤 합니다. 포수는 다른 8명의 선수를 모두 통제해야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홍성흔은 어릴 때부터 쾌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평소 생활은 물론 야구를 할 때도 그랬다.
그는 "사실 어릴 때는 까부는 스타일이었다. 성장해가면서 성격이 긍정적이고 밝게 바뀌었다. 이러한 나를 보면 주위 사람들이 즐거워진다고 얘기해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낙천적인 성격답게 야구인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를 꼽았다.
우선 2001년 두산에서 우승했을 때를 떠올렸다.
"프로 입단 2년 만에 우승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승은 정말 쉬운 것이구나 생각했죠. 하지만 이후 10년 넘게 우승 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롯데로 옮긴 뒤인 2010년 26홈런 116타점을 기록한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당시 내가 가진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제2의 야구인생을 살았으나 얼마나 기뻤겠느냐"고 말했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7년 시즌을 마치고 선수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다.
발목과 팔꿈치 수술을 동시에 받아 공조차 던질 수가 없었다.
야구선수가 공도 못 던지니 구단에서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야구선수가 공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밥을 떠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구단에서 날 받아줄 리 만무했죠."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해 겨울 대전으로 내려와 개인훈련에 매달렸다.
겨울이 가고 이듬해 시범경기가 시작됐지만 구단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야구를 그만둘까 생각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가족이 큰 힘이 됐다. 당시 서울에 살던 부인이 대전까지 내려와 그에게 힘을 보탰다.
"아내가 '야구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다. 걱정말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어요. 그 말이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
그는 추운 날씨에도 엄마와 함께 훈련지에 찾아온 3살 딸이 고구마를 건네주는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야구를 하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해 홍성흔은 40% 삭감된 연봉으로 두산과 재계약했다.
큰 폭의 연봉 삭감에도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롯데 자이언츠 홍성흔이 가족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홍성흔 제공 |
홍성흔은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원정경기나 전지훈련 등으로 해마다 6개월 이상은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어 미칠 지경이라고 한다.
그는 "1년에 6개월 정도는 아이들 얼굴을 못 본다. 홈 경기가 있는 날에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이후에 집에 가는 경우가 많다. 아빠로서는 빵점짜리"라고 아쉬워했다.
빵점 아빠는 올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 올해 결혼 10년차를 맞아 부인, 아이들과 함께 웨딩사진을 다시 찍는 것.
그리고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홍성흔은 다른 소원을 하나 더 조심스레 밝혔다.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는 것.
그는 롯데 유니폼을 입은 뒤 선수로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고 한다.
열정적인 팬들과 코칭스태프, 구단이 자신의 스타일과 너무 잘 맞는다는 것이다.
롯데에서 부족함 없이 야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방인이다.
팬들이 너무 헌신적으로 잘 해줘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으로 대접받는 데 대해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홍성흔은 "이방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떼버리고 싶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고 싶다. 롯데팬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도록 남은 야구인생을 걸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paperk@busan.com
홍성흔 약력
■공릉초-중앙중-중앙고-경희대
■1999년두산 베어스 입단
■2001년두산 베어스 우승 주역
■2009년롯데 자이언츠 입단
■개인통산 6차례 골든글러브 수상
(2001, 2004년 포수. 2008~2011년 지명타자)
■2012년 5월1일 1천500경기 출전 기록
■공릉초-중앙중-중앙고-경희대
■1999년두산 베어스 입단
■2001년두산 베어스 우승 주역
■2009년롯데 자이언츠 입단
■개인통산 6차례 골든글러브 수상
(2001, 2004년 포수. 2008~2011년 지명타자)
■2012년 5월1일 1천500경기 출전 기록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