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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154회 작성일 2012-04-28 04:02
중앙고의 ‘지포라이터’ 최불암(최영한,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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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짱’ 출신 스타 5인이 말하는 학교폭력

[신동아]

 

학교폭력의 수준이 도를 넘어섰다. 

여럿이 무리지어 한 아이를 왕따시킨 뒤 돈과 옷을 빼앗는 것은 물론 성추행이나 고문으로 비관 자살하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수십 년 전에도 학교폭력은 존재했지만 그 양상은 지금과는 꽤 달랐다.

 학교폭력이 극한으로 치닫자 정부 당국은 해결사로 경찰을 내세웠다. 

하지만 신성한 학교에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를 우려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학교폭력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학창 시절 힘이 세거나 리더십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이른바 ‘짱’으로 통했던 연예계 스타들을 만나 학교폭력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봤다.



| 중앙고의 ‘지포라이터’ 최불암 


“마침 오늘 드라마 촬영이 없어서 시간이 있었는데 때맞춰 전화를 줬군요.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도 할 말이 많고….”

전국의 모든 학교가 개학을 앞둔 2월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 커피숍. 배우 최불암(72·본명 최영한)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중앙고를 거쳐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왔다. 

배우가 된 후 한국의 아버지상을 주로 연기해 근엄하면서도 푸근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학창 시절에는 싸움 잘하는 아이로 손꼽혔다고 한다.

“그때는 체격이 크고 맨 뒷 줄에 앉은 사람, 전쟁 때문에 해를 묵어 나이가 한두 살 많은 사람, 그런 아이들 중에 문제아가 좀 튀어나왔지, 지금처럼 조직을 만들진 않았어. 키 크고 덩치 좋거나 운동만 잘해도 싸움 잘한다고 인정을 받았고. 남자의 본능이 기운이거든. 기운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애들이 있었고. 난 고등학교 때부터 신문이니 연극이니 이런 것을 좋아해서 그쪽엔 끼지 않았어.” 

▼ 그때도 친구 돈 뺏는 학생이 있었나요? 

“있었지. 돈 없으면 ‘야 돈 좀 빌려줘’ 그랬거든. 집에 갈 차비가 없다든지 배고픈데 빵 하나 사줘 그런다든지. 지금에 비하면 강도는 약하지만 성격상 비슷했지. 당하는 쪽은 기분 나쁠 것 아니겠어.” 

▼ 학창 시절 짱으로 통했다면서요?

“학교를 위해 정의감의 발로에서 죽어라 싸운 경우는 있지. 학교 대 학교로 붙는 패싸움 같은 것. 다 같이 싸울 때도 있고. 클럽끼리 싸울 때도 있었어. 지금 이 키가 중3 때 키야. 그때 다 자라서 상당히 컸어. 한 반에 60번까지 있었는데 키순으로 앉으니까 30번 이하면 말도 잘 못 걸었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상대를 정신적으로까지 핍박하진 않았어.”

그는 학창 시절 추억 중 패싸움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다니던 중앙고 학생이 경기여고에서 경복고 학생들과 농구시합을 했는데 반칙 때문에 옥신각신하다가 경복고 학생이 코피가 터진 게 발단이었다.

 중앙고 학생이 경복고 학생들에게 잡혀가 코피를 터뜨린 사람이 최불암이라고 둘러대자 경복고의 에이스 야구선수이자 짱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중앙고 근처 낙원상가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 우린 네 명이 갔는데 그쪽에선 열 명을 데려왔어. 

그 학교 짱이 차중덕이었어. 예전에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차중락의 형이야. 

농구부 일을 사과하라기에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중에 보니까 중덕이 가방에 쇠파이프가 들어 있더라고. 

당시에는 쇠파이프나 자전거 사슬을 책가방에 넣고 다녔어. 

내가 덩치도 가장 좋고 힘도 세보이니까 바로 치진 않더라고. 

사실 야구부터 기계체조까지 안 한 운동이 없어서 몸도 날랬고. 

근데 중덕이가 모자를 탁 벗더니 ‘넌 내 학교의 자존심을 무시했다. 

이걸 밟아라’ 하는 거야. 

그걸 밟으면 친구들이 작살나게 생겼는데 어떻게 밟겠어. 

모자를 탁탁 털어서 던져주고는 내 모자를 벗어서 밟으라고 했지. 

근데 그 친구가 딱 밟더라고. 젊은이의 자존심과 모교를 짓밟은 거란 말이야.

 털어가지고 다시 주기에 받아왔어.” 

▼ 잘 끝내셨네요. 

“그날은 싸움이 안 났지. 대신 다음 날 동네 조직을 데리고 중덕이 집을 찾아갔어. 우리 삼촌이 당시에 조직에 있어서 구원요청을 했지. 근데 중덕이 어머니가 참 현명하셨어. 내가 온 것을 알고 중덕이를 불러 날 방으로 데려갔어. 밖에서는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날 밥상머리에 앉아 중덕이한테서 결국 사과를 받아내고는 밥도 안 먹고 나왔어. 근데 뒷이야기가 더 재밌어. 그 친구를 미국에서 40~50년 만에 만났는데 유명한 장로가 됐더라고. 술 한잔하면서 회포를 풀었지. 우리 땐 그런 낭만이 있었어. 어느 학교든 연극반, 문학반, 운동반 같은 동아리가 있어서 정서를 순화시키고 교내 분위기를 정화시켰어. 동아리가 많아지면 폭력은 저절로 없어져. 폭력보다 그게 재미있으니까.” 

그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치중하고 문화 체육 활동을 등한시하는 게 문제”라면서 “사복경찰관의 등장이 오히려 학생들의 분노심을 자극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복경찰관이 총 들면 애들은 수류탄 들고 나와. 날 반추해보면 그렇다는 거야. 혈기왕성한 애들의 진로를 막으면 분노가 터지게 돼 있어. 분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해. 아이들이 기운 자랑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우리 때도 그랬어. 남자 교실에선 피할 수 없지. 자기를 방어하려고 상대를 때린 건 아니야. 너 잘못했으니까 반성해라, 이런 뜻이거든. 그래서 정의라는 개념을 잘 가르쳐야 해. 불의의 원인부터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국회를 봐. 애들 싸운다고 뭐라고 할 게 아니야. 정치만 잘하면 금세 바로잡을 수 있어. 아이들 싸우는 거나 정치인, 정당들이 싸우는 거나 똑같은 거야.” 

그는 “학교폭력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문화 예술 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막장드라마를 방영해선 안 된다”며 “매스컴이 반성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연극반에서 배우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고 배웠어. 근데 지금 미디어를 봐. 질투나 시기, 폭력을 합리화하잖아. 아이들이 그런 거 보니 인간미도 없고 잔인해지는 거야. 사회적 반항심에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 인간적인 교훈과 감동을 주는 드라마가 많이 나와야 돼. 내가 지금 하는 채널A‘천상의 화원 곰배령’이 좋은 예지. 정말 남자다운 게 뭔지를 일깨워주는 영웅이야기를 책이나 문화생활을 통해 많이 접하게 해야 돼. 나도 ‘군인의 생애’라는 소설을 보고 남을 아프게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 학교에서도 감동을 주는 교육을 해야 돼. 우리 땐 그게 있었어. 내가 미술을 그만두고 운동을 하겠다고 했더니 미술 선생님이 눈물을 뚝뚝 흘리시며 잡았어. 어찌나 뭉클하던지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 



▼ 왕따나 학교폭력 피해자에겐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요? 

“네가 더 잘하라고 하고 싶어. 미운 꼴을 보이지 말아야지, 다른 아이들 공부 안 하는데 저만 공부한다고 앉아 있으면 ‘왕따’시키지 않겠어? 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 안 돼. 그 아이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해. 그래서 밥상머리 교육이 절실한 거야. 요즘 애들은 부모님과 밥 먹으면서 얘기할 시간이 없잖아. 아이와 자주 대화하면서 아이 성향에 맞게 인도해줘야지, 체질에도 안 맞는 아이를 법률가, 의사 만들려고 하니 이런 사달이 나는 거야.” 

▼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시 정치하셔도 되겠는데요? 

“내가 이만한 큰 정치를 하고 있는데 무슨 정치? 좋은 드라마 한편 하는 게 낫지(웃음).” 





| 맞짱 뜨면 3분 안에 끝낸 ‘히라소니’ 이대근 


1980년대 ‘변강쇠’와 ‘뽕’ 시리즈로 에로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끈 배우 이대근(69). 1967년 KBS 7기 공채탤런트로 연예계에 들어섰으니, 40대 초반의 팬들은 그를 섹스심벌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데 1970년대까지 그의 주된 활동무대는 액션영화였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김두한’이 스크린 데뷔작이다. 

이후 그는 ‘김두한’ 시리즈의 5편까지 출연하고 ‘히라소니’ 1, 2편과 ‘거지왕 김춘삼’ ‘사나이들’ 등 한국 액션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한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대역을 쓰지 않던 그 시대에 그가 숱한 액션연기를 소화할 수 있었던 건 학창 시절부터 갖가지 운동으로 단련된 몸 덕이었다.

“태권도, 기계체조, 레슬링, 아마추어 복싱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지. 다른 애들은 기껏해야 운동 하나밖에 못했고. 그래도 내가 먼저 시비를 걸진 않았다고. 지들이 겁먹고 건들지를 않았지. 난 반공 집안에서 태어나 의심협이 강했어. 대한청년단 감찰위원장을 지낸 이상돌 씨가 아버지야. 당시 김두환 씨가 단장을 했고.” 

▼ 어떤 의협심인가요. 

“약한 친구를 못살게 구는 아이가 있으면 효창운동장 같은 데로 나오라고 해서 웃통 벗고 싸우는 거지. 그럼 두 대를 안 넘겼어. 3분 안에 싸움을 끝내니까. 싸워서 3분을 넘겨본 적이 없어. 그 바람에 이 학교, 저 학교 많이 옮겨 다녔어. 유도가 4단이니 운동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고, 다른 학교 친구들이 괴롭히는 아이가 있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도움을 청하니 안 갈 수가 없었고. 숭문, 동도, 균명, 배문, 서라벌, 인창 등 고등학교를 7군데 정도 다녔지. 가면 꼭 시비 거는 아이가 있었어. 대개 나이가 한두 살 많아서 딱 봐도 몸이 둔해보였어. 결과야 뻔했고. 그렇게 내가 싸워서 이겨야 친구를 안 건드리니까 어쩔 수 없었어. 담이 컸지. 누가 덤벼도 꿈쩍을 안 하니 아이들이 날 무섭게 알았어. 같은 반 친구들도 무서워서 반말을 못했어. 어려우니까. 그랬어도 날 퇴학시키질 않았어. 내가 가면 정상적으로 싸워서 나쁜 짓하는 아이들을 평정해 싸움이 없어졌거든. 선생들이 날 좋아했어. 그래서 졸업장도 두 개나 줬지.

▼ 정말 잘 싸우셨나 봐요? 

“당시에는 ‘재건대’라고 해서 종이 줍던 애들이 있었는데 돈만 갖고 오면 졸업장 따라고 학교에 들여보내줬어. 근데 걔네들이 갈고리로 찍고 칼질하고 그런 나쁜 짓을 많이 했어. 그래도 나한텐 게임이 안 됐지. 난 상대를 보면 어떤 운동을 하는지 다 보여. 액션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상대방 주먹이 어디로 들어올지 다 보이니까 맞지 않았지. 몸이 얼마나 빨랐는지 몰라. 내가 마흔일곱 살 때 발차기가 어른 키를 넘겼어. 유리창도 뚫고. 그러니 대역 없이 내가 다 했지. 우리 시대 다음에 칼의 문화가 도래했지. 건달이 아니라 깡패 조직이 생겨났어. 건달은 깡패와 달라. 의협심이 강해서 불의를 못 보는 걸 건달이라고 했지. 반 아이를 괴롭혀봐야 도시락 뺏어 먹고 버스표 뺏고 꿀밤 때리는 정도였어.” 

▼ 지금은 양상이 많이 달라졌는데 현재 학교폭력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싸움은 시작됐고, 원죄가 있어 본성은 악해.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의식주가 먼저니까 힘 있는 사람이 판칠 수밖에 없는 구조고. 그래도 우리 때는 반공의 시대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논하고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없잖아. 게임으로 만날 죽이고 노니까 상대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어.”
 

▼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전부 가난한 시대여서 장발장처럼 생활고에 찌들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많았고 형사나 검사도 폭력을 마구 휘둘렀어. 일단 잡혀가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차는 건 기본이었지. 과도기였어.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때를 비판해선 안돼. 사회 지도층이 범죄를 저질러도 죗값 치르지 않고 나오는 지금이나 그때나 매한가지지. 엄마는 TV 앞에서 불륜드라마 보면서 아이한테 공부하라고 하면 말이 먹히겠느냐고. 두 얼굴을 가진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니 아이가 뭘 보고 배우겠어. 자식에게 맞지 말고 때리고 오라고 한다잖아. 그런 사람이 지도층이 되고 부모가 되니 점점 더 삭막하고 잔인해지는 거지.”

그는 “삶의 우선순위가 국가, 사회, 이웃, 가정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뭐든지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폭력을 이용한 땅 뺏기 전쟁을 거쳐 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났고 지금은 산업 시대이자 개인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앞으로 문화전쟁과 종교전쟁이 닥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 학교폭력 양상이 잔인해진 원인이 뭘까요? 

“이상이 목적이 돼야 하는데 수단으로만 써먹어서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잖아. 예전엔 사랑보다 깊은 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 타령을 하잖아. 첫째는 부모가 모범을 보이지 않는 게 문제고, 둘째는 매스컴의 책임이야. 텔레비전과 게임으로 폭력과 잔인성을 배우니까. 가정교육이 철저해야 해. 매를 폭력으로 생각하면 안돼. 매는 교육이야. 우리 때는 스승에게 가죽장갑 낀 주먹으로 맞아도 졸업 후에는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어. 학교폭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해.” 

그에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14급 공무원이 된 두 딸과 교사가 된 막내딸이 있다. 그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아내를 거론하면서 “자식은 눈물로 키워야 한다. 모범을 보일 자신이 없는 엄마는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결혼하기 전날 나를 따로 불러 계집은 호랑이처럼 기르라고 하셨어.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니, 큰 호랑이도 어릴 때부터 매로 가르치면 널 잡아먹으려 할 때 회초리만 들어도 꽁지를 내린다는 거야. 매로 교육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거지. 아이들을 키워보니 그 말이 와 닿더군. 아내가 딸 셋을 정말 엄하게 키웠어. 버릇없이 굴거나 제 할 일을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지. 지금은 공부만 잘하면 인성에 문제가 있어도 가만두는데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엔 걷잡을 수 없게 돼.” 

▼ 그러면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요? 

“그래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해. 국가 원수와 지도층부터 솔선해야지. 나라가 있기에 사회가 있고, 사회가 있기에 이웃이 있고, 이웃이 있기에 가정이 있고 또 내가 있는 거야. 학교폭력을 바로잡으려면 엄마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해. 엄마는 순종하고, 남자는 사랑하라는 말이 있어. 어느 게 더 어려운지 모르지만 여자에겐 숙명이 있어. 자식을 책임지고 반듯하게 길러내는 건 엄마 몫이야. 훌륭한 어머니보다 위대한 어머니가 돼야 해. 나도 지난날을 돌아보니 부끄럽네. 나 자신도 못 고치는 놈이 누구를 고치겠다고 그런 건지…. 나도 이참에 반성해야겠네.”

| 배명고의 ‘왕호(王虎)’ 주현 

아름다운 황혼의 사랑을 그린 영화 ‘해로’에 출연한 배우 주현(69·본명 주일춘)도 “학교폭력의 근본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배명고 재학 시절이던 1960년, 4·19혁명을 겪은 그는 “우리 때는 일제강점기처럼 머리가 조금만 자라도 ‘바리깡’으로 밀어버렸을 정도로 제약이 심했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통금 사이렌 불기 전에 집에 안 가면 구치소 가서 자고,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규제가 많았지만 지금 같은 자유방임보다는 나았지.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아서 방 하나에 여러 형제가 웅크리고 자고 밥상을 책상으로 쓰고 끼니 잇기도 힘들던 시대였고. 우리 아버님이 한의사였어도 먹고살기가 힘들었어. 중학교 때까지 쌀밥 구경을 못했으니까.”

그의 부친은 중국에서 교사를 하다 한의사가 됐고, 일제강점기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손병희 씨의 제자로 천도교 교령 주석까지 지내셨고 가정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자셨다”며 “무척 엄하고 자잘한 정이 없었다”고 아버지를 기억했다. 

“잘못하면 사정없이 주먹이 날아왔어. 체격이 꽤 컸는데도 속으로만 원망했지 감히 대들진 못했지. 그건 호래새 끼나 하는 짓이니까. 부모한테 귀싸대기 맞고 쫓겨나도 반항을 못했어.” 

▼ 학교에선 어떤 학생이었나요? ‘학교 짱’이셨다고 하던데…. 

“나만한 체격이 거의 없었어. 키도 컸고. 80㎏에 178㎝였어. 사람들이 ‘왕호(王虎)라고 불렀어. 커다란 호랑이 같다고. 애들이 건드리지 못했지. 힘이 셌거든. 그래도 우리 때는 의협심이 있어서 약한 애들을 보호해줬지 절대 때리질 않았어. 누가 세다고 그러면 일대일로 붙어서 힘겨루기는 했어도. 그 당시의 학교폭력은 그런 거였어. 방과 후에 애들 다 나와 구경하는 데서 웃통 벗고 싸웠지.” 

▼ 선생님이 그렇게 싸워도 가만두던가요? 

“학교 밖에서 싸웠으니까 선생님은 모르지. 그때는 무리지어 다니면서 폭력 쓰고 그러질 않았어. 친한 애들하고 그냥 어울려 노는 정도였지. 학기 중간에 전학 온 아이들은 신고식을 했어. 괜히 기 꺾어놓으려고 몇 대 때리고 그러는 거 있잖아. 착하게 생겼으면 잘하라고 하면서 신고식 몇 번 시키고 금방 친해졌지.” 

▼ 힘겨루기에서 패한 적도 있나요? 

“거의 없어. 내가 거의 다 평정했지. 동네 학교에서 유명했어. 반장을 3년 내내 했고. 공부 잘해서가 아니라 힘 좋고 인기 좋아서 반장을 했지.” 

▼ 교내에 폭력서클이 있었나요? 

“조직적인 폭력서클은 아니고 깡패들이 있었지. 어느 반마다 공부파가 있고 껄렁거리는 파가 있게 마련이지. 깡패가 지금보다 더 많았어. 학교마다 이름난 애들이 있었어. 그때 깡패들은 주로 패싸움을 했어. 우리 학교 애가 누구한테 맞았다고 하면 그 학교로 몰려가서 싸웠어. 버스표 뺏는 불량한 애들도 있었고. 그래도 지금처럼 악랄하진 않았어. 왕따라는 것도 없었고.” 

▼ 깡패들이 옷은 안 뺏었나요? 

“옷 말고 주로 모자를 뺏었지. 껄렁껄렁한 놈들은 모자를 찢어서 헌 모자처럼 재봉질로 박아 쓰고 다녔어. 모자 창을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눌러 쓰고. 나도 껄렁해보이려고 종종 그러고 다녔어. 책가방 안에다가 몽둥이 같은 것도 넣어 갖고 다니고. 그때는 골목마다 깡패들이 있어서 자칫 방심하면 끌려가 맞으니까 책가방에 흉기나 쇠파이프를 신문지로 감아 갖고 다녔어. 나중에는 깡패들이 더 흉악해져서 공사판에서 쓰는 철근 갈고리를 차고 다니더라고. 손에다가 말발굽 편자를 쥐고 그걸로 때리기도 하고. 그 정도가 최고 흉악한 거였어. 퇴학 맞은 애들이 교복 입고 다니면서 그런 짓을 했지. 그때는 교내 규율이 엄격했어. 학교에서 담배 피우다 걸리면 퇴학감이지. 선생님들이 무서웠어. 걸리면 그냥 몽둥이로 때려서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고 그랬지. 대드는 건 인생 끝나는 거야. 깡패도 선생한테 함부로 못했어. 학교에서 깡패짓 하면 무조건 퇴학시켰으니까.” 

▼ 맞은 학생의 부모가 가만있었나요? 

“부모한테 말하면 뭐해. 네가 잘못해서 맞았다고 하지. 그땐 부모가 학교 가서 항의하고 그러질 않았어. 오히려 선생한테 애들 사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지. 선생 중에도 야비하게 때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십중팔구는 가르치느라고 때린 거야. 벌도 재미있게 주는 선생이 있었고. 출석부를 아이 이마에 대고 ‘돌격’ 하면 아이가 가서 박아야 돼. 얼마나 웃겨. 그런 낭만이 있어야 학교 다니지.” 

▼ 폭력 성향이 왜 점점 잔인하고 야비해질까요? 

“일단 부모 잘못이지. 외국 영화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풀어 키우는 것을 보고 자라다 보니 그게 좋아보이지 않았겠어. 그래서 자식한테 마냥 오냐오냐 하고 식당에서 소란스럽게 해도 야단치는 부모를 못 봤어. 이런 데서부터 잘못된 거야. 인과응보지. 잘한 건 칭찬해주고 못한 건 따끔하게 혼내야 해. 사랑의 매가 꼭 필요하거든. 현대식으로 키운다고 까불다 자식들을 망친 거야.”

 

그는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운동과 서클활동을 꼽았다. 그도 고교 시절 기계체조와 유도, 태권도 등 안 해본 운동이 없다고 한다.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학창 시절과 대학(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 ROTC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만했다. 얼굴도 몸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경찰이 나서면 학교폭력이 해결될 거라고 여기는 건 잘못된 발상이야. 운동을 하면 페어플레이 정신과 단체생활의 매너가 자연히 몸에 배지. 서클활동도 의무적으로 시켜야 돼. 우리 때는 서클에서 강으로 산으로 캠핑을 많이 갔어. 자그마한 텐트에서 네댓 명씩 쭈그려 자고 바닷가에서 뒹굴고 놀았어. 그게 재미지. 요즘 애들하고는 전혀 딴 세상에서 살았지. 사회정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드라마들이 아이들을 버려놓고 있어. 남을 괴롭히고 나쁜 짓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어디에도 그런 걸 배울 데가 없잖아. 앞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이 나와서 한국식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아야 학교폭력이든, 어떤 문제든 해결되지 이대로는 안 돼.” 

| 동신중의 ‘투짱’ 이지훈 

1996년 고교생 신분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가수 겸 배우 이지훈(33)도 학창 시절 주먹이 세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외모까지 출중해 서울 동신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소위 ‘얼짱’으로 통했다. 

주현과 같은 배명고를 나온 그는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한 후 노래보다 연기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현재 SBS 일일드라마 ‘내 딸 꽃님이’에 출연 중이며 4월 5일 막을 올리는 뮤지컬 ‘파리의 연인’에도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3월 5일 서울 강남의 한 녹음실에서 만난 그는 “최근 유니버설뮤직 아시아와 계약을 맺고 국내와 유럽에서 출반될 새 앨범 준비까지 겹쳐 정신이 없다”고 근황을 전하며 학창 시절 방황하던 한 청소년을 떠올렸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심하게 놀아서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불려 다니셨어요. 당시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신 차리고 앞에는 안 나섰죠. 그땐 만화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힘 좀 쓴다는 친구들끼리 어깨에 힘주고 다녔죠. 그러던 제가 연예인이 된다고 하니 부러워하는 친구도 많았어요. 중3 때 연습생으로 들어가 고1 때 데뷔했는데 아마 만날 싸움하러 다니고 놀기 좋아하는 아이가 설마 잘될까 싶었을 거예요.” 

▼ 당시에도 학교폭력이 심각했나요? 

“학교 대 학교로 많이 싸웠어요. 학교 대표끼리 ‘맞짱’ 떠서 그 결과로 학교의 우위를 정하는 전통이 있었어요. 시합 내지 경기 같은 싸움이었죠. 저도 중학교 때는 학교 대표로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어요. 그땐 꽤 폼 나게 싸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막싸움이었네요. 서로 붙들고 뒹굴다 코피 터지고 그랬거든요.” 

▼ 왜 그렇게 싸운 건가요? 

“내 주먹이 더 세다는, 서열에 대한 겉멋이었죠. 초등학교 때 싸움 잘한다고 알려지면 중학교 때까지 그 명성이 이어졌죠. 저도 초등학교 때는 두 손가락 안에 드는 ‘투캡(두 번째 캡틴)’이었어요. 촌스럽죠?(웃음) 서열을 정리하고 싶어서 다른 학교의 명성 있는 아이를 찾아다니고 그랬어요. 그때는 송파지역의 학교 대표 짱끼리 연합을 만들어 어울려 다녔어요. 학교 일진과는 별개였죠.” 

▼ 그 친구들과 모이면 뭘 했나요? 

“커피숍도 가고 당구장도 가고 그랬어요. 우리는 본드 불거나 머리 노랗게 염색하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런 아이들을 불러 돈 뺏는 양아치 짓을 못하게 했죠. 말을 알아듣는 아이는 조용히 보냈지만 못 알아듣고 덤비면 싸우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부숴버리기도 했어요. 우리가 저질 문화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힘없는 아이들을 도와준 셈이죠.” 

▼ 교내에서는 말썽이 없었나요? 

“뺏고 뺏기는 일은 있었지만 심하진 않았어요. 저희 때는 왕따도 없었어요. 같은 반 학생끼리 잘 어울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무리지어 한 아이를 괴롭히며 고문 아닌 고문을 하는 일도 없었어요. 그렇게 힘없고 약한 아이들은 덩치 있는 아이들 따라다니면서 심부름을 하고 그랬어요. ‘꼬봉’(부하)을 하면서 보호를 받은 거죠.” 

▼ 경찰 개입이 학교폭력 저지에 도움이 될까요? 

“그보다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아이들이 비뚤어지고 탈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뭔지 알아야 해결방도가 생길 테니까요. 제 생각엔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운 친구들이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으니까 힘없는 누군가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희 때도 부모가 모두 바쁜 맞벌이 가정이나 부모가 이혼한 가정,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탈선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게 당시에는 그런 친구들을 애정을 가지고 바로잡아주는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그 덕에 비뚤어졌던 아이들도 제자리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죠.”

 

▼ 선생님이 때리면 학생들이 가만있었나요? 

“두말 않고 맞았어요. 선생님을 부모님 같은 존재로 봤으니까. 저도 숙제는 꼬박꼬박 해갔어요. 안 맞으려고요. 자로 한두 대 때리는 게 아니라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들 정도로 때리니까. 그래도 그걸 구타로 보지 않았어요, 교육이라 생각했지. 선생님이 무서우니까 의식적으로라도 지킬 것은 지키려고 했어요. 근데 지금은 선생님의 권위 자체가 무너졌더군요.” 

▼ 원인이 뭘까요? 

“가정교육부터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선생님이 때리면 부모가 들고 일어나잖아요. 저 때만 해도 선생님이 때리면 부모님이 더 때리라고 하셨어요. 잘못한 게 있으면 언제든 체벌하시라고 했고요. 근데 지금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과하다 보니 체벌이 금지되고 선생님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죠.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애정도 예전만 못한 것 같고요. 이제 사제 간에 신의가 무너지고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도 모자라 폭행과 성추행까지 하잖아요. 아이들이 한순간에 변한 건 아닐 거예요. 선생과 부모, 학생이 지금처럼 지켜야 할 선을 쉽게 넘어버리면 절대 개선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청소년의 자살이 급증하는 추세도 가벼이 넘겨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명인의 자살이나 나쁜 뉴스를 자주 접해 모방 충동에 따른 베르테르효과가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청소년 자살이나 왕따 문제를 해결하려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와 가정환경이 중요해요. 저도 데뷔 후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는데 마침 그때 힘든 일이 몰려서 지치고 괴로웠는데 최악으로 힘들 때 누나가 함께 살자고 손을 내밀어줬고 종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활력을 되찾았죠. 가족과 살면서 대화를 많이 하는 게 굉장히 큰 힘이 되더라고요. 힘든 일이 생기면 혼자 삭이지 말고 넋두리 수준으로라도 털어놓으면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진 않아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순 있지요.” 

▼ 학창 시절에 창구가 있었나요? 

“그땐 없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집안의 어려움 같은 속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어요. 그냥 노는 데 심취해 있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고, 막내여서 규제가 덜하다 보니 자유 속에서 방황했어요. 철이 없었죠.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아요. 학생 때는 학생다워야 하지만 어른 흉내를 내던 그 시절이 마냥 쓸모없는 시간만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놀아도 보고 싸워도 봐서 철이 더 일찍 들었어요. 저처럼 부모가 너무 풀어줘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지금의 부모들처럼 아이에게 공부만을 강요하며 옥죄는 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중간 지점을 찾는 게 중요한데 대화만큼 좋은 방법이 없죠. 대화의 창구가 열리면 아이들 스스로 배려와 양보, 이해와 타협을 배울 수 있어요. 뭐든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학교폭력 예방도 강요보다는 자율에 무게중심을 둬야 할 거라고 봐요.” 

| 영등포공고의 ‘골목대장’ 황승환 


2000년대 초반 KBS ‘개그콘서트’에 출연하며 ‘황마담’으로 유명세를 탄 개그맨 황승환(41·본명 오승훈)도 영등포공고 시절 짱으로 불렸다.


 3월 7일 오후 2시, 서울 동작구 흑석동 원음방송에서 방송 진행을 막 끝낸 그를 만났다. 


그는 현재 웨딩컨설팅회사를 운영하면서 이 방송의 인기 라디오프로그램인 ‘황승환의 엔돌핀 충전’을 6년째 진행하고 있다.

“청취자가 올린 글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소통하는 게 우리 프로그램의 묘미죠. 중고교생 자녀를 둔 애청자가 많아 아이들 문제로 고민하는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해요. 근데 좀 놀란 게 학교 가는 걸 겁내는 아이가 많은가 봐요. 우리 땐 학년이 하나 올라가면 새 친구를 만날 기쁨에 설레곤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개학하는 걸 두려워 한대요. 그런 사연 보면 몹시 안타까워요.” 

▼ 학교 다닐 때 주먹 좀 쓰셨다면서요. 

“맞고 다니진 않았어요. 저희 때가 2차 베이비붐 세대라서 한 반 학생이 70명 가까이 됐어요. 
아이들이 하도 많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공부하던 시절이죠. 

당시엔 왕따가 없었어요. 마포에 있는 중학교를 나왔는데 아이들끼리 뭉쳐 다니며 한강에서 수영하고 여의도에서 스케이트 타고 그랬어요. 

끼리끼리 노는 문화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한 사람을 따돌려 고립시키거나 지속적으로 괴롭히진 않았어요.” 

▼ 좀 놀았나요? 

“골목대장 하고 그랬죠. 1980년대에 영등포공고라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학교에선 일명 깡패소탕작전을 자주 했어요. 

선배가 지갑을 뺏겼다는 소식이 퍼지면 범인 잡으러 다니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학교 친구를 다른 학교 애들이 건드리면 뭉쳐서 싸우고 그랬어요. 
의리가 있었어요. 당시에는 영등포에 있는 디스코텍에 다니면서 노는 게 재밌었어요. 기계과였는데 자격증을 남보다 일찍 따서 놀러 다닐 시간이 많았어요. 공고 학생은 자격증 따는 게 가장 큰 목표거든요. 그때 제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방을 들어주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아이들 도시락 반찬을 뺏어 먹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성이 ‘황’가다 보니 늘 맨 뒷자리에 앉아서 공부는 안 했어요. 대신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었죠. 선생님께 대든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선생님이 학교 선배인 경우가 많아서 항상 깍듯했어요. 선생님한테 함부로 대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왕따 취급을 받았죠.” 

▼ 불량서클에 가입한 적도 있나요? 

“있죠.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에게 차출돼 호된 신고식을 치렀어요. 불러다 놓고 마구 때리더라고요.” 

▼ 당시 선생님들은 불량학생을 어떤 식으로 지도했나요? 

“제자가 잘못된 길로 가는 걸 가만두고 보지 않았죠. 두들겨 패서라도 바른 길로 이끌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어요. 요즘은 선생님의 권한이 너무 약해져서 선생님이 오히려 아이들을 무서워하는 시대니 말 다했죠. 그땐 영어 과외나 사교육을 시키는 집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과도한 경쟁구도에 내몰린 데다, 자녀를 적게 낳다 보니 자기 아이밖에 모르는 부모가 많은 게 문제예요. 저희 아이는 세 살, 일곱 살인데 딸을 키우는 아빠로서 성범죄가 빈발하는 게 몹시 걱정되긴 해요. 사내아이는 오히려 좀 맞으면서 컸으면 싶고요. 요즘 아이들은 형제가 적어서 위계질서라는 걸 모르고 크죠. 전 학창 시절에 선생님한테 쇠파이프로 맞고 나서도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드렸어요. 그게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아니까요. 술, 담배나 싸움하는 걸 바로잡아주고자 때리신 거니까요. 요즘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어선지 동영상 올라온 걸 보면 참 가관이더라고요. 선생님을 치고 희롱하는 걸 보니 기가 차더라고요. 다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이렇게 된 거예요.” 

▼ 폭력성이 왜 이리 잔인해졌을까요? 

“미디어가 부추긴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넷, 뉴스, 방송에 학교폭력 사건이 여과 없이 나오니까요. 아이들은 모방심리가 강해요. 다른 학교에서 한다니 우리도 해보자, 그런 심리죠. 매체에서 적절히 걸러 보도해야지, 지금처럼 학교폭력 사건이 상세히 보도되는 건 문제를 확산시킬 뿐이에요.” 

▼ 경찰 개입이 학교폭력 예방에 도움이 될까요? 

“학교 문제를 공권력을 동원해 해결하자는 발상 자체가 문제예요. 제가 어릴 때는 태권도 같은 운동을 배우면서 위계질서와 효의 중요성을 배웠는데 요즘 아이들은 등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다른 친구와 성적을 비교하며 자식의 능력을 평가하는 가정교육에 길들어 있어서죠.” 

▼ 위기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교육은 무엇일까요? 

“건전한 취미생활이나 단체생활을 경험하게 해야 해요. 무엇보다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하고요. 근데 생활 속 인성교육은 부모의 몫이에요. 예전엔 선생님한테 혼났다고 부모한테 이르면 더 혼나는 게 일반적이었죠. 요즘은 선생님이 체벌하면 부모가 난리쳐요. 전 반공 교육을 받던 세대이니 격세지감을 느끼죠. 국·영·수 점수로 경쟁시키고 사교육으로만 내몰리니 아이들이 악해지는 거고, 나보다 못한 친구를 괴롭히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예요.” 

▼ 사제 간에 정이 없는 것도 문제 아닌가요? 

“문제죠. 요즘에는 ‘완득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선생님처럼 무뚝뚝하지만 애정을 갖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그러니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할 수밖에 없죠. 저도 퇴학당할 뻔했는데 선생님이 막아주셨어요. 책임지고 절 똑바로 가르치겠다는 조건을 달아서요. 제가 지금도 무척 존경하는 분인데 요즘 아이들한테 물어봐도 존경하는 선생님이 없다고 하더군요. 아이들도 불쌍하고 선생님들도 불쌍하죠. 부모들 책임이에요, 저를 포함해서. 이젠 부모가 바뀌어야 해요.” 

▼ 자녀를 어떻게 키울 건가요? 

“무엇보다 자립심을 키워주고 싶어요. 용돈도 스스로 벌어 쓰고 사회에 나가서도 당당히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건 잘못됐다고 봐요.”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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