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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건 조회 1,988회 작성일 2012-05-14 11:12
25년의 경험, 최고의 중국전문가,박근태(64회) CJ CHINA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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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 현장증언> 25년의 경험, 최고의 중국전문가

기사입력 2012-01-10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1984년 1월, 새해가 밝았지만 30세의 박근태 대리는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았다. 

종합상사인 대우실업(대우인터내셔널의 전신)에 입사해 4년을 일하면서 미국근무를 세번이나 신청했지만 번번이 탈락해서였다. 

보통 두 번 연속 미역국을 먹는 경우는 있어도 세번씩이나 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그의 실적은 사회초년병이었음에도 빼어났다. 

풀이 죽어 있던 그에게 당시 담당부장이 “홍콩에 주재원 자리가 하나 났는데 홍콩에서 근무해 볼 생각은 없는가”라고 물어왔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박근태 대리는 그 자리에서 “홍콩이라도 가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 해 3월16일 홍콩 카이탁공항(지금은 폐쇄됐음)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오후 3시쯤 카이탁공항을 나서자 덥고 습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숙소인 프라마호텔로 가는 택시안에서 바라보는 홍콩의 거리는 회색건물 투성이였으며 가는 곳마다 홍콩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여장을 풀고 그날 저녁 회사 선배가 챙겨준 조촐한 저녁식사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광둥(廣東)식 비둘기요리였다. 

한 입 먹고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25년동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국통 비즈니스맨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CJ 중국본사 박근태 대표가 맞은 중국에서의 첫날이었다.





◆청춘을 중국사업에 바치다

당시 홍콩은 중국 본토 국유기업들의 무역 전진기지였다. 

박근태 대표의 임무는 중국 기업들로부터 오더를 따내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의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 넘어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청년 박근태에게 주말이란 아예 없었다. 

어떤 날은 조찬미팅을 끝내고 오전에 3건의 바이어미팅을 한 후 점심미팅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본국과 바삐 연락을 해 물량과 가격을 조정한 후 오후에 4건의 바이어미팅을 하고 저녁 술자리 미팅까지 해야 했다. 


홍콩에 온지 1년이 지나자 영어에만 의지하는 소통이 불편해졌다. 

개인교사를 구해 일주일에 3회 3시간씩 6개월동안 베이징 보통화를 배웠다. 

박 대표는 “당시 배운 중국어실력으로 아직도 중국인들과 소통하고, 중국 고위관료들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한국손님들에게 통역을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어에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그는 직접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영업에 뛰어들었다. 

중국 최대 금속ㆍ광물업체인 우쾅(五鑛)그룹 민메탈 홍콩법인으로부터 오더를 따낸 일화는 아직도 업계에 전설로 남아있다.

1986년 봄 그는 민메탈의 홍콩법인 회장실을 아침 일찍 찾아갔다. 

특유의 붙임성으로 건물경비들은 물론 회장실 비서들과 안면을 터놓은 후 새벽같이 회장실 앞 쇼파에 앉아있다가 민메탈의 회장이 오면 ‘자오상하오(早上好, 중국의 아침인사)’라며 큰소리로 꾸벅 인사하고 몇마디를 건네고 나오는 식이었다. 

문전박대도 당하고, 회장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일주일에 세번씩 민메탈 회장실을 꾸준히 찾았다. 

6개월이 지나자 민메탈의 회장이 박대표를 따로 불렀다. 

캔의 원료인 틴플레이트 50t을 한국으로부터 구매할테니 브라질산 가격에 맞춰달라는 것이었다. 

이익이 얼마 남지 않을 계약이었지만 박대표는 제조상을 설득해 수출계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민메탈의 회장은 박대표를 신임하게 됐고 수차례의 대형계약이 박대표의 손을 거쳐 체결되게 됐다. 



◆눈부신 나날들




톈안먼사태가 일어난 다음날인 1989년6월5일, 그는 홍콩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1992년 한중수교가 체결됐고 중국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박대표의 중국 네트워크와 중국 경험의 가치 역시 급등하게 됐다. 

그는 수교 이듬해인 1993년3월 ㈜대우 베이징지사 철강부 부장으로 베이징 땅을 밟는다. 

이후 그는 현재까지 줄곧 중국 곳곳을 누비며 우리나라 수출전선의 최일선에 서게 된다.

그가 홍콩에서 맺은 중국 본토 인맥들은 그의 막강한 자산이었다. 

특히 중국석유물자공사와의 인연은 그에게 무려 3000만달러짜리 계약의 짜릿함을 맛보게 했다. 

2001년 석유물자공사는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상하이까지 운송하기 위한 파이프라인 건설(서기동수, 西氣東輸)에 소요될 강관 원재재 입찰을 내걸었다. 

당시 이사직급으로 철강팀을 지휘하고 있던 박근태 대표는 입찰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접하게 됐으며 입찰조건이나 상세내용에 대해서도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무려 3000만달러에 달하는 계약이었기에 그는 업계에서 유명세를 탔다. 

게다가 당시 굵직한 공급계약은 박 대표의 독차지였다. 

경쟁사들의 서울본사는 각자의 베이징사무소에 “박근태라는 인물이 어떻게 하길래 대형 계약을 싹쓸이 하는지 리포트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종합상사 업계의 스타였던 박 대표는 2006년 CJ그룹 중국본사 대표이사로 영입된다. 



◆CJ그룹 중국사업의 선장



CJ그룹은 그룹의 4대 핵심사업인 식품외식, 생명공학, 유통(홈쇼핑/물류), E&M(엔터테인먼트)을 모두 중국에 진출시켜 놓은 상태다.

 2005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중국사업을 시작한 CJ는 2006년 박근태 대표를 선장으로 맞이하면서 양적 질적 성장을 꾀하게 됐다. 

2007년 32억위안이었던 중국내 매출액은 2011년 104억위안(한화 약 1조9000억원)을 기록해 3배 이상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현재 CJ는 중국내에 41개 법인, 19개 공장, 20개 사무소에 걸쳐 8400명의 현지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올해에는 라이신과 헥산 공장 등 생명공학 분야에서의 대대적인 증설이 예정돼 있으며, CGV는 중국시장 진출도 가속을 낸다는 방침이다. 

현재 9개 있는 중국내 사료공장도 매년 2~3개 이상씩 확장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박 대표는 “CJ가 제2의 창업을 선언한 중국에서 사업 확대에 전력을 다할 각오”라며 “건강함과 즐거움, 그리고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CJ 문화의 요체가 중국에도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박근태 대표 주요약력 

▲1954년 출생 

▲중앙고등학교 


▲연세대 역사학과 

▲1980년 대우실업 입사 

▲1984년 대우 홍콩지사 과장 


▲1993년 대우 베이징지사 부장 

▲1996년 대우 광저우지사 대표 

▲1998년 대우인터내셔날 상하이(上海)지사 대표 

▲2004년 대우 중국유한회사 총재 

▲2006년 CJ그룹 중국본사 대표이사 

 

토스카니에 듣는 한류 마케팅


  • 왼쪽부터 올리비에로토스카니, 왕즈러中상무부연구원, 박근태CJ중국대표, 조원홍현대차전무

올리비에로 토스카니는 천재일까요, 아니면 광고의 속성을 잘 이용한 장사꾼일까요?

신부와 수녀의 키스, 형형색색의 콘돔, 흑인 엄마의 젖을 먹는 백인 신생아 등의 광고를 기억하십니까? 

베네통의 광고책임자였던 토스카니는 광고라는 수단에 사회적 이슈를 덧붙이면서 패션기업 베네통의 이미지를 탄생시켰습니다. 

지난 2000년 26명의 사형수를 모델로 한 '거친 죽음'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베네통을 떠난 토스카니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이미지를 상품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서울포럼 2012'의 둘째날인 오는 16일 토스카니가 강연자로 나섭니다. '한국의 마케팅과 광고의 진화(The evolution of Korean marketing and advertising)'를 주제로 글로벌 마케팅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어떻게 포장할지 들려줄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한류(韓流)가 대한민국의 가치(Korean values)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5월16~17일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리는 서울포럼 2012에서는 토스카니가 베네통을 떠난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토스카니의 사진과 광고에 열광하는 이유와 토스카니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포럼 2012에서는 '한류, 글로벌 경제를 품다:경제ㆍ금융, 산업, 문화'를 주제로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와 발전방향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토론이 펼쳐집니다.

아울러 왕즈러(王志樂) 중국 상무부 연구원과 중국시장 개척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박근태 CJ중국 대표가 참석해 중국 내 기업한류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또 조원홍 현대자동차 마케팅 담당 전무가 현대차의 글로벌 마케팅 전략을 말합니다. 현대차는 최근 '리브 브릴리언트(Live Brilliantㆍ자동차 안에 빛나는 인생이 있다)'를 내세워 품질에서 가치창출로 브랜드 전략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또 정경원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이문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등 국내 브랜드 전략과 디자인 등의 전문가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가치로서 한류의 미래를 제시합니다.

◇ 날짜=5월16(수)~17일(목)

◇ 장소=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



[서울포럼 2012 D-2] 중국 진출 한국기업의 성공 비결 밝힌다

'기업한류' 세션 발표 박근태 CJ중국 대표·왕즈러 中상무부 주임연구원
입력시간 : 2012.05.13

  • 왕즈러 주임연구원

 

박근태 CJ중국 대표는 한국 기업인 가운데 손꼽히는 중국통이다. 

25년간의 중국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중국사업 노하우는 불과 2년 만에 CJ를 중국 내 대표적인 식품기업으로 자리잡게 했다.

'서울포럼 2012'의 둘째날인 17일 박 대표는 중국 내 한류기업의 성공과 과제에 대해
발표한다. 

누구보다 중국을 잘 알고 있는 박 대표는 한류를 등에 업고 중국으로 진출하는 한국기업의 성공 진출전략과 함께 위험요인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중앙고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우그룹에 입사한 후 철강무역을 주로 담당한 해외무역 전문가다. 

지난 1980~1998년 ㈜대우 무역 부문에서 근무했으며 1999~2003년 대우인터내셔널 상하이지사장, 2004~2005년 대우인터내셔널 베이징지사장을 역임했다.

박 대표를 기억하는 기업인들은 그를 대우 중국맨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대우맨으로 중국에서 박 대표의 성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투
중국어'의 달인으로도 알려진 박 대표는 '관시(關系)'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두루두루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1993년 박 대표와 알게 된 중국 석유부의 한 관리는 10년이 지난 뒤 대규모 가스관 공사의
입찰 정보를 알려줬고, 결국 이 공사에 들어가는 철강 30만톤을 한국기업이 수주하는 데 박 대표는 큰 역할을 했다.

2005년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한 CJ는 2006년 박 대표를 맞이한 후 양적ㆍ질적
성장을 이룬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2007년 37억위안이던 중국 내 매출은 2011년 104억위안으로 3배 이상 늘었다. CJ는 현재 중국 내 41개 법인, 19개
공장, 20개 사무소에 8,400명의 현지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왕즈러(王志樂) 중국 상무부 주임연구원은 한류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 짓는 요인으로 '현지화'를 말한다. 

과거보다는 한국기업의 중국투자 진출에서 내수시장을 겨냥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중국의 저임 노동력을 활용해 제3국으로
수출하려는 전략은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왕 연구원도 서울포럼 이튿날인 17일 중국에서 한국기업의 투자와
브랜드 전략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중국 인민대에서 세계 근현대 경제사를 전공한 왕 연구원은 1990년대 초부터 다국적기업의
글로벌 전략 등 대규모 기업 경영 연구에 집중하며 중국 내 투자 부문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다. 

국가산업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유엔 세계협약 제10원칙 실무위원, 베이징 신세기 다국적
기업 연구소장을 맡았다.

왕 연구원은 우리
중소기업의 중국진출 전략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같은 중소기업이라도 미국과 유럽 기업들은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내수시장 개척에 주력하는 반면에 한국과 일본 기업들은 중국을 단지 노동력을 이용하는 생산 하청기지로 활용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한다.

왕 연구원은 2010년부터 다국적기업의 중국투자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기업들도 이미 다국적기업의 성격이 강하다고도 말한다. 

왕 연구원이 지적하는 다국적기업의 대중국 투자 신조류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제조업 투자의 조정 ▦연구개발 투자 확대 

▦지식집약형 서비스 투자 확대 ▦민간기업과의 협력 강화 

▦중국기업의 인수
합병 등이다. 

왕 연구원은 중국의 위상에 대해 "현재 중국은 이미 다국적기업의 생산제조센터로 부상했지만 아직 다국적기업의
연구개발센터, 글로벌 경영관리운영센터로는 자리잡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글로벌 경제와 무역에 대해서도 해박한 왕 연구원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한다. 

왕 연구원은 "한국 대기업의 중국에서의 성공적인 투자가 증명하듯 한국과의 협력이 중국 국제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과 긴밀한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ㆍ발전 시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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