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권오훈(66회) 외환은행 외환.상품 본부장
본문
윤용로, 외환銀 임원 9명 전원 해임
기사입력 2012-02-28
행장 취임후 첫 인사
하나금융과 인적교류 확대
외환은행은 27일 하나금융지주에 편입된 이후 처음 실시한 인사에서 기존 임원 9명 전원을 해임하고 하나금융과의 인적 교류를 대폭 확대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22일 취임한 윤용로 외환은행장(사진)의 첫 인사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날 외환은행은 박제용 수석부행장을 비롯해 윤종호 이상돈 박용덕 부행장,
이날 외환은행은 박제용 수석부행장을 비롯해 윤종호 이상돈 박용덕 부행장,
김지원 정수천 변동희 이상철 구수린 부행장보 등 임원 9명의 일괄 사표를 수리했다.
또 기존 14본부, 8관리 및 지원본부, 17영업본부이던 외환은행의 조직을 8그룹, 9본부,
19영업본부로 개편했다.
이번 인사로 그룹장이 된 8명이 과거 부행장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인사로 그룹장이 된 8명이 과거 부행장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대기업사업그룹장은 윤 행장의 복심(腹心)으로 알려진
장명기 전 외환은행 수석부행장이 맡았다.
8명의 그룹장은 다음 달 13일 외환은행 임시 주주총회에서 정식 그룹장으로 선임된다.
특히 외환은행은 강점인 해외영업의 경쟁력을 하나금융 안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특히 외환은행은 강점인 해외영업의 경쟁력을 하나금융 안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방기석 외환은행 본부장을 하나금융 글로벌전략실장으로 파견했다.
또 하나은행의 강점인 개인금융과 프라이빗뱅킹(PB) 업무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최임걸 전 하나은행 부행장을 외환은행 개인사업그룹장으로 영입하고
PB영업 전문가인 권준일 전 하나은행 부행장보를 외환은행 PB본부장으로 배치했다.
금융지주 차원의 효율적인 경영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전략기획 능력을 보유한
금융지주 차원의 효율적인 경영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전략기획 능력을 보유한
직원들의 교류도 실시했다.
주재중 외환은행 동경지점장이 하나금융 전략기획담당 본부장으로,
배현기 하나금융 전략기획담당 본부장은 외환은행 전략본부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이종욱 외환은행 여의도지점장은 하나금융 리스크담당 본부장으로 갔고
이우공 하나금융 리스크관리 담당 부사장이 외환은행 리스크그룹장으로 임용됐다.
▽그룹장
▽그룹장
△기업사업 김한조
△해외사업 신현승
△여신 정정희
△경영지원 유재후
△기획관리 곽철승
▽본부장
△자본시장 이재학
△신탁 김승권
△외환·상품 권오훈(66회)
△영업지원 이창규
△IT 김경수
△카드 권혁승
▽하나금융지주 파견
△IT Liaison Officer 김배환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긴 산통 끝에 윤용로 외환은행장(57) 시대가 열렸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CEO lounge]
노조와 대타협 이끈 `윤용로` 신임 외환은행장…
하나금융과 화학적 결합이 최대 과제
1955년생/ 중앙고/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1977년 제21회 행정고시/
재정경제부 관세협력과장, 소비세제과장, 외화자금과장, 은행제도과장/
2007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2007년 12월 기업은행장/
2012년 2월 제24대 외환은행장(현)
긴 산통 끝에 윤용로 외환은행장(57) 시대가 열렸다.
노조의 거센 반발을 잘 수습하고 2월 20일 첫 출근을 한 데 이어 22일에는 취임식도 가졌다.
취임사에서 “힘을 합쳐 외환은행의 재도약을 이뤄내자”고 다짐한 윤 행장은 이제 금융인 2라운드 인생을 펼치게 됐다.
‘말년에 활짝 꽃이 핀’ 윤 행장이 과연 어떻게 외환은행의 재도약을 이뤄낼 것인가 금융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다.
1955년생으로 충남 예산 출신인 윤 행장은 중앙고와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후 1977년 행정고시 21회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955년생으로 충남 예산 출신인 윤 행장은 중앙고와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후 1977년 행정고시 21회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관가에서는 ‘17회→21회→27회 순으로 뛴다’는 얘기가 있다.
21기에 그만큼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
한상률 전 국세청장,
허종구 전 조세심판원장,
한상률 전 국세청장,
허종구 전 조세심판원장,
정만원 (중앙고 61회) SK그룹 부회장,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
권태균(중앙중 62회) 전 조달청장,
노준형 전 정보통신부 장관,
석호익 전 KT 부회장,
유영환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석호익 전 KT 부회장,
유영환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등이 모두 행시 21회 출신이다.
수석 합격뿐 아니라 행정고시 성적과 연수원 성적을
합산한 종합성적도 1위였다.
주경야독 야간대 학력으로 행시에 합격하기까지 무려 8개의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시험선수’라 불렸던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종합성적 2위였으니, 1위 윤용로 행장 실력이 어느 정도였을지 바로 가늠해볼 수 있다.
당시 종합성적 상위 5명에게는 원하는 부서에 갈 수 있는 ‘부서 선택권’이 주어졌다.
당시 종합성적 상위 5명에게는 원하는 부서에 갈 수 있는 ‘부서 선택권’이 주어졌다.
윤 행장은 당연히 최고 부서로 꼽혔던 재무부를 희망했다.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재무부에 입성했지만, 윤 행장은 재무부에서 그다지 잘나가는 공무원은 아니었다.
윤 행장의 인생항로를 잘 알고 있는 한 관계자는 “경기고-서울대 라인이 꽉 잡고 있는 관가에서 소위 SKY대도 아니고 전공이 경제, 경영, 심지어 법학도 아닌 영어학과 출신 윤 행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귀띔한다.
꾸준히 재무부와 재무부가 이름을 바꾼 재정경제부에서 경력을 쌓다 2002년 금융위원회 전신인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금감원)로 자리를 옮겼다.
꾸준히 재무부와 재무부가 이름을 바꾼 재정경제부에서 경력을 쌓다 2002년 금융위원회 전신인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금감원)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이야 금감위 위세가 대단하지만, 당시만 해도 금융감독위원회는 관료들이 그다지 선호하던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재경부 관료들은 수하처럼 부리던 금융감독위원회에 가는 걸 꺼렸다.
그나마 한때 비서관으로 일했던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과의 인연 덕분에 자리를 얻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새옹지마일까.
새옹지마일까.
윤용로 행장 인생은 오히려 이때부터 빛이 나기 시작한다.
국장으로 오자마자 윤 행장은 금융감독위원회 직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
금융감독위원회 내에서 윤 행장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노무현 사람’ 꼬리표
금융감독위원회에서의 경력은 기업은행장으로 오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금융감독위원회 내에서 윤 행장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노무현 사람’ 꼬리표
금융감독위원회에서의 경력은 기업은행장으로 오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윤 행장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감독정책2국장을 하던 시절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윤용로 감독정책2국장을 이어준 연결고리는 수협.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수협을 직접적으로 관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윤 행장이 수협 부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후문이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수협을 직접적으로 관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윤 행장이 수협 부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은 김진표 전 부총리, 박봉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함께 윤용로 행장을 ‘일 잘하는 관료 3인방’이라 불렀다.
기업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연임에 성공했던 故 강권석 전 기업은행장이 연임 후 1년도 채 안 돼 갑작스럽게 작고한 2007년 말, 후임 기업은행장을 찾는 시점에서 윤용로 행장이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기업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연임에 성공했던 故 강권석 전 기업은행장이 연임 후 1년도 채 안 돼 갑작스럽게 작고한 2007년 말, 후임 기업은행장을 찾는 시점에서 윤용로 행장이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일 잘하는 윤용로 씨가 어떠냐”고 추천하면서 2007년 2월 금감위 부위원장이 된 윤 행장은 1년도 채 안 돼 그렇게 일약 기업은행장이 됐다.
그러나 2007년 말은 이미 노 전 대통령 임기 말기.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윤 행장을 기업은행장으로 이끌었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내내 윤 행장을 옥죄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2008년 2월 업무를 시작한 이명박 정부는 금융공기업 기관장과 감사 재신임 작업에 들어간다.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윤 행장을 기업은행장으로 이끌었지만, 이후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는 내내 윤 행장을 옥죄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2008년 2월 업무를 시작한 이명박 정부는 금융공기업 기관장과 감사 재신임 작업에 들어간다.
이때 윤용로 행장은 예금보험공사 사장,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사장, 서울보증보험 사장과 함께 재신임을 받는 데 성공했다.
산업은행 총재, 한국수출입은행과 우리은행 행장은 모두 갈리는 가운데 은행장으로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윤 행장은 이명박 정권과 별다른 끈이 없었지만, 눈에 띄는 비리도 문제점도 없다는 점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신임은 받았지만 ‘노무현 사람’이라는 꼬리표는 떼어지지 않았다.
윤 행장이 유독 이명박 정부와의 ‘코드 맞추기’에 신경 쓴 뒤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는 데 금융가 사람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실제 윤 행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후 정부가 독려한 중소기업 대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실제 윤 행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후 정부가 독려한 중소기업 대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기업은행의 성격 자체가 시중은행에 비해 중소기업 대출에 특화된 은행이긴 하나, 기존의 역할을 넘어 정성을 다했다.
타 은행들이 리스크를 줄인다며 몸을 사린 것과 정반대 양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은행권은 중소기업 대출을 줄줄이 줄이거나 회수했다.
돈줄이 마른 중소기업들이 발을 동동 굴렀을 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곳이 기업은행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대출을 무려 10조원이나 늘렸다.
그뿐인가. 이명박 정부가 대표 업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공들인 ‘청년 일자리 만들기’에도 앞장섰다.
그뿐인가. 이명박 정부가 대표 업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공들인 ‘청년 일자리 만들기’에도 앞장섰다.
2009년 2월 잡월드(www.ibkjob.co.kr)라는 사이트를 열고 ‘청년 취업 1만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잡월드에 우수 중소기업 9000여개를 추천하고 일자리를 찾는 청년을 연결해주는 일.
100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해 중소기업 채용 장려금으로 지원도 했다.
덕분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3만여개 일자리가 매칭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에 정석적으로 대응하라는 정부 지침도 충실하게 따랐다.
노조에 정석적으로 대응하라는 정부 지침도 충실하게 따랐다.
때문에 윤 행장은 기업은행장으로 일하는 내내 노조와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는 중평이다.
정부와 코드 맞추기 식 업무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정부와 코드 맞추기 식 업무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윤 행장은 기업은행의 제2전성기를 만들어낸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윤 행장 재임 기간 동안 기업은행 자산은 124조3000억원에서 170조원으로 급증했다.
2009년에는 기업은행이 하나은행을 밀치고 은행권 빅4(자산 기준)로 올라서기도 했다.
덩치만 키운 게 아니다.
윤 행장이 기업은행장으로 일한 마지막 해였던 2010년 기업은행 순이익은 1조2901억원으로 하나은행(9851억원)을 압도했다.
기업은행장 때 ‘빅4 은행’ 만들어
전방위적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윤 행장은 기업은행장 연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윤 행장이 기업은행장으로 일한 마지막 해였던 2010년 기업은행 순이익은 1조2901억원으로 하나은행(9851억원)을 압도했다.
기업은행장 때 ‘빅4 은행’ 만들어
전방위적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윤 행장은 기업은행장 연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금융가에서는 기업은행의 금융지주화, 민영화 등 큰 과제를 앞둔 만큼 윤 행장이 연임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결국 연임하지 못하고 2010년 말 기업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나 쓸쓸히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연임설과 별도로 때마다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후보 하마평에 오르내렸지만 역시 그 어떤 자리와도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랬던 윤 행장이 2011년 3월 금융가에 화려하게 돌아왔다.
그랬던 윤 행장이 2011년 3월 금융가에 화려하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라이벌 금융사였던 하나금융지주라는 민간금융사 배경을 뒤에 업었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하나금융지주 식구가 될 외환은행 수장으로 윤용로 행장을 선택했다.
정부 내정에 따른 낙하산이 아닌, 실력을 바탕으로 위풍당당 ‘귀환’한 셈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의 우여곡절과 마음고생 끝에 이제 드디어 외환은행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금융인으로서의 절정기를 맞은 윤용로 행장이지만, 어깨에 짊어진 과제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금융인으로서의 절정기를 맞은 윤용로 행장이지만, 어깨에 짊어진 과제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외환은행과 하나금융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고, 론스타 논란을 거치는 동안 많이 위축된 외환은행의 경쟁력과 고꾸라진 이미지를 되살려야 하는 등 할 일이 산더미다.
한편 윤용로 행장을 공격하는 측에서 가장 많이 들먹이는 스토리는 ‘압구정동 미꾸라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증권가 큰손 윤강로 KR선물 회장이다.
한편 윤용로 행장을 공격하는 측에서 가장 많이 들먹이는 스토리는 ‘압구정동 미꾸라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증권가 큰손 윤강로 KR선물 회장이다.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를 졸업하고 서울은행 증권부에서 일한 윤강로 씨는 8000만원의 종잣돈으로 선물투자를 해 1300억원을 번, 전설적인 투자자. 2004년 한국선물을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딴 KR선물로 이름을 바꾸고 회장이 됐다.
윤용로 행장 친동생인 윤강로 회장은 형 윤용로 행장이 금융가로 복귀한 시점인 지난해 3월, 사기혐의로 피소됐다.
‘투자를 하면 미국에 있는 투자회사를 통해 미국 증권선물거래를 해 많은 이익을 남겨주겠다’고 해 투자를 했는데 원금도 못 돌려받았다는 투자자가 속출했다.
▲ 윤용로 외환은행장(왼쪽 세 번째)과 김기철 외환은행 노조위원장(왼쪽 첫 번째)이 28일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 685-7 크리스탈타워 내 외환은행 양산지점 이전식에서 내외빈 축하객들과 이전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이뉴스투데이 = 문지훈 기자] 외환은행은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위치한 양산지점을 중부동으로 이전해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간다고 28일 밝혔다.
외환은행은 양산지점 이전에 대해 “점포 경쟁력 강화와 지역 밀착형 영업기반 확대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산지점은 기업 및 개인금융을 취급하는 복합형 점포로 양산, 어곡 등 일반산업단지 내 입주 기업체 및 임직원과 인근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번에 이전한 양산지점은 중부동 685-7 크리스탈타워 1층과 2층에 위치해 있다.
한편 이날 이전식에는 윤용로 외환은행장을 비롯해 은행관계자들과 거래업체 대표 및 개인고객 대표 등이 참석했다.
취임 후 첫 영업점 공식 행사를 가진 윤 행장은 “외국환, 기업금융, 개인금융 등 모든 금융 서비스 부문에서 양질의 서비스 제공으로 고객과 은행이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뉴스투데이 = 문지훈 기자] 외환은행은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 위치한 양산지점을 중부동으로 이전해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간다고 28일 밝혔다.
외환은행은 양산지점 이전에 대해 “점포 경쟁력 강화와 지역 밀착형 영업기반 확대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산지점은 기업 및 개인금융을 취급하는 복합형 점포로 양산, 어곡 등 일반산업단지 내 입주 기업체 및 임직원과 인근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번에 이전한 양산지점은 중부동 685-7 크리스탈타워 1층과 2층에 위치해 있다.
한편 이날 이전식에는 윤용로 외환은행장을 비롯해 은행관계자들과 거래업체 대표 및 개인고객 대표 등이 참석했다.
취임 후 첫 영업점 공식 행사를 가진 윤 행장은 “외국환, 기업금융, 개인금융 등 모든 금융 서비스 부문에서 양질의 서비스 제공으로 고객과 은행이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