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Why] [김윤덕의 사람人]
산부인과 의사서 보험회사 리더로
…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입력 : 2012.03.03
의사는 전직(前職), 보험은 천직(天職)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는 고은의 시구가 서울 교보생명 사옥 '광화문 글판'에 내걸린 건 IMF 외환위기 한파가 불어닥친 직후였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라는 시인의 선언에 사람들은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 신창재(59) 교보생명 회장도 그 중 한 사람이다.
2000년 5월,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교보생명을 회생시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때. "아버님(창업주 신용호)은 병석에 계시죠, 거래하던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며 회사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는데, 산부인과 의사 하다 경영 일선으로 불려온 나에겐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어요. 그때 고은 선생의 시구가 제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국내 보험업계에서 신창재 회장은 '이단아'로 통한다.
1996년 교보생명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서울대 병원 산부인과 교수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 5월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을 때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았다.
창업주의 장남이지만 '보험쟁이'가 아니었다.
보험을 수술하는 남자
부도설 돌던 아버지의 회사 산부인과 의사, 가운을 벗었다
수술칼 대신 든 '혁신의 칼'… 그는 이제 선친 앞에 당당하다
의술과 보험은 통하더라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것
… 유럽 건강보험회사 CEO는 대부분 의사 출신이 많다
업계 이단아, 도전은 계속된다
취임 초반, '나쁜 성장'의 악순환을 끊겠다며 혁신의 칼을 들었을 땐 "산부인과 의사가 회사를 망가뜨린다"며 반발이 거셌다.
그로부터 10여년. 부도설까지 나돌던 교보생명은 2008회계연도 2916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며 생명보험업계 1위 자리에 올랐다.
2000년 25조원이던 총자산은 2011년 60조원을 돌파했다.
투자성 보험이 아닌 중장기 보장성 보험, 과잉판매가 아닌 완전판매에 집중하는 등 업계의 관행을 거스르면서 이룩한 성취라 돋보였다.
서울시 종로 1번지, 교보생명 사옥에서 신 회장을 만났다.
'닥터 인슈어런스'라는 별명을 지닌 신 회장은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다.
"회장실이 왜 전망 좋은 초고층(교보빌딩은 지상 22층이다)이 아니고 3층에 있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지진이 나면 빨리 도망칠 수 있잖아요.(웃음)"
◇나는 'CEO 담당 회장'
―시간을 10분 단위로 쪼개 쓴다더니, 회의실마다 시계가 여러 개 설치돼 있다.
"소문이 그렇게 난 모양인데 거짓말이다.(웃음) 10분 단위로 쪼개서 쓴다는 건 과장이고, 일정이 빡빡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CEO의 시간 관리는 굉장히 중요하다. 1주일에 24시간을 곱한 뒤 잠자는 데 얼마, 골프 치는 데 얼마, 술 마시는 데 얼마, 차 막히면 늦어지는 시간까지 다 계산해서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7년 전부터 골프는 안 친다. 한번 나가면 9시간, 10시간이 걸리니까. 2시간 운동하고 남은 7시간은 다른 일에 활용하는 게 남는 장사다.(웃음)"
―회사 오너이면서 CEO다. 명함에 체어맨(Chairman) 겸 'CEO'라고 적혀 있더라.
"미국식으로 하면 회장과 사장을 같이 하는 셈이다. (오너라는 생각보다) 내게 주어진 CEO의 역할, CEO라는 배역을 무대 위에 있는 동안 잘 해내려고 한다. CEO는 권력, 권세가 아니라 정책결정을 책임지는 조직의 일원이다. 기업은 연극무대와도 같다. 나를 비롯해 각각의 담당 배역들이 자기 역할을 최고로 잘해줘야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
―전문경영인을 두면 몸이 편하실 텐데.
"힘들지만 보람 있다. 고생은 엄청 하지. 드라마에 나오는 기업 총수들은 사무실에서 골프 연습도 하고 그러던데 부러울 뿐이다.(웃음)"
―IMF 외환위기 직후 회장으로 취임한 뒤 보험업계의 관행을 깨기 위해 '대수술'에 나섰다.
"내가 비록 산부인과 의사를 하다가 들어오긴 했지만 장사의 기본은 안다. 장사란 고객이 좋아하는 물건 혹은 서비스를 파는 것이다. 부회장으로 회사에 왔을 때가 90년대 후반인데, 가짜 보험고객이 부지기수더라. 가명계약, 실체가 없는 계약이 벌어지는데 회사는 그걸 알면서도 보험설계사에게 수수료를 지급했다. 고객이 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 이래서 회사가 수익을 낼 수 있나? 그래서 회사를 바꾸자, 실적 위주의 보험업계 관행을 우리가 먼저 깨뜨리자, 하고 깃발을 든 것이다."
―회사 내부의 반발이 컸다고 들었다.
"내가 초짜니까, 보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설득력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할 때처럼 '끓는 피를 가지고 개선해보자' 하고 달려들었는데 잘 안되더라.(웃음) 개선? 혁신? 그거야 만날 하는 얘기 아니냐며 한 귀로 흘려듣더라."
"아버지 유언은 '경영혁신, 계속하라'… 아들을 향한 축복이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어떻게 돌파하셨나.
"일단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보험을 모르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창피할 게 없었다. 임원들, 직원들, 우수 보험설계사들 붙들고 '나는 모릅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십시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했다. 산부인과 쪽에서는 내가 선생이었지만 보험산업에서는 학생 입장이 되었으니 열심히 배워야지. 7~8년 하고 나니 감이 잡히더라."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친인척이라도 직무능력이 없으면 승진에서 제외했다. 임원들도 능력 위주로 새 진용을 짰다. 인사를 공정하게 하는 것만이 신임 회장으로서 내가 권위와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니 가짜계약이 회사 발전과 우리 모두에게 독이 된다는 나의 주장도 먹히기 시작하더라. 지금도 임원인사만큼은 불면증이 생길 만큼 신중하고 냉정하게 한다. 그래서 날 굉장히 차가운 인간으로 보는 직원이 많다.(웃음)"
―가짜 계약으로 실적만 부풀리는 관행이 그리 쉽게 깨질 수 있나. 정도(正道)를 가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세상이다.
"해외 선진기업의 경영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넘버를 쫓아가면 피플이 울고, 피플을 쫓아가면 넘버도 쫓아온다. 고객한테 잘하면 이익은 등 뒤에서 저도 모르게 따라온다. 눈앞의 이익만 쫓아가면 고객이 등을 돌리고 인재들이 떠나간다. 부처님도 말씀하셨지만, 남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자기가 성공할 수 있는 거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투자성 변액보험이 시장을 휩쓸었을 때 교보는 중장기 보장성 보험 판매에만 집중했다. 회장의 고집에 내부에서도 원성이 높았다더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투자성 보험은 증권사 같은 데서 하는 거다. 쉽게 들어온 만큼 쉽게 빠져나가는 게 투자성 보험이다. 어떤 임원은 그걸 안 해서 우리 회사가 뒤처졌다며 울기도 했지만 내겐 확신이 있었다. 바로 금융 위기가 닥치지 않았나."
―개혁에 반발한 임원들의 집단사퇴 등 시련도 많았다. 포기하시고 싶을 때 없었나.
"2000년 아버님이 내세우신 대표이사 중 두 분을 회사에서 내보내면서 경영혁신을 시작했다. 아버님께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당신이 평생 일궈오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였으니 용서해달라고 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회사에서 편법을 부리는 임직원들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프게 시작한 혁신이라 내게 포기란 있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선친이 살아계시면 기뻐하셨겠다.
"2003년 돌아가실 때 내게 남기신 유언이 '경영혁신, 계속하라'였다. 아들을 향한 축복이었다."
존경하는 아버지, 신용호
초등학교도 못나오셨지만 보험업계의 전설이 됐죠
맨손가락으로 생나무 뚫는 불굴의 의지를 배웠다
正道경영만이 해답이다
실적 위한 가짜 보험계약 반발 무릅쓰고 없애 나갔죠
투자성 보험도 손 안대고… 그랬더니 회사가 살더라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교보'라는 이름은 창립자인 신용호(1917~2003)란 이름 석 자와 동일시된다.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개발하고, 건강보험의 효시인 암보험을 처음으로 출시한 한국 보험산업의 산증인이자 전설 같은 인물이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가 광복 후 돌아온 신용호는 '담배 한 갑을 줄이면 자녀를 대학까지 교육할 수 있다'는 모토를 내걸고 교육보험 시대를 열었다.
1980년 서울 종로 1번지에 교보빌딩을 세우면서 지하 2700여평 금싸라기 공간에 '교보문고'를 연 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기업의 성공은 부가 아니라 사람을 축적하는 것'이라는 평소 지론을 사통팔달 제일목에서 실행한 것이다.
신용호 자신이 책벌레였다.
그러나 장남인 신창재 회장은 "아버지의 성공은 책보다도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겠다는 의지, 불굴의 의지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분이 어떻게 큰 기업을 일굴 수 있었을까. 책 덕분일까.
"책이 아니라 의지였다.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불굴의 의지. 그런 의지가 있다면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문제 되지 않는다. 아버님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선배들에게 책을 빌려서 독학하셨다.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배웠고 실전에서 다졌다. 요즘 말로 하면 '북 스마트'한 사람이 아니라 '스트리트 스마트'한 분이었다. 생전에 아버님이 교수들과 얘기를 나누면 다들 깜짝 놀라셨다더라. 초등학교도 안 다닌 사람이 배웠다는 식자들보다 훨씬 체계적인 사고를 갖고 계셔서. 아버님 말씀 중에 명언이 있다. 세상에는 '거저'와 '비밀'이 없다. 모든 일에는 코스트(비용)가 따르고 조직은 거짓이나 비밀이 없이 투명해야 한다는 거다. 요즘 경제학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아닌가. 중요한 건 제도권 교육이 아니라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겠다는 강한 의지라는 걸 아버님이 보여주셨다."
―신용호 전 회장은 어떤 타입의 리더였나.
"감성리더십이 뛰어난 분이었다. 숫자와 셈에는 한없이 약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기막히게 움직이셨다. 아버지한테 칭찬을 받으면 하늘로 날아갈 듯 기쁘고, 야단을 맞으면 눈물이 쏙 빠졌다고 하더라. 격려와 질책을 지혜롭게 하시면서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참 잘하셨던 것 같다. 말년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셔서도 임직원들을 위해 음악회를 여는 등 치어리더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셨다."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해 문인들을 지원하셨다. 고은 선생과 우정이 깊을 만큼 문학애호가로도 유명하다.
"시, 소설, 미술, 건축까지 다 좋아하셨다. 고은 선생과는 기질이 비슷하셨고 배짱이 잘 맞았다. 그분이 노벨문학상 수상하시길 진심으로 바라셨다."
―서울 강남에 '교보타워'를 설립할 때 신용호 전 회장이 세계적인 건축가였던 마리오 보타의 설계도를 17번이나 퇴짜를 놓았다는 말이 있더라.
"아버님이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시는 분이라.(웃음) 퇴짜라기보다는 서로 재능과 식견을 존중하면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통통 튀는 소통리더십
코미디언 가면 쓰고 연설 교보 파산신청 가상 뉴스…
人事후엔 호루라기 불어요 새롭게 잘해보자는 뜻에서
교보문고가 문화권력?
금싸라기 땅, 다른 것 하면 돈이야 더 벌지 모르지만
… 돈이 전부가 아니다
아버지 유작, 잘 유지해야죠
◇교보문고가 권력이라고?
―교보문고의 금싸라기 공간을 다른 용도로 바꿀 생각은 없으신지.
"교보문고는 아버님의 유작이다. 사회와 시민들이 인정해주는 문화자산이자 브랜드다. 교보문고가 교보생명보다 더 유명한 걸 나도 알고 있다.(웃음) 그 자리에서 다른 사업을 하면 수익성이 높은 건 맞는다. 건물만 임대해도 지금보단 나을 거다. 그러나 사업이란 게 돈이 전부가 아니다. 돈은 최소한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부자라고 구두를 두 켤레씩 겹쳐 신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열 끼를 먹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일찍 죽기밖에 더하나?(웃음)"
―출판가에서는 교보문고를 '문화권력'이라고 한다.
"문화권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책 냈으니 잘 보이는 데다 비치해달라는 전화는 많이 받는다. '알았다' 해놓고 안 한다.(웃음) 그리고 나는 교보생명 회장이라 교보문고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교보가 문화권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권력이라면 잘 휘둘러야겠지. 못하면 야단맞는 거고."
―서울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광화문 글판'은 원래 교보생명 직원용이었다고 들었다. 요즘은 문구 선정도 위원회를 따로 구성해 결정한다더라.
"교보 명함만 내밀면 다들 광화문 글판 얘기를 먼저 해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드려야겠다고 결정했다. 간혹 난처한 적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 초창기였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을 때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라는 문구가 걸리는 바람에 교보생명이 파병을 반대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웃음)"
―신용호 전 회장은 어떤 아버지였나.
"자라면서 아버지를 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가 훈육을 담당하셨는데, 어지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느냐며 많이 얻어터졌다.(웃음) 아버지를 원 없이 보게 된 건 내가 회사에 들어와서, 그러니까 마흔이 훨씬 넘어서다. 돌아보니 아버지의 검박하고 절제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내겐 교육이었다. 아버지는 돈만 벌어서 게으른 돼지처럼 호의호식하며 사는 걸 가장 경멸하셨다. 장사하는 사람은 고객을 가장 무서워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의대 진학하는 걸 반대하진 않으셨나.
"전혀. 오히려 산부인과라고 좋아하셨다. 산과는 병이 아니고 생명 탄생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부자인 아버지에다 서울대 의대까지 진학하셨으니 남부러울 게 없었겠다.
"그래서 열등감이 많았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면서 공부하는 친구들 보면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게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서 공부한 뒤 나중에 사회에 갚으면 된다고. 주눅들 필요 없다고.(웃음)"
―의사 경험이 경영에 도움이 될까.
"산과 의사 하는 일이 정상분만이냐 수술이냐를 결정하고, 분만 중 발생한 출혈이 정상인가 이상인가를 따져 조치하는 것 아닌가. 위급한 상황에서 결단 내리는 트레이닝을 받은 게 정책 결정을 할 때 큰 도움이 되더라. 그리고 의사 경험은 생명보험사 경영자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학력이다. 우리 회사만 해도 계약의 절반 이상이 질병, 치료와 관계있는 건강보험이다. 유럽만 해도 건강보험회사 CEO는 대부분 의사 출신이다. 지금은 내가 이단자이지만, 10년 뒤에는 의학 전공 경영자들이 생명보험업계에서 대세가 될 것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의사들의 모임'을 이끈다더라.
"서울대 의대를 나왔지만 의사 노릇 안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두산그룹 박용현 회장이 왕초고, 서울대 안철수 교수도 회원이다. 의대 나와 의사도 못하는 마이너리티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들며 새 영역을 개척하는 하이브리드 인재가 되라고 서로 격려한다.(웃음)"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신창재의 소통리더십은 유명하다. 코미디언 이경규 가면을 쓰고 연설을 하고, 교보생명이 금융감독원에 파산신청을 냈다는 긴급뉴스를 가상으로 내보내 회사를 발칵 뒤집고, 새해 인사 발표 후 꼭 호루라기를 분다더라.
"경영 메시지를 강렬하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어서다. 이경규 가면은 회사 CI를 바꿀 때 써먹었다. 가면을 쓴다고 내가 이경규처럼 보이는 게 아니듯, CI만 바꾼다고 회사가 바뀌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호루라기는, 매년 3월 말에 임원 인사를 발표하면 회사가 초상집 분위기 되는 게 싫어서 분다. 새로운 주전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시합에 나서자는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려고. 가상 긴급뉴스는 '변화와 혁신이 아니면 다 죽는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려고 시도했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어릴 때 만화책을 많이 봐서 그렇다.(웃음)"
―사원들이 회장과 직접 이메일을 주고받는다더라. 현장의 문제를 토로하는 창구라고 하더라.
"나의 일이라는 게 정책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직원과 소통하는 일이다. 물론 회신이 빠르진 않다. 신창재 개인이 답변하는 게 아니라 대표이사 입장에서 써야 하니 현업부서에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현장에 늘 함께 할 수 없으니 이메일을 한껏 활용한다."
―TV도 즐겨보신다던데, 그것도 소통 때문인가.
"재미도 있고, 경영 자료도 얻을 수 있어서다. 요즘은 '해를 품은 달', 'UFC(격투기)', '불후의 명곡'을 즐겨본다. '불후의 명곡'에서 알리가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동영상으로 따서 임원 회의 때 써먹었다. 지도자의 길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키며 전진해야 하는 이유를 그 노랫말이 표현해주더라. '남극의 눈물'이란 다큐는 황제펭귄들의 이야기인데,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는 자료로 활용했다."
―경영권을 반드시 자식에게 물려줄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등소평이 '흑묘백묘(黑猫白猫)'라고 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오너 집안이든 전문경영인이든 회사에 성과를 잘 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가 되든 상관없다. 나처럼 '낙하산'이 아니라, 말단 시절부터 우리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현재 임원들 중에 후계 CEO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창립 50주년 회고록을 쓰실 때 눈물을 흘리셨다더라.
"내 인생에 가장 슬펐던 때는 암으로 집사람을 잃었을 때다. 경영에 미쳐서 아내가 그 지경이 되는 줄도 몰랐다. 회사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으니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집사람의 마지막 3개월이 내 생애 가장 힘든 나날이었다."
―창립자 신용호의 호가 대산(大山)이다. '큰 나무 밑에서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국제금융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저성장시대를 돌파할 대안이 있을까.
"경기침체, 저성장보다 더 큰 추세는 인구 구조의 변화다. 평균 수명이 늘면 은퇴 후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보험, 건강보험은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영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고객에게 가치를 주는 상품과 서비스는 각광받기 마련이다. 신규계약에 집중하기보다, 한번 가입한 고객을 평생 보살피는 '유지고객서비스'에 우리는 명운을 걸었다. 우리의 제일 목적은 1등이 아니다. 고객이 인정하는 회사가 되는 것이다."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