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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식의 인물탐험]
왕년의 복싱 영웅 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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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배우 이시영이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서 우승해 화제가 됐다.
그에게 복싱을 지도한 사람이 홍수환(61)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왕년의 복싱 영웅은 다시 한번 주목받게 됐다.
한국 최초로 프로복싱 두 체급을 제패한 그는 은퇴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0년을 살았다.
귀국 후 강연자로 활동해 왔고. 8년 전에는 체육관도 열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홍수환 스타복싱 체육관을 찾았다.
낮 시간이었는데도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았다.
등록한 관원이 200명 정도다.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이시영 효과’가 있는지 물었다.
“그럼요. 시영이 덕분에 체육관이 얼마나 잘 되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다른 데는 전보다 이삼십명씩 더 온다고.”
전에는 20~30% 정도였던 여성 관원 비율이 지금은 40%까지 높아졌다.
관원들이 내는 돈만으로도 체육관 운영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직장인과 학생 등 관원 대부분이 그가 1974년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는 물론 3년 뒤 파나마의 엑토르 카라스키야에게 4번을 다운당하고 역전 KO승을 거뒀을 때도 태어나지 않은 세대다.
몇몇은 30여년 전 홍수환 팬이었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체육관을 찾았다.
사실 그는 체육관에서 직접 지도할 시간이 많지 않다.
17년째 전국 각지에서 초청받아 강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평균 10번 정도 강사로 나선다.
처음에는 좀 떨렸지만 이젠 재미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수입도 중요하지 않을까.
“강연료는 뭐. 큰 기업체는 많이 주지만 군 부대나 교도소도 가니까. 아무래도 수입의 대부분을 강연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는 자신이 강사로 나설 수 있는 것이 복싱 덕분임을 잘 알고 있다.
“홍수환이를 누가 알아줘요. 복서였으니까 강사를 할 수 있는 거지. 그걸 잊지도 않지만 잊어서도 안 되죠.”
체육관 운영이든 강연이든 그는 복싱 덕분에 30년을 먹고 사는 셈이다.
강연의 주제는 언제나 ‘프로정신과 도전’이다.
성공담과 실패담을 모두 이야기하는데 실패 쪽에 더 비중을 둔다고 했다.
강연 때문에 체육관에 소홀하지는 않을까.
“그렇진 않아요. 코치가 있으니까. 내가 강연을 안 한다면 코치를 쓸 일이 없을 텐데 사람한테 투자를 할 수 있다는 게 더 보람 있는 일이지.”
그래도 스타의 이름이 붙은 체육관에 다니는 입장에서는 직접 지도를 받고 싶을 것 같았다.
“그렇죠. 그래서 강연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직행합니다.”
그가 복싱을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아버지가 권투를 좋아해서 나를 데리고 구경을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김기수씨가 세계챔피언이 되는 걸 보고 김기수씨를 쫓아 다녔어요.
그게 권투를 하게 된 동기지.”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장충체육관에 갔던 그는 피를 흘리는 복서들을 보고 “저 선수들은 저렇게 맞고 피가 나는데 왜 울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그때 “권투선수는 울지 않는 거란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늘 머리 속에 남았다고 한다. 그 자신은 복싱을 하면서 운 적이 없었을까.
“사모라한테 두 번 졌을 때 울었어요. 그땐 진짜 많이 울었지.”
그는 테일러를 꺾고 따낸 WBA 밴텀급 타이틀을 2차 방어전에서 알폰소 사모라에게 KO로 패하며 넘겨줬다.
도전자로 나선 리턴 매치에서도 또 졌다.
이후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4전5기’의 신화를 세우며 허리에 찼던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벨트도 2차 방어전에서 리카르도 카르도나에게 빼앗겼다.
챔피언들의 꿈인 ‘롱 런’과 인연이 없었다.
“목적을 이룬 다음에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걸 깨달았어요.
챔피언이었을 때 왜 좀 더 노력을.
왜 좀 더 집중을 못했을까 그런 아쉬움이 많았죠. 두 번의 뼈 아픈 패배였죠.
첫번째는 사모라한테 지고 두번째는 스캔들에 지고….”
그는 두번째 타이틀을 빼앗긴 뒤 지금의 부인인 가수 옥희에 대한 폭력 때문에 스캔들이 터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리며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결국 링을 떠났다.
1983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의 일에 대해 그는 “그 이야기는 입에 담고도 싶지 않다”고 했다.
은퇴한 뒤에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그가 미국에서 왜 고생을 했을까.
“밑바닥부터 다시 살아야 하는 게 미국이에요. 내 인생에서 제일 실패작이 미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경제적인 실패가 아니고 가정에서의 실패가.”
현역 때 꼭 붙어보고 싶었던 선수를 물어봤더니 주저없이 “윌프레도 고메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친구 염동균을 이긴 놈이잖아요. 나하고 통합전도 한 번 해볼만했는데. 카르도나를 이겼으면 성사됐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고메스와의 대결이 이뤄졌다면 승산이 있었을까.
사모라는 홍수환을 이겼고. 카를로스 사라테는 사모라를 꺾었으며.
고메스는 사라테를 눕혔다.
꿩 잡는 게 매거든. 걔가 동균인 이길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렵지.
딱 한 수가 있었는데. 빠지면서 하나만 걸면 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생각하는 복싱의 매력은 무엇일까.
“헝그리지. 이겨야겠다는 욕망. 배가 고픈 헝그리하고는 달라요.
돈이 많아도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챔피언이 돼서 배가 불렀던 거지.
장정구나 유명우는 정말 훌륭해.
15차 방어가 쉬운 게 아니지.
장정구는 동양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고. 유명우는 타이틀 빼앗긴 거 다시 찾았고. 김기수씨도 대단하죠.
왜냐. 벤베누티한테 아마추어 때 졌는데 프로에서 이겨 세계챔피언이 됐으니까.
나는 사모라한테 두 번 다 졌잖아.
다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라니까.”
그는 권투로부터 인생에서 난관에 부딛혔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권투선수가 제일 어려운 게 체중 빼는 거고 두 번째가 맞는 거예요.
어려울 때면 내가 지금 체중을 빼느라고 못 먹고 못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매를 맞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못할 게 뭐 있냐 하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어요.”
복서가 아닌 다른 길을 걸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군인이 됐을 거야.
나와 제일 잘 어울려요.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라서 군인을 했으면 잘 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핸디캡이 전 부인과 이혼이라고 했다.
“이혼을 안 하고 그냥 살았으면 글쎄 벌써 국회의원은 되지 않았을까.
복싱 쪽으로 보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가정적으로 보면 결코 성공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관장이자 사장이다.
‘SH45’라는 회사를 차렸다.
SH는 이름의 이니셜.
45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4전5기’를 의미한다.
프로복싱을 기업화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한다.
지난해 60대에 들어선 그는 “요즘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의 목표가 자신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던 복싱을 되살리는 것이다.
“나보다 멋있는 선수를 만들 수 있으면 더 이상 원이 없어요. 정말 한국 복싱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초대 챔피언 김기수씨가 돌아가셨으니 이젠 내가 그 다음이잖아요.”
문제는 선수다.
이시영의 경우에서 보듯 복싱의 활성화는 생활체육 쪽만을 의미할 가능성이 큰 게 현실이다.
“우리 때처럼 맨주먹으로 세계챔피언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지. 지금 내가 체육관을 하고 있지만 누가 있어요.
동양 챔피언 이재성 한 명밖에 없어요.
부모들 중에는 스파링은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실 권투가 가정환경이 유복한 아이들이 끝까지 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에요.
뭔가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게 하나는 있어야 하거든.
나도 체육관 깨끗하게 차려놓고 장사 쪽으로 시작했지만 그런 가운데 희망을 걸어보는 거지.
이러다 보면 좋은 선수 하나 나오겠지 하는. 지방으로 강연을 다니면서도 주변에 권투를 시켰으면 하는 아이가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말해요.”
최정식 선임기자 bukra@
▶ 홍수환 프로필 |
▲생년월일=1950년 5월 26일(61세) ▲출신학교=수송초-중앙중-중앙고-인천체대 ▲프로데뷔=1969년 ▲총전적=50전41승(14KO)5패4무 ▲주요전적=1971년 8월 14일 문정호 5회 KO승(한국 밴텀급 챔피언). 1972년 6월 4일 알 디아즈 12회 판정승(동양 밴텀급 챔피언). 1974년 7월 3일 아놀드 테일러 15회 판정승(WBA 밴텀급 챔피언). 1974년 12월 28일 페르난도 카바넬라 15회 판정승(1차 방어). 1975년 3월 14일 알폰소 사모라 4회 KO패(타이틀 상실). 1976년 10월 16일 알폰소 사모라 12회 KO패(도전 실패). 1977년 11월 26일 엑토르 카라스키야 3회 KO승(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1978년 2월 1일 유타가 가사하라 15회 판정승(1차 방어). 1978년 5월 7일 리카르도 카르도나 12회 TKO패(타이틀 상실). 1980년 12월 19일 염동균 무승부(은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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