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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173회 작성일 2011-04-22 15:41
영원한 ‘만루홈런의 사나이’ 이종도(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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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감독·코치 17년 해보니 이제 야구가 보여… 그러니 더 괴롭더라”


영원한 ‘만루홈런의 사나이’ 이종도

 2011-04-22 




 
이종도 전 고려대 감독은 12일 “30년 전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의 만루홈런은 프로야구가 국민스포츠가 될 것을 예고한 축포 같다”고 말했다. 속초 =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프로야구 개막때마다 ‘재탕’을 해놔서…, ‘선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허허.”

강원
속초에 잠시 머물고 있던 이종도(59) 전 고려대 감독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뜸 이렇게 답이 왔다. ‘만루홈런의 사나이’라는 닉네임이 붙어 다니는 야구인 이종도…, 프로야구 출범 이후 554개(22일 현재)의 만루홈런이 나왔지만 그에게만 이 별명이 따라다닌다.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에서 당시 MBC청룡의 이종도는
삼성라이온즈와의 연장 10회말에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로야구가 있는 한 잊어지지 않을, 마치 ‘현재’ 프로야구의
성공을 예고하는 듯한 ‘한방’이었다. ‘제물’이 된 상대 투수는 삼성의 이선희(56·삼성 스카우트 코치)였다.

이 전 감독의 인터뷰 거절이 이해할 만한 게, 프로야구 개막때마다 언론들이 당시 얘기를 꺼내고 인터뷰를 했으니 ‘재탕’이 아니라 ‘수백 탕’은 한 셈이다. 특히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는 올해는 더 심했다.


‘그렇다면 그 얘기는 빼고’라는 전제를 달고 약속을 잡았다. 

설악산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속초시 노학동 종합경기장 야구장에서 지난 12일 그를 만났다. 

잠시 바람 쐬러 속초에 왔던 이 전 감독은 설악중 야구부를 지도하는 후배의 부탁에 발목이 잡혀 며칠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야구와 연줄을 뗄 수가 없다.

―그래도 그 장면이 없었으면 프로야구 출범이 섭섭할 뻔했죠.

원년 얘기부터 꺼냈더니 이 전 감독이 “안 하기로 하고선…”이라며 눈총을 준다.

“(이)선희가 ‘인간성’이 좋은 후배이기에망정이지…, 나야 좋아도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을 리 있겠어요? 어쨌든 프로야구가 서른 살이 됐고, 이젠 700만 관중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보람을 느껴요. 내가 거기에 한 역할을 했구나 하는 뿌듯함 같은 거.”

프로야구 첫 만루홈런의 주인공이지만, 그는 ‘첫’과 인연이 많다.

“중앙고 3학년때인 제3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1차전에서 충북 세광고를 만났는데, 내가 1회말에 무사 만루홈런을 때렸어요. 고교야구 첫 만루홈런이죠. 2회에 좌전안타, 3회에 3루타를 쳐서 타점 3개를 추가해 3회까지 혼자 7타점을 올렸는데 그것도 최초였어요. 실업 통산 1000호 홈런은 공군시절에 내가 기록했죠.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처음 방송해설위원이 된 것도 저예요. 1987년 현역 은퇴 직후에 MBC라디오에서 야구 해설을 처음 했죠.”

정작 프로야구 시즌 개막 얘기를 꺼내자 이 전 감독은 다소 스트레스를 받는 표정을 지었다.

“스트레스라기보다는 몸이 저도 모르게 흥분되는 게 있어요. 야구와 함께한 인생이라 어쩔 수 없나 봐요. 나도 ‘거기’(
운동장)에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비유가 좋진 않지만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가 떠올랐다.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그의 몸과 마음은 현역 때처럼 꿈틀대는 모양이다. 그는 프로야구 지도자에 대한 욕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30년이 후딱 지나갔어요. 마흔 살이 넘고 코치할 때까지는 몰랐는데, 2000년 고려대 감독을 맡고부터는 1년이 화살처럼 가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예순이 다 됐어요. 내가 알고 있는 걸 후배들에게 다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는 조급함 같은 게 생겨요.”

―모교에서 감독생활이 7년이었는데, 프로야구와 거리를 둔 시간이 좀 길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프로야구 코치로 10년,
대학 감독으로 7년을 지내 보니 야구가 이제 정확히 보여요. 그게 더 괴로워요. 어린 선수를 보면 어떻게 키우면 되겠다 싶은 거지. 예전에는 욕심이 앞서서 한꺼번에 쏟아부어주려 했지만, 이젠 그게 아니고 차근차근 키워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김성근 SK 감독은 지난해 11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종도가 지도자로서 자질이 큰 재목”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전 감독은 선수시절부터 야구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는 ‘성실함’이 돋보였지만 카리스마도 남달랐다. MBC시절부터 OB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는 팀의 주장을 맡았는데 당시 감독들이 그의 리더십을 알아본 것이다.

그가 2000년에 대학 감독으로 가지 않고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면? 이 전 감독은 지금쯤 어느 프로팀의 더그아웃에서 ‘사인’을 날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그는 충북 음성이 고향이다.

“오형제 중 넷째였는데 몸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육상을 했는데 충북대회 400m 계주에서 준우승, 높이뛰기에서 3등을 한 적이 있어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형님을 따라 동대문중으로 유학을 왔죠. 하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너무 멋있어 보여 중2때 혼자 야구부를 찾아가 운동을 시작했어요. 감독님이 빠른 발을 좋게 평가하더군요.”

중앙고를 거쳐 고려대에 들어가 야구를 했다. 

고교와 대학 4년 선배가 이광환 전 LG 감독(58회)이다.
 



“지난 얘기지만 고려대에 입학하는 게 싫었어요. 당시만 해도 선배들이 ‘빠따’를 칠 때인데, 고려대가 제일 심하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대학시절 ‘고려대 역사’에 전해지는 유명한 홈런을 치게 된다.

“1학년때 정기 고·연전에 5번 타자로 나갔죠. 반드시 이겨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당시 유남호(전 KIA타이거즈 감독)가 상대 투수였어요. 나는 앞선 세 타석에서 모두 삼진을 당했죠. 0-1로 우리가 밀리던 9회말 투아웃이 나의 마지막 타석이었어요. 이미 경기가 끝났다고 보고 경기장의 연세대 총장께서 고려대 총장을 찾아가 ‘죄송하게 됐습니다’고 먼저 ‘승리 인사’를 했답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솔로홈런을 때린 거예요. 유남호의 완투·완봉승이 깨지는 순간이었어요. 경기장은 난리가 났죠. 경기 결과는 비겼지만 사실상 이긴 팀은 우리였죠.”

고려대 얘기를 하자면 후배인 고 조성옥(1961~2009) 전 동의대 감독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고려대 감독을 하고 조 감독이 부산고 감독을 할 때였어요. 어느 날 서울에 왔으니 보자고 하더군요. 만났더니 무작정 선수 하나를 받아 달라는 거예요. 우리는 선수 스카우트가 끝난 때였어요. 조 감독이 선수를 잘 키우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전엔 미리 부탁을 하면 두말 없이 들어주곤 했어요.”

그 선수가 현재 SK의 국가대표 2루수 정근우(29)였다. 한국이 우승한 2000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당시 사령탑이 조 감독이었고 정근우는 추신수(29·클리블랜드), 이대호(29·롯데), 김태균(29·지바 롯데) 등과 함께 대표로 뛰었다.

“정근우는 당연히 프로를 예상했지만, 당시 부산고의 추신수가 한국에 남지 않고 미국을 선택하면서 한국 프로구단 스카우트들 사이에 부산고 출신을 받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됐었다고 해요. 정근우는 희생양이 된 거지.”

결국 그가 대학측을 설득해 정근우를 입학시킬 수 있었다.

“조 감독은 선수들에게 ‘정신’을 가르치는 좋은 지도자였어요. 정근우를 보니 확연히 다르더라고요. 선수로서 근성과 절도가 있어요. 결국 대학시절 SK에서 알아보고 ‘입도선매’를 했죠.”

―프로야구 창단 당시엔 어땠나요.

“나는 제일은행에 몸담고 있었는데, 업무고시를 봐서 대리를 땄죠. 고과평점도 좋아서 은행에서는 은퇴 후에 나를 직원으로 쓰려고 했데요. 당시에는 그게 안정적이었으니까. 그런데 프로야구가 생긴다고 하니 고민이 됐죠. 나이도 서른이 넘었고. 아내와 상의를 했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걸 해야지’라며 흔쾌히 야구를 선택하도록 지지해 줬어요. 나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프로를 택했다고 생각해요.”

프로야구 8개 구단에 대한 올 시즌 평가를 부탁하자 그는 다른 얘기를 했다.

“지금 선수들이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돈도 많이 버는 만큼 팬들과 어린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요. 예전에 백인천 감독은 야구장에 들어올 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어요. 야구장을 하나의 ‘정신의 장’이라고 본 거지요. 그런 게 사라지는 점이 아쉬워요. 지도자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우리가 일본에 이긴 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보면서 좋을지 몰라도 상대를 생각해야 해요. 단순히 인기 스포츠에 안주하지 않고 스포츠 정신을 리드하는 야구가 돼야 합니다.”

그에게 평생을 해온 ‘야구’란 무엇일까.

“저한테는 마약 같아요. 언제나 야구장에 오면 기분이 좋고 아이들이 야구하는 것만 봐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요. 배팅은
고도기술이자, 영원한 숙제예요. 3할을 치면 잘치는 건데, 이게 인생의 성공 확률과도 가깝죠. 인생이 그렇듯, 야구도 어려우니까 더 재미가 있고 도전심이 생겨요. 아이들이 지도자들이 원하는 대로 쉽게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집’이 있어서 그래요. 그것도 인생과 비슷해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는 운동, 매료될 수밖에 없는 스포츠예요. 야구는 사람이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득점이 되죠. 그것도 왠지 희한해요. 공을 사용하는 종목이라도 야구는 다른 스포츠와 달라요.”

그의 야구예찬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인터뷰 = 엄주엽 체육부 부장대우 ejyeob@munhwa.com



<오랜만입니다>
 
 

이종도의 야구인생, 고교야구 첫 만루홈런… 

실업야구 통산 1000호 홈런 기록



 
▲ 이종도 전 감독이 12일 강원 속초 종합경기장에서 설악중 야구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인 MBC-삼성전에서 이종도가 끝내기 만루홈런을 치는 장면(당시 TV 화면).
 
 
1952년 충북 음성 출신. 동대문중 2학년때 야구를 시작해 중앙고를 거쳐 고려대에서 야구를 했다. 고교시절 포수를 맡으면서도 빠른 발과 홈런타자로 명성을 날렸다. 1969년 5월1일자 신문을 보면 ‘제3회 대통령배고교야구에서 중앙고 4번 이종도군이 만루홈런을 날려 국내 고교야구 사상 최초로 만루홈런을 날린 강타자로 각광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해 이종도의 타율이 무려 0.455였으니 ‘
공포의 방망이’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대를 거쳐 1974년 제일은행에 입단한 이종도는 공군(1974~1977년) 시절인 1976년 4월7일 친정팀인 제일은행을 상대로 실업야구 통산 1000호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종도는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영웅이 됐다. 

MBC 창단멤버인 그는 1982년 3월27일 삼성전에서 7-7 동점인 연장 10회말 좌월 끝내기 만루홈런을 날리며
한국 프로야구의 성공적인 출범을 알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직접 시구를 하고 경호원들이 더그아웃에 들어올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에서 열린 개막전이었다.

프로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이종도는 첫해 타격 6위(0.328), 홈런 7위(11개), 타점 8위(48점)에 오르며 MBC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1985년 OB로 트레이드돼 1987년 은퇴했다. 

6년간 타율 0.268, 28홈런, 176타점을 기록했다. 태평양(1989~1991년), LG(1992~1993년), 쌍방울(1996~1999년) 코치를 지낸 뒤 모교인 고려대(2000∼2006년) 감독을 맡았다. MBC와
KBS에서 야구해설가로도 활약했다.

그는 지난해
개인적으로 큰 고비를 넘겼다.

“지난해 10월초 몸에 황달이 왔어요. 병원에서 진찰을 해보니 췌장에 연결된 관에 종양이 생겼다는 거예요. 발견 10일 만에 날짜를 잡아
수술하고 20일 만에 퇴원했어요. 워낙 초기 단계여서 수술 이후 두 차례 정밀검진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얼굴을 봐도 지난해 암수술 받은 사람이라고는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예전 건강한 모습 그대로다. 동갑내기인 장윤진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특집대담] 이종도 이선희, "82년 개막전의 진실은"

기사입력 | 2011-03-31

"프로 원년 개막전 끝내기 홈런을 말한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쏘아올렸던 이종도 전 고려대 감독(당시 MBC)과 그날 홈런을 내준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당시 삼성)가 30일 목동구장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두 옛 스타가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토요일 오후 소년은 TV를 켰다. 어라? 야구경기가 열리고 있는데 유니폼이 멋있다. 그리고 왜 선수들이 죄다 아저씨들일까.

소년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저거 뭐예요?" 아버지의 답변. "응, 앞으로 야구를 매일 한단다."

그날 1982년 3월27일.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향후 리그의 흥행을 예고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동대문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가 리그의 새벽을 알리는 첫 혈투를 벌였다. 연장전 승부 끝에 MBC 이종도가 삼성 왼손투수 이선희로부터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렸다. 시작부터 누구도 예상치 못한 드라마가 탄생했다. 소년은 생각했다. 앞으로 야구팬이 되겠다고.

결과적으로 타자 이종도와 투수 이선희는 오늘날 프로야구 인기의 씨앗이 됐다. 한명은 크나큰 영광을, 또 한명은 커다란 상처를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그

때 소년은 지금 마흔살이 됐다. 30번째 시즌이 개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28일 프로야구 30주년 행사가 열렸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981년 연말에 창립됐기 때문에 30주년이다. 

그리고 스포츠조선은 30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이종도 전 고려대 감독,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를 만났다. 

좀처럼 한 자리에 같이하기 어려운 두 야구인은 마치 타임캡슐을
개봉한 듯, 1982년 그날의 상황을 줄줄이 회상했다. 이종도 전 감독이 선배다. 역시 홈런을 허용한 이 코치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희) "형님, 그때 개막전 말이죠. 사실 우리가 계속 밀어붙였으면 10점 넘게 내면서 이길 경기였어요."

-(도) "(사연을 알고 있다는 듯) 그랬지. 당연히 그랬을거야."

-(기자)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희) "우리가 초반에 크게(2회초 현재 5-0) 앞서갔죠. 무드가 완전히 삼성쪽이었죠. 그런데 우리쪽 고위층에서 지시가 내려왔어요. 점수 그만 내라고. 일부러 점수를 주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결국 슬슬 하라는 거였죠. 프로야구가 시작하자마자 일방적인 게임이 나오면 흥미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격차를 줄이자, 흥행에 찬물 끼얹지 말자,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삼성쪽에선 홈으로 들어올 주자도 스톱시키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결국엔 이길 줄 알았죠. 그런데 참 희한하죠. 야구란 게 흐름의 스포츠인데,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백인천 유승안의 홈런으로 동점이 됐어요."

-(기자) "그런 상황에서 동점인 7회에 등판을 하셨군요."

-(희) "그날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처음엔 내가 선발로 나갈 줄 알았는데 전날 (황)규봉이가 선발 등판하기로 결정됐어요. 저는 불펜에서 네번이나 몸을 풀었어요. 급피치를 올렸다가 어깨가 식고 하는 과정을 네번이나 반복한거죠. 요즘이야 몸 풀었다가 등판 기회가 넘어가면 다음 투수가 대기하잖아요? 그때는 자원도 부족할때고, 프로 첫날이고, 마냥 혼자서 몸을 푸는거죠. 마지막엔 페이스가 안 올라오더라구요. 게다가 형님이 왼손투수 공을 정말 잘 치시고. (권)영호와 함께 내가 같이 몸을 풀다가 결국 내가 마운드에 올라갔죠."

이종도 이선희 인터뷰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을 최고의 드라마로 만든 주인공. 이종도 고려대 전 감독(왼쪽)과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가 30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만나 옛 기억을 돌이키며 손을 맞잡았다.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도) "그러고보면 프로도 아니었지. 네번이나 팔을 푸는 게 말이 되나. 결과적으로 행운이 나에게 왔다고 봐. 초반부터 몰렸을 때 우리 덕아웃 분위기는 초상집이었어. 멤버상으로 워낙 좋은 삼성이 계속 두들겨대니. 잘못하면 (큰 점수차로) 망신당할까봐 걱정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약간 느슨해지는 분위기가 됐고 우리가 따라붙으면서 기회가 왔지. 7-7 동점인 연장 10회말에 사실은 나에게 올 기회가 아니었어. 1사 2,3루에서 유승안이가 걸어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볼카운트 0-3에서 휘두르더라고. 투수앞 땅볼로 3루 주자가 죽었어. 그때 그냥 끝날 수 있는 분위기였는데. 그후 백감독님이 고의4구로 나가면서 내게 만루 찬스가 왔지. 그날 부상으로 내가 오토바이를 탔어요. 나중에 유승안이 그러더라고. 오토바이 바퀴 하나만 달라고. 나는 그해 마치고 KBO에서 승용차 '맵시'도 받았어."

-(희) "만루홈런을 맞고, 나는 개인적으로 힘든 건 별로 없었어요. 그해 내가 15승을 했는데, 어차피 투수에겐 1패거든. 그런데 제일 마음아픈 건 제일모직 여직원들이었어. 개막전 응원을 위해 여직원들이 한달전부터 추울때 카드섹션 연습을 하느라 굉장히 고생했어요. 그분들이 실망하겠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어요."

-(도) "나는 말이야. 사실 원년 개막전 얘기를 꺼낼 때마다 선희에게 미안해 죽겠어. 나야 홈런을 친 사람이잖아. 그런데 선희는 맞은 사람이라고. 이 코치 입장에선 절대 좋은 추억이 아닐텐데 때되면 한번씩 언급되는 게 참 미안해."

-(희) "어차피 투수는 질 때도 있습니다. 그날은 참 힘들긴 했습니다. 경기 마치고 다른 선수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구요.
버스에 타서는 완전히 죄인이었구요. 숙소에 가서 식당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계속 멍하니 있었습니다."

-(도) "나는 홈런 치고 홈플레이트를 밟을 때 선수들에게 폭 파묻혔지. 백인천 감독님이 손 내민 것밖에 기억 안나. 감독님이 눈물이 글썽글썽 하시더라구. 백 감독님도 한국 와서 선수 겸 감독을 하면서 첫 경기를 그리 드라마틱하게 이길 줄 몰랐지. 그걸 보면서 내가
뭔가 이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 선수단이 청계천 불고기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워낙 많이들 축하해주셔서 식사시간이 세시간 가까이 걸렸어."

-(희) "타구가 맞아나갈 때 라인드라이브로 담장을 맞고 떨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형님이 워낙 펀치력이 있으니 그게 살아서 넘어가더라구요. 저녁 못먹고 좋아하는
사우나도 못하고, 다른 선수들도 제겐 말을 못 걸었습니다. 말도 안 되게 경기를 졌으니…."

-(도) "나도 치는 순간 감이 왔지. 경기는 끝났다고. 그런데 넘어갈 줄은 처음엔 몰랐어."

-(기자) "그날 역사적인 개막전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도) "처음엔 엄청난 공포분위기였다고. 대통령이 시구하러 왔으니 말이야. 화장실도 못가게 하고, 경호원들이 양복에 노란 타이를 매고 귀에는 리시버 같은 걸 꽂고 있었어. 누가 오긴 온다는데, 나중엔 눈치 챘지. 이 정도면 대통령일 거라고.
데모도 많았던 시절이니까."

-(희) "맞아요. 덕아웃 양옆에도 경호원이 떡하니 지키고 섰는데, 자세히 보니까 양복 소매 안쪽에 개머리판 없는 기관총 같은 걸 꽂아놓고 있었어요. 야구장에 들어갈 때부터 선수들도
검색을 받았고. 대통령이 시구 마치고 몇회 지나고 나간 뒤에는 조금 편해졌어요. 그 뒤엔 기관총도 한번 구경했죠."

-(도) "그날 선희는 사실상 혹사당한 거지. 그런데 늘 홈런 친 사람만 부각돼 내가 항상 미안했어요. 선희가 희생을 했던 거지. 아무도 몸도 안 풀고 혼자서 다 책임져야하는 상황이니."

-(희) "저는 한국시리즈때도 OB 김유동에게 홈런을 맞았잖아요. 그 전날에도 6회까지 던졌어요. 그런데 다른 투수들이 다 아프다하니 당시 감독님이 오셔서 다음날도 선발 나가라 하시더라구요. 다 아프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완투하면서 140개 넘게 던지고 결국엔 홈런도 맞았어요. 비운의 스타라는 별명도 얻었는데, 비운이라기 보다는 프로야구의 드라마틱한 발전에 기폭제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도) "그렇지, 당시엔 선수들은 그런 게 헌신이고 희생이었어. 우리 숙명이었다고. 그래도 뿌듯하지, 우리같은 옛 선배들이 그렇게 야구하지 않았다면 올림픽 금메달이나 WBC 준우승이 훗날 어떻게 나왔겠어. FA 제고다 생겨서 선수들도 좋아졌고.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기자) "프로야구 시작된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희) "MBC가 서울 팀이니까 개막전을 서울서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상대팀으로 선택받을 지는 몰랐지. 기뻤다고."

-(도) "삼성은 멤버가 국가대표급이었어. 우리는 서울팀이라 해도 백인천 감독님 한 분만 스타로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이어서 부담이 컸어. 결과적으로 우린 기뻤지만 삼성은 어이없는 경기가 됐지."

-(희) "그때 형님에게 던진 게 몸쪽 약간 낮은 직구였는데. 비교적 잘 들어갔어요. 힘이 있었으면 안 맞았을텐데, 내가 볼에 힘이 떨어져 있어서 그만."

-(도) "나는 노리고 들어갔지. 저쪽은 힘이 빠진 게 보이고, 카운트 잡으러 올거라 생각했지."

-(희)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전 팔을
과도하게 풀지 않을 겁니다. 또 몸쪽 보다 바깥쪽 역회전 볼이나 떨어지는 구질로 승부해야겠습니다. 하하."

-(도) "나는 항상 이선희에게 고맙게 생각해. 하하. 지금 또 대결하면, 난 또 노리고 들어갈거야."

-(기자) "당시 프로야구는 지금과 비교하면 어땠나요."

-(도) "선수 보호라는 개념이 없을 때지. 트레이너도 팀당 한명 뿐이었고. 선수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던 시기야. 낙후됐었지. 요즘은 투수가 공 던지고 아이싱을 하는데 그때는 100개 넘게 던지고도 그냥 뜨끈한 목욕탕에 들어갔지. 선수생명이 짧을 수밖에. 본래 투수가 훈련 끝나면 미세하게 내출혈이 생기는데 말이야. 타자들도 그랬어. 티배팅 한박스를 치고 나면 본래 반대쪽 스윙을 해서 몸을 풀어줘야 하잖아. 그런데 그때는 그냥 목욕탕이야. 우린 일종의 '스포츠 장애자'였어. 사람들이 한쪽으로 몸이 기울어있어. 스포츠의학이란 것도 없었고."

-(희) "투수들은 피칭 아니면
계단 오르내리기를 했습니다. 축구장 스탠드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그저 몇바퀴를 도는 겁니다. 특별히 효과도 없는 운동을 마냥 한거죠."

-(기자) "30주년을 맞아 지금 갓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에게 충고를 해주신다면 어떤게 있을까요."

-(도) "우리 1세대들이 몸으로 모든 역할을 담당했지. 이제는 선수들이 좋은 여건에서 지낼 수 있어. 그럴수록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선수가 됐으면 해. 봉사 같은 것도 하면서. 그래야 정말 선망의 대상, 스타가 되는거야."

-(희) "금메달, 병역혜택 다 좋지만 인간성 자체는 프로화 되지 않았으면 해요. 늘 예의를 갖고 말이죠."

-(도) "그나저나 이제는 40주년때 한번 대담을 또 하면 되겠네. 10년 후에 또 불러주소. 하하."

-(희) "저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평생의 업 같습니다. 또 못 피하고 오늘도 하고 있네. 하하. 한번 더 말씀드리면, 그날의 홈런 때문에 내 인생에 괴로움이나 나쁜 영향은 없었습니다. 제가 홈런 맞은 덕분에 프로야구가 잘 됐다고 생각하렵니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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