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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224)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 ▲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큰사진)과 그의 청년시절 자화상(작은사진)
1909. 8. 29.~1910. 8. 29.
'궁내부 예식관 고희동씨는 고영희씨의 조카인데 일본으로부터 도래하다가 경관에게 체포됨은 타보에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그 내용을 자세히 들은 즉, 고씨가 화법이 매우 뛰어나 궁내 차관이 일본에 가서 화법을 습득케 하였고….'
황성신문 1910년 7월 22일 잡보란에 '피착(被捉) 즉방(卽放)'이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궁내부 예식관 고희동이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던 중 경관에게 체포되어 하룻밤을 신문당하고는 바로 방면되었다는 내용이다. 고희동은 당대 최고 권력자 중의 하나였던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의 조카였지만, 한일합병 직전 일본 경찰의 조선인 유학생에 대한 삼엄한 경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기사 속의 인물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 이다.
고희동은 어린 시절에 한문을 공부하다가 13세 때 한성프랑스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입학하여 4년 동안 프랑스어와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는 이 학교 재학 중 프랑스인 교사가 그리는 서양화를 처음 접하고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미술 공부 대신 20대 초반에 관계로 진출한다. 탁월한 프랑스어 실력 덕분이었다. 대한제국 내부 고문관으로 있던 벨기에인 대일광(戴日匡, Deleoigue, Conseilles)이 자신의 사무를 도우며 통역으로 일하던 고희동을 내부의 정식 관리로 채용할 것을 적극 추천하였던 것이다(황성신문, 1904.10.26.). 고희동은 이를 계기로 궁내부 서기로 임용되었고, 1907년 주사로 승진한 후에 다시 궁중의 외교 통역을 담당하는 궁내부 예식관(관보, 1908.3.4.)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고희동은 관직에 있는 동안에도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어진화가(御眞畵家)로 많은 후진을 양성했던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고희동은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게 되자, 23세가 되던 1908년 관직에서 물러나 동경미술학교로 유학한다. 그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에 전념하면서 졸업 작품으로 3점의 유화를 남긴다. 이 그림들은 습작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 자연주의 화풍을 보여주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두 점은 모두 '자화상'으로 한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개화 당시 청년의 모습을 그린 것과 정자관을 쓴 양반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자매'라는 제목으로 두 젊은 여인을 그린 그림도 있다. 고희동의 서양화가 국내에 처음 선보인 것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서였다. 그의 그림 '가야금을 타는 여인'은 일반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한국인의 서양화였는데, 작품의 모델이 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고희동은 중앙학교에서 유화기법과 목탄 데생을 가르치며 근대적인 서양미술의 보급에 힘썼다. 1918년 민족미술단체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립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미술의 근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서양화에 쓰이는 모든 미술 재료가 비싼 수입품이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결국 1920년대 중반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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