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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804회 작성일 2010-05-27 22:34
정진석(41회) 추기경, `나와 6·25`를 읽고

본문

[나와 6·25] [시리즈·끝] "역사는 말합니다…

 

자신을 지킬 능력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43·끝] 정진석 추기경 '나와 6·25'를 읽고

용서에도 조건이 있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한마디 사죄 없는

그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피란 못가 서울에 있다가 인민군에 잡혀…

 

의용군 입대 거부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

폭탄과 지뢰에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는 동료들 보며

사제의 길로 들어서

"'나와 6·25' 기사의 큰 글자(제목)만 봐도 60년 전이 바로 회상이 됐어요. 평소 기억하기 싫은 얘기지…. 너무나 비참해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잊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직접 체험한 것처럼 실감이 났어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鄭鎭奭·79) 추기경은 지난 20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 1학년 재학 중 발발한 6·25 때문에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그 이전까지 '발명가'를 꿈꿨던 청년이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후 '인간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 즉 사제로 진로를 변경한 것이다.

 

정 추기경은 마침 천안함 사고원인 조사결과 발표가 있던 이날 인터뷰에서 '용서의 조건' '정의' '평화'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했다.

 

평소 사적(私的)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정 추기경은 이날 자신이 경험한 6·25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는 특히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라틴어 격언을 소개하며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0일 명동성당 집무실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나와 6·25’ 기사를 읽으면서 60년 전의 처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며 용서의 조건과 정의,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6·25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조선일보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나와 6·25' 기사가 40회 넘게 연재됐습니다. 신문에 실린 체험담을 읽으시며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나 혼자만의 체험이 아니었구나, 민족 전체의 크나큰 비극이었구나'하는 것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한 맺힌 글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의 의미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은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진정한 용서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서 '용서'는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종교인이니까 조건 없이 용서해줘야 한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용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도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건이 있습니다. 죄의 인정, 잘못했다는 자기반성,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는 뉘우침, 공개적 자백, 그리고 보상입니다. 집안에서 꼬마가 아무도 안 보는데 꽃병을 깼다고 합시다. 우선 자기가 깼다고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뉘우친 후, 가족들에게 고백하고, 꽃병을 새로 마련하는 단계라고 보면 되지요. 이 다섯 가지 요건을 다 포함한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용서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상대가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테고요."

―6·25전쟁과 관련해 '용서'를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전쟁은 불의한 공격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도 불의한 공격입니다. 불의한 공격자가 용서받으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용서는 정의에 입각한 용서라야 합니다. 불의가 정의로 회복돼야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받을 수도 있습니다. 불의가 정의로 회복된다는 것은 질서를 뜻합니다. 질서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고, 질서가 회복되려면 정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 역시 정의를 기초로 해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인데 정의와 질서가 회복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요."

―6·25전쟁의 경우, 학계 연구를 통해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다 밝혀졌습니다. 방금 말씀은 북한에 대한 용서의 조건을 말씀하신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전쟁에 해당됩니다. 전쟁 범죄자는 불의한 공격자입니다. 수많은 인명이 억울하게 살상된 것을 인간이 어떻게 함부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불의한 공격자는 의도적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생명이 희생된 것을 과연 어떻게 보상하겠습니까.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2006년에 개정판을 낸 저서 '목동의 노래'엔 6·25 당시 인공 치하에서 고초를 당하는 젊은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동생은 폭격으로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숨지는 장면도 나오고요. 추기경님 본인의 이야기입니까?

"픽션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 이야기입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숨진 동생은 6촌 동생이고 저는 구사일생으로 살았지요. 저는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었습니다. 책에도 대략적인 팩트를 썼지만 숨어 있다가 가택수색에 걸려 '반동분자'로 끌려가 죽거나 의용군에 끌려갈 뻔 했습니다.('목동의 노래'엔 취조를 받던 중 '죽기 싫어 의용군 나가지 않았다'는 그에게 인민군 장교가 권총을 장전해 겨냥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이번에 조선일보 연재를 보니까 거기에도 저처럼 기적으로 살아난 분들 사연이 있더군요. 그때를 살아본 분은 알겠지만 살아난 사람도 그때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를 기적이 많았어요. 그때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살아남는다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평소 자신과 관련된 사적인 이야기를 극구 사양한다. '목동의 노래'에도 자신의 이야기가 '나'가 아닌 '그'를 주인공으로 서술돼 있다. 정 추기경은 "가능한 한 내 주관을 떠나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월간조선 등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정 추기경은 중공군 대공세가 있던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해 경남 마산까지 도보로 피란했다가 기간사병에 지원하고, 이어 국민방위군 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미군 보급창에서 근무했다. 그는 국민방위군으로 서울에서 마산까지 피란 가던 시절에 아사(餓死)·동사(凍死) 그리고 지뢰를 밟아 숨져가는 동료를 눈앞에서 무수히 목격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묵상하고 1954년 가톨릭대 신학부로 진학하게 됐다고 한다.)

―그럼 9·28수복 후에 국군에 입대하신 것인가요?

"1·4후퇴 직전입니다. 그때 통역장교로 배치받은 곳이 요즘으로 치면 미군 기계화부대였어요. 미군이 공수해온 자동차, 탱크, 대포 등을 수리하는 부대였어요. 직접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전쟁 무기를 매일 다루면서 놀랐습니다. 제가 원래 발명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 모든 전쟁무기가 기막힌 발명품들이었어요. 자동차 베어링을 전차와 대포에도 그대로 끼워서 쓸 수 있었어요. 원래 개발될 때는 선용(善用)될 목적이었던 기계가 성능 좋은 살상무기로 쓰이는 거예요. 그 시절 미국의 쉰 주교님이 쓴 책을 읽게 됐어요. 그분은 이미 당시에 '원자탄을 성인(聖人)이 가지면 원자에너지, 원자력이 된다'고 적었어요. 그 말씀을 지금도 외우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이 문제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상황에서 개인적인 고통을 겪고, 참상을 보게 되면 스스로도 잔인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복수 말씀이죠?
이스라엘 율법에 동태복수(同態復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요. 그렇지만 복수가 반복되면 인간성이 말살됩니다. 그러니까 '복수는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6·25전쟁을 겪은 분들은 "'나와 6·25'가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 좋은 교훈을 준 기사"라는 반응을 보내오십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 한 말씀 해주신다면.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시 비스 파쳄 파라 벨룸(Si vis pacem para bellum)' 즉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역설적인 말이 있습니다. 이 격언은 적어도 정당방위의 능력이 있어야 의롭지 않은 공격을 예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으면 자유와 평화를 빼앗깁니다. 우리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죠."

―오늘(지난 20일) 오전에 천안함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북한의 공격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불의한 공격에 대한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서해에 그런 공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면 대비를 했을 것이고, 그런 비극이 없었을 것입니다. 철저한 대비가 있었다면 북이 그런 유혹을 받았겠습니까?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추기경께서는 평양교구장 서리도 겸하고 있습니다. 현재 파주 통일동산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축 중이시지요? 분단의 현장 바로 근처에 성당을 세우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전쟁 범죄자는 소수이고 국민 전체가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피해자끼리도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옳지 않은 짓을 한 경우가 있어요. 그건 어느 전쟁터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도가 없이 상호 간 전쟁 중에 피해를 입힌 경우, 용서하고 참회하고 마음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성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성당에 가서 실컷 울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판문점은 불과 10㎞ 거리입니다. 판문점이 전쟁과 분단의 상징이라면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용서와 화해의 상징이 되었으면 합니다. 6·25전쟁을 겪은 분들과 후손들, 마음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서 위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서울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를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던 1950년에 발발한 6·25를 겪으면서 인생진로를 바꿨다. 1954년 가톨릭대 신학부로 진학, 1961년 사제품을 받았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대에 유학, 교회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 만 39세의 나이로 당시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로 서품됐다.

 

28년간 청주교구장을 지냈으며, 1998년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고, 2006년 3월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추기경에 임명됐다.

 

평소 외부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업무에만 몰두하는 그의 취미는 독서와 저술. 전공분야인 교회법 해설서 15권을 비롯해 40여종의 저서와 역서를 내놓았다.

 

 

정진석 추기경이 명동성당 집무실에서 자신이 겪은 6.25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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