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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터뷰] "개인주의 秀才는 곤란
… 야구 통해 협력할 줄 알게 하면 큰 투자"
'33년간 단 1승' 서울대 야구팀 맡은 이광환 감독
프로야구 명장(名匠)이 대학야구 만년 바닥 팀을 맡겠다고 나선 건 실로 희한한 선택이다. 이광환(李廣煥·62) 서울대 신임 야구부 감독, 야문 신념으로 무모한 도전을 거듭했던 그이기에 이번 결정 역시 화제다.그는 야구인들의 선망인 프로야구 사령탑을 네 팀에서 모두 다섯 번 지내다 번번이 임기 전에 물러났고, 바다낚시로 세월을 낚으며 평정을 구했다. 선발투수 예고 같은 혁신이 이단 취급을 받을 때엔 ‘당장의 성적은 양보해도 야구철학은 못 버린다’고 버텼다. 신임 감독은 33년 역사에 1승뿐인 약골 팀을 맡아, 골이 심하게 팬 감독 이력의 요철(凹凸)을 또 어떻게 변형시킬까? 서울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 상대팀 감독이 1실점을 못 견뎌 단체기합을 줬고(1996년 동국대 35대 1), 신승을 거둔 상대 감독은 선수 전원에게 삭발령을 내렸다는데(1986년 연세대 6대 5), 감독은 말석 팀의 그런 형편을 못 들어 봤을까?
- ▲ 이광환 서울대 신임 야구부감독은 어릴 적엔 '차돌', 중앙고 감독 시절엔 '육사교장'으로 불렸다고 말했다. 그는 "깐깐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사실 고집은 별로 안 세고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만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계산이 안 돼요. 여태껏 1승이라는데, 패수(敗數)는 세봐야 뭐해. 아마추어 돌풍? 한강의 기
적이 (1승 추가보다) 더 쉬울 거야.”
―강직(降職)을 왜 자임했습니까?
“야구발전에 보탬이 되고 봉사하는 거니까. 젊은 친구들과 같이 뛰는 것만으로도 좋잖아요. 1977년 창단돼 기술 향상은 적었지만 명맥을 이어 온 것도 고맙고. 수재(秀才)가 개인주의자가 돼선 안 돼요. 야구로써 협력할 줄 아는 인재를 키우는 게 얼마나 큰 투자입니까? 그래서 유영구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부탁에 응한 거예요. 언젠가 또 이길 수도 있을 거고.”
―프로 복귀를 위한 전 단계인가요?
“난 할 만큼 했어요. 내가 야구에 기여할 수 있는 데서 하면 되지. 아직까지 프로 감독 욕심 내면 그건 노욕이지요.”
―‘몇 년 내 4강 진입’ 이런 포부는 없나요?
“여긴 프로도 아닌데 무슨 취임 선서가 필요해요? 성적에 큰 의의를 두진 않아요. 여태껏 서울대는 무보수 감독들이 띄엄띄엄 봐줘왔는데, 야구계 제자들과 함께 좀 더 체계적으로 손을 봐줄 거예요.”
―언제부터 활동하십니까?
“당장에라도 운동복 입고 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벌써 잠이 안 와.”
―그 불면은 설렘 탓인가요?
“학교 야구장이 실망스러워. 맨땅에다 야간조명이 침침한 야구장 하나를 교내 야구 동아리 50개가 서로 쓰겠다고 노상 북적대. 최고 학부가, 그것도 야구를 정식 체육과목으로 뒀다는데, 변변찮은 야구장이 가당키나 해? 네이밍(naming·기업 상대로 기부를 받고 대신 구장 명칭을 빌려주는 일)을 하건, 모금운동을 하건, 돌아다녀야 할 판이에요.”
―구장보다 선수 실력이 문제 아닌가요?
“선수 발굴, 장비 확충도 물론 해야죠. 그런데 가뜩이나 열악한 구장 공간이 점점 건물로 잠식돼 가고 있어요. 학생들 열정만큼은 인정할 만한데 그마저 사그라지면 안 되는데….”
―현역시절 어떤 선수였습니까? 수비 위치(유격수)나 체구로 보면 교타 준족이었을 것 같은데.
“3·4번 타순에서 홈런도 곧잘 쳤어요. 이영민 타격상(고교야구 최고타자상)도 받았는데. 허허, 이제 옛날 얘기지만.”
―1986~87년 일본·미국에 해외 야구연수를 떠나면서 ‘자의반 타의반 귀양살이’라고 표현했지요.
“(감독과의 불화설을 묻는 질문에 말을 아끼며) 그냥 유학이라고 해 두세요. 있다고 남 칭찬하고 없다고 남 흉보는 건 아둔한 짓이니까.”
―연수 후 선발투수 예고제 같은 신(新)문물을 처음 들였죠?
“선발 예고를 한다니까 선수들은 ‘며칠 쉬면 감(感) 잃는다’, 구단은 ‘쓸 만한 자원을 왜 사나흘씩 놀리느냐’, 타팀과 언론은 ‘혼자 잘난 척한다’고 야단이 났어. 1대 99로 싸우는 느낌이랄까, 첫 개혁은 실패했지. 개혁은 힘든 것이란 걸 배웠어요.”
―낭만적 기개(氣槪) 때문에 사표를 낸 적은 없나요?
“성적이 나빠 잘릴 때가 돼서 잘린 거지. 목청 높이다 윗사람한테 밉보였고.”
―구단주·팬·선수·상대팀·언론 중 누구 중압감이 가장 버겁던가요?
“초창기엔 패하면 (극성팬들이) 연좌시위하고 청문회 열자 했지. 때로 소주병 집어던지는 통에 종이상자를 머리에 이고 빠져나왔으니까. 팬들 사랑이 야구를 살찌우지만 감독으로서의 철학을 그 사람들 얼굴 보고 바꿀 순 없었지요.”
―프로 감독으로서 다섯 번이나 실직통(痛)을 어떻게 견뎠죠?
“자꾸 잘리다 보면 발전이 있지. 공부하고 인간관계·소통방식도 자꾸 돌아보게 되고. 불자(佛子)는 아니지만 수양 삼아 사찰 다니고 낚시도 했지.”(구본무 당시 LG 구단주는 해임 후 서귀포에서 낚시로 소일하던 그를 2003년 시즌 감독으로 부르면서 “성찰할 줄 아는 인품을 보고 맡겼다”고 했다고 한다.)
―특정선수 트레이드설이 돌자 ‘차라리 나를 자르라’고 했죠?
“2003년 LG 때인데 구단이 이상훈·유지현·김재현을 시즌 후 내보내겠다는 거야. 팀을 재건하려면 기둥을 하나씩 바꿔야 하는 법인데 셋을 한꺼번에 빼니 응당 집이 무너지지. 팀이 안타까웠고, 선수들한테 미안했지. 나는 (2군 감독으로) 강등됐고 팀은 성적도 애정도 잃었어요.”
―애착 가는 선수가 따로 있죠?
“내가 누굴 키웠다는 말을 싫어해요. 자꾸 ‘누가 누구를 조련했다’ 그러는데 선수가 동물인가? 내가 주례는 여러 번 섰어도 선수(제자) 주례는 안 했어. 예뻐해도 그런 티는 안 내야 하니까.”
―안 맞는 이도 있었을 텐데.
“내 조직철학은 2:2:6, 조직 내 여당이 2, 야당이 2, 중도가 6이에요. 파벌을 없애고 야당을 여당으로 끌어들여도, 야당이 2는 유지되기 마련이에요. 괘씸해도 능력 있고 될 사람은 써야 해. 난 그래서 ‘내 사람’이 없고, ‘독립군’으로 불려요.”
―아직도 사무친 장면이 있다면.
“1993년 삼성 상대로 플레이오프 최종 5차전 1점 뒤진 상황에서 3루 주자 김선진이 판단착오로 횡사해 결국 졌어. 1년 농사 다 망치고 초상이 났지. 그 일로 선수 대신 애꿎게 수석코치(이종도)가 옷을 벗었어. 그런데 이듬해 김선진이 태평양하고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홈런을 쳐 기선을 잡고 4연승 우승했잖아. 실수했다고 (사람) 내칠 게 아니고 실패해본 사람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야구는 인생살이하고 참 닮았어요.”
―1995년 서귀포에 야구박물관을 지었죠?
“우리한테 스포츠만 있고 스포츠 문화는 없다고 느꼈어요. 프로세계에 돈이나 승패 이상의 귀한 가치가 있다는 걸 선수들한테 가르치고 싶었어.”
―2008년 재정 상태를 의심받던 신생 히어로즈 감독을 맡았죠?
“프로야구 전체를 살려야 했으니까. 연봉이 다른 감독 반쯤이었지만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어. 감독은 명예직이야. 그 팀을 자꾸 비관적으로 보는데, 남들 꺼린 일 맡아 잘 해왔잖아. 그럼 고마워해야지.”
그의 외골수는 일찍이 싹을 보였다. 대구상고 1학년 중 유일한 주전선수였던 그가 1인 시위를 벌이는 통에 곡절 끝에 서울로 전학 온 것이다.
―전학 파동 전말은 뭡니까?
“체육부장이 야구감독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어요. 부당하다고 여겨 졸업반 빼고 1·2학년 전원이 파업하기로 했는데, 나 혼자 끝까지 남았어. 다행히 중앙고로 옮겨 야구를 계속했지.”
―이 감독의 자율야구가 팀의 독기(毒氣)를 빼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의자를 바짝 당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훈련의 큰 틀만 정해주고 선수가 자율적으로 운동해 그 책임을 지운 거니까, 그게 더 무서운 거죠. 내가 안 했어도 누군가 했을 거고, 남들 뒤를 그냥 줄줄 따라갔으면 쉽게 갔을 일을 먼저 해서 매 맞은 거요.”
―프로야구 누적관중이 지난달 1억명을 넘었습니다.
“우리 선수들 체력과 기술은 많이 발전했죠. 그래도 만년 호황이 있나요? 사랑받을 때 잘 준비하고 격을 높여야죠. 지도자들 공부 많이 해야 돼요. 자리 기웃대고 연(緣) 대고 줄 서고 하는 ‘정치 코치’한테 아이들이 뭘 배우겠어요.”
―왜 야구가 국민스포츠여야 합니까?
“희생번트·희생타, 이런 야구용어만 봐도 철학과 인성이 있잖아요? 육법전서 통달했다고 법조 비리 안 없어져요. 희생·협동·준법·인내·배려 이런 것들이 다 야구에 있어요. 그 점이 서울대를 맡은 이유이기도 하지요.”
―야구 발전을 위해 또 무엇이 필요한가요?
“선수들한테 베스트(best) 정신을 가르쳐야 해요. 서로 최선을 다해 승자를 가리는 거죠. 그런데 자꾸 남을 깎아 비교우위를 챙기는 베터(better) 정신에 빠져 문제예요. 현재 학교 야구는 1% 프로 생존자만을 위한 선수공장이에요. 내년 고교 야구부터 홈 앤드 어웨이 주말경기로 바뀌니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풍토가 될 겁니다.”
인터뷰를 마감할 무렵, 감독은 작별의 악수를 건네며 또 ‘운동장 타령’을 했다. “일본 도쿄대와의 연례 정기전이 친선경기라 해도 매년 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럴 듯한 교내 경기장을 갖추고 훈련해 꼭 이겨야죠.” ‘고집’과 ‘꼴찌’가 만들어낼 화음은 어떤 색감일까? 꼴찌의 반란을 꿈꾸는 승부사의 세찬 박동이 전해졌다.
이광환 감독은... 중앙고·고려대(경영학과)·경리단(육군)·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중앙고(1977~80년)와 프로야구 OB 베어스(1989~90년), LG 트윈스(1992~96·2003년), 한화 이글스(2001~2002년), 히어로즈(2008년) 감독을 지냈다. 프로 원년(1982년) OB 코치로, 1994년 LG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1986년 일본(세이부 라이온스)과 87년 미국(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투수보직제·선발예고제를 처음 도입했다. 서울대·한국야구위원회(KBO)·대한야구협회(KBA)의 야구지도자 전문 교육프로그램 ‘베이스볼 아카데미’ 공동원장, 여자야구연맹 부회장, 티볼(T-ball)협회 고문을 맡고 있지만 ‘감독’ 호칭이 가장 편하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 대항 야구경기를 하다 발탁됐다. “당시 살던 대구 남문시장 주변이 우범지대였는데 야구 덕에 뒷골목 탕아가 되는 걸 면했다. 야구에 보은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만물상] 서울대 야구감독 이광환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1992년 야구협회는 서울대 야구부와 치른 경기의 타율은 공식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발표했다. 서울대가 열에 여덟 경기꼴로 콜드게임 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한 회 20점을 잃고 35대1로 진 적도 있다. 서울대 팀은 순수 아마추어다. 고교 팀과 갖는 연습경기도 번번이 진다. 공이 덜 날아가는 나무배트가 대학야구에 도입된 2000년 이래 홈런을 하나도 못 쳤다.
▶1994년 봄철 대학야구대회가 열린 동대문구장에선 안타를 친 서울대 선수가 베이스를 밟고도 아웃됐다. 공식대회 첫 안타를 때렸다는 감격에 방향 감각을 잃고 3루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불러주는 대회엔 빠짐없이 출전하지만 97년 봄철 리그엔 못 나갔다. 대학야구연맹에 등록비 300만원을 못 내 참가자격을 잃은 탓이다. 한 해 학교 지원금 800만원으론 대회마다 대여섯개씩 부러지는 배트 값 대기도 빠듯하다.
▶서울대는 재창단 27년 만인 2004년 가을리그에서 신생팀 광주 송원대에 2대0 첫 승리를 거뒀다. 끊임없이 갱신하던 한국 스포츠 연패기록을 199경기에서 멈춰 세우는 순간이었다. 선수와 감독이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야구광인 정운찬 당시 총장이 너무 기뻐 야구부 연습장에 야간 조명등을 선물했다. 그리곤 다시 56연패. 서울대 출신 교사 탁정근 감독이 2002년부터 주머닛돈을 털어 넣으며 이끌고 있다.
▶서울대 새 감독에 62세 이광환씨가 내정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서울대가 설립하는 야구지도자 육성프로그램 '베이스볼아카데미' 원장에 선임된 김에 야구부까지 맡았다. 그는 1989년 OB베어스를 시작으로 2008년까지 4개 프로구단 감독을 지냈다. 1994년엔 미국식 자율야구로 LG를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그의 서울대행(行)은 대학 총장이 시골 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격이다.
▶이 감독은 야구 사랑 퍼뜨리기에 열심이다. KBO 육성위원장을 지내며 여자야구연맹과 전국대회를 출범시켰다. 막대기 위에 공을 올려놓고 때리는 티볼을 초등학교에 보급했다. 어린이들에게 야구의 맛을 깨우쳐주는 '야구의 씨앗'이다. 그가 지휘해도 서울대가 꼴찌를 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도 "최고 엘리트 서울대생들이 야구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원로 야구인이 '아름다운 꼴찌'와 어깨를 겯고 가는 길이 아름답다.
[피플] 서울대 야구팀 감독 맡은 '야구 전도사' 이광환
… 한국 야구 격 높여 팬들 사랑에 보답해야죠"
맨땅에 장비 열악하고 선수도 부족
… 우선 인조잔디 마련이 가장 시급
'베이스볼 아카데미' 통해 지도자 양성
… 티볼도 적극 보급해 저변 넓혀야
관중 1억명 시대가 열렸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28년째인 2010년 5월30일 통산 관중 1억명을 넘어섰다. 가장 인기 있는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야구장은 남녀노소 누구나 찾는 건전한 놀이 공간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유영구 총재와 대한야구협회(KBA) 강승규 회장은 '야구의 인기만큼 지도자의 능력과 지식이 함께 발전해야 진정한 야구 강국 될 수 있다'데 인식을 같이 하고 지난해 말부터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와 함께 지도자 육성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지난달 27일에는 서울대 이장무 총장, KBO 유영구 총재, KBA 강승규 회장, 이광환 초대 원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학교 호암 교수회관에서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부설'베이스볼 아카데미'개설을 위한 MOU 협약식을 가졌다.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 겸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된 이광환(62) 전 히어로즈 감독을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만났다.
- 프로야구 감독 출신 중에서 처음으로 순수 아마추어 야구팀의 사령탑을 맡았다.
"서울대학교 부설 기관으로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대 야구부를 맡게 됐다. 야구가 좋아 모인 수재들에게 팀 플레이의 매력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싶다. 야구는 단체 운동이면서도 개인 운동이다. 조직에 대한 희생을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종목인 만큼 선수들에게도 이런 점을 강조할 것이다."
- 그동안 몸 담았던 팀과는 전혀 다른 환경인데.
"모든 것이 열악한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먼저 맨땅 야구장을 정비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장비도 부족하고, 선수도 적다."
서울대 관악캠퍼스에는 종합 체육관 옆에 야구장이 딱 하나 있다. 20여개의 야구 동아리까지 이곳을 쓰고 있기 때문에 정식 야구부도 사용에 제한을 받고 있다. 그나마 정운찬 총장 시절 조명 시설을 갖춰 밤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광환 원장이 감독을 맡으면서 갖게 된 유일한 바람은 야구장에 인조 잔디를 까는 것. 정식 선수는 물론 동아리 야구를 하는 학생들까지 보다 안전하게 마음껏 야구를 즐기려면 꼭 필요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호암 교수회관'처럼 네이밍 마케팅을 통해 야구장 시설 개선을 위해 기부하는 기업에게'00 야구장'이란 이름을 붙어주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베이스볼 아카데미'는 강의실과 체육관, 야구장 등 서울대의 모든 시설을 이용해 이론 교육과 실기 교육을 병행한다.
- 서울대학교와 함께 야구 교육 기관을 만들었다. 어떤 성격의 교육 기관인가.
"일단 제대로 된 지도자 양성을 위한 커리큘럼으로 시작하지만 앞으로 구단의 프런트 등 행정 요원들의 교육까지 범위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당초 '코치 아카데미'였던 이름을 '베이스볼 아카데미'로 바꾼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체육과학연구원에도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이 있는데.
"우수한 전문 지도자 양성을 위해 특화 시키는 차원이다. 엄격한 자격 심사와 관리를 통해 크고 작은 부작용을 사전 예방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 어떻게 운영되나.
"서울대학교는 교육을 맡고, 자격증 부여와 관리는 KBO와 KBA가 담당한다. 교육 과정을 정상적으로 수료하면 서울대 총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대한야구협회 회장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수료증을 받게 되고 지도자 자격증은 프로와 아마를 분리해 각 단체장이 주게 된다. 일회성 자격 부여가 아니기 때문에 5년 안에 자격 유지를 위한 보수 교육도 진행할 것이다."
오는 11월 정식 개원하는 '베이스볼 아카데미'는 일단 마스터(Master), 리더(Leader), 인스트럭터(Instructer)급 지도자 과정으로 시작한다. 과정당 총 수업 시간은 똑같이 120시간이다.
마스터급은 현직 프로 코치나 경력자, 프로 선수로서 10년 이상 활동한 이들을 대상으로 5주 동안 주 5일, 하루 6시간씩 야구 사회학, 인문학은 물론 운동 역학과 야구 영어 등을 교육한다.
리더급의 경우에는 인스트럭터급 지도자 자격 소지자 또는 현재 대학이나 고교의 지도자로서 2급 지도자 자격을 가졌거나 2년 이상 경력이 있어야 한다. 인스트럭터급 과정은 대한야구협회 선수 경력 5년 이상이거나 이에 준하는 해외 선수 경력을 인정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밖에 인스트럭터급 지도자 재교육반을 봄, 가을 2회에 걸쳐 총 60시간 동안 운영한다.
- 학사 관리는.
"등록만 하면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지도자가 되기 위한 관문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큰 목표가 있기 때문에 낙제생이 나올 수도 있다. 무료 교육은 효과가 현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수업료를 받는데도 낙제를 하면 수료증을 주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선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관계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중앙고-고려대-한일은행에서 현역선수로 활약하다 일본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와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야구 연수를 한 뒤 OB 베어스(1989~90년), LG 트윈스(1992~96년, 2003년), 한화 이글스(2001~2002년), 히어로즈(2008년)에서 감독을 역임한 이광환 원장은 '야구 전도사'다.
제주도에 야구 박물관을 만들었고, 서귀포에 강창학 구장을 만들 때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KBO 육성위원장 시절에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티볼'보급, 여자 야구의 활성화를 위한 협회 결성 등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오는 8월 베네수엘라에서 열리는 세계여자야구대회 때는 선수 단장으로 참여한다.
서울시의 남산 복원 사업에 따라 곧 사라진 장충 리틀구장을 떠올릴 때면 긴 한숨만 내쉰다.
-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많은 일을 했는데.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바로 어린이와 여성들에게 야구를 알리는 일이었다. 정진구 전 현대 단장과 함께 뜻을 모아 한국여자야구연맹을 만들어 부회장이란 직함을 달게 됐고,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야구의 기본 틀을 익힐 수 있는 '티볼'확산을 위해 초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갖고, 용품을 지원하는 사업을 했다."
'티볼'은 야구의 씨앗 같은 종목이다. 기본 틀은 야구와 같지만 공을 던져주는 투수가 없고, 공이 딱딱하지 않다. '티'위에 올려놓은 소프트한 공을 방망이로 때리면 된다.
- '티볼'의 장점.
"남녀가 한 팀이 돼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경우 각각의 팀원 15명 중 여자가 5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을 만들었고, 주전 10명 중에선 반드시 3명은 여학생이어야 한다고 못 박아 놓았다.
현재 한국티볼협회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고, 이광환 원장은 고문을 맡고 있다.
'티볼'을 즐기던 어린이들이 성장하면 남자는 리틀 야구, 여자는 소프트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런 이어가기가 된다. 누구나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에'국민 스포츠'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여자 야구를 활성화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2008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여자야구대회에 처음 나갔다가 세계와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일본이나 미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고, 우리의 수준이 홍콩이나 인도 정도였다. 운동장도 없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부족하다 보니 여자 축구와 달리 여러 면에서 많이 뒤처져 있다. 소프트볼을 하는 여자 선수들이 많아지면 여자 야구 쪽도 함께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광환 원장은 지도자 문제로 크고 작은 일이 터질 때마다 화끈 달아오른 부끄럼 탓에 안절부절했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던 탓이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지도자가 많이 나와 아이들을 지도해야 보다 큰 꿈과 희망을 갖게 된다.
한국 야구는 베이징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를 통해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섰다.
이광환 감독은 "이제부터 격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노력하고, 공부함으로써 팬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워야 한다"고 힘주어 덧붙인다.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