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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11시 서울 중앙고 음악실에서는 50년 전 중앙고 학생으로 4·19에 참여했던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학생들의 대화가 시작됐다. 남 전 장관은 ‘시위할 때 경찰이 총을 쏴서 무섭지 않았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에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무서웠겠지만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견뎌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당장 시위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공부에 전념할 것인지는 자기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문제지만, 그 판단의 기준은 정의와 자유, 평등 같은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공감을 표시하는 듯했다.
‘4·19혁명은 잘 모르지만, 4·19정신은 체화한 세대.’
<한겨레>가 4·19혁명 50년을 맞아 당시 주요 참가 학교였던 서울 중앙고 3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4·19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조사’는, 민주주의적 감수성이 발달하고 정치적 의사 표현에 익숙한 최근 10대들의 특성을 확인해 준다. 4·19가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전체의 92.5%가 ‘매우 또는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대답했다. 4·19 세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문학평론가)은 “지난 2008년 촛불의 주역이었던 이들이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지킨 4·19 정신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둘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4·19와 촛불집회는 모두 학생들의 자연발생적인 참여로 시작됐고, (그 때문에) 명확한 지도부가 없었다. 둘 다 요구 사항은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4·19의 구호는 ‘부정선거 반대’와 ‘민주주의 회복’이었고, 2008년 촛불집회 때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외침이었다. 주요 배경도 도심 한가운데인 세종로·태평로 등으로 같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는 “4·19는 이후 한국 사회를 움직인 모든 민주화 운동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10대 후반인 고등학생들이 성장하게 된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지금 고등학생들은 1992~94년께 태어나 2000년대 초중반 세상에 눈뜨게 됐다. 이 시기는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자유스러웠던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기와 겹친다”고 말했다. 10대들이 자유와 인권이라는 민주주의적 감수성을 체화하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월 <조선일보>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만 20~24살이 되는 ‘지(G)세대’들은 100년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 1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았다. 10대들의 진보적 정치성향의 원인으로 △논술교육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소통 등에 주목하는 연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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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꿈꾸는 바람직한 미래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한겨레>는 이 질문에는 특정한 보기를 주지 않고, ‘○○한 나라’로 끝나는 한 문장으로 답변을 적어보라고 요청했다. 이후 학생들이 제출한 문장에서 사용한 주요 단어를 중심(중복 허용)으로 답변을 유형별로 묶어 봤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인 ‘강대국’ ‘선진국’ ‘경제발전’ 등의 단어는 100개 답변 가운데 31번 등장했다. 그다음으로는 ‘민주주의’(17번), ‘복지’ ‘평등’(14번), ‘통일’(10번), ‘국민 존중’(7번) 등의 단어 사용이 많았다. 경제성장과 선진국 진입 등의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민주주의·복지·평등·통일·국민존중 등의 다른 가치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매일경제>의 지난 3월 조사에서도 19~25살 청년들은 미래 한국의 발전 모델을 묻는 질문에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56.6%)를 꼽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23%)를 꼽은 이보다 두배나 많았다.
10대들의 순수한 열정을 기성세대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사회학)는 “아직 세상에 때묻지 않은 10대들은 양심에 기초해 여러 사회적 사안들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 하지만, 국가와 사회는 이들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면서 보호와 계도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20대가 된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은 대단히 높지만 정치에 관심을 잃고 무기력한 ‘88만원 세대’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