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삼손' 야생마, 김주성 > 교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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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007회 작성일 2009-12-31 00:23
'아시아의 삼손' 야생마, 김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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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창조했다. 멕시코에서 개선한 청소년대표팀은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대한축구협회는 이들을 ‘88팀(88 올림픽 축구팀)’이라고 명명했다. 청소년대회 4강 멤버를 주축으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88팀 최고의 스타는 신연호, 김종부 등 4강 신화의 주역이 아닌 무명의 김주성이었다.

A매치 데뷔전서 데뷔골 '깜짝 활약'

'스타탄생' 스토리가 늘 그렇듯 김주성은 깜짝 활약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5년 1월 1일 부산 구덕경기장에서 월드컵대표팀과 88팀의 평가전이 있었다. 예상을 깨고 88팀이 2-1로 승리했는데, 결승골의 주인공이 김주성이었다. 월드컵 대표팀과 88팀은 그해 6월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변병주의 결승골에 힘입은 월드컵대표팀이 1-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가장 멋진 활약을 펼친 선수는 88팀의 16번 김주성이었다. 김주성은 매 경기 폭발적인 공격력을 선보이며 축구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월드컵대표팀에 발탁됐다.

 

7월 21일 잠실 주경기장.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인도네시아와의 홈경기가 벌어졌다. 한국은 전반부터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고도 ‘전원 수비’를 펼친 인도네시아의 벽을 뚫지 못했다. 김정남 감독은 후반전에 김석원 대신 김주성을 투입해 승부를 걸었다. 이 작전은 적중했다. 김주성이 들어가면서 경기가 풀리기 시작한 것. 한국은 변병주의 선제골에 이어 김주성의 추가골까지 묶어 2-0으로 승리했다. 대표팀에 새로 발탁됐던 김주성은 A대표팀 데뷔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7월 30일에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도 1골을 기록하면서 4-1 승리에 기여했다.

그 무렵 ‘페인팅의 귀재’ 김석원이 무릎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되면서 김주성이 그 자리를 꿰찼다. 김주성은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일본과의 1, 2차전에서도 박력 있는 플레이를 펼치며 월드컵 본선에서의 활약을 예고했다.
 
'막내' 김주성, 86 월드컵 본선서 분투

김주성은 김종부와 함께 월드컵 대표팀에서 가장 막내였다. 당시 조선대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선배들에 비해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선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부터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했다. 상대 수비진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왼쪽 공격수로 기용된 김주성은 과감한 돌파와 함께 수비까지 적극 가담하는 등 폭넓게 움직였다. 두 번째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도 차범근과 함께 엄청난 운동량을 보였다. 이탈리아전에서도 마찬가지. 후반 김종부와 교체될 때까지 매 경기 전력을 다해 뛰었다. 3경기 모두 선발 출장한 김주성은 대회 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빛낼 예비 스타 10명’에 선정됐다.

 

아시아의 삼손, 최고 선수로 발돋움

월드컵에서의 활약상을 발판으로 김주성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됐다. 1986년 가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주역으로 활약했고, 이듬해에는 국내 축구 선수 사상 최초로 계약금 1억원에 대우(현 부산)에 입단했다. 김주성은 입단 첫해에 28경기에 출장해 10골을 터뜨리는 등 맹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상도 그의 몫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거치며 기량에 한층 발전을 보인 김주성은 이후 최순호와 함께 한국 축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아시아 최고 선수로 발돋움했다.

1989년에 벌어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도 발군의 기량으로 상대국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특히 최종예선의 고비를 넘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북한에 1-0으로 이긴 뒤 10월 20일 중국전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본선행의 8부 능선을 넘어섰다. 이 경기에서 김주성은 이영진의 크로스를 헤딩골로 연결시키며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5일 뒤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마저 2-0으로 격파하며 본선행을 확정했다. 김주성은 그해 아시아 최고 선수상을 수상했다.

김주성은 개성있는 헤어 스타일로도 관심을 끌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 스타일로 ‘야생마’, ‘아시아의 삼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부진

김주성의 명성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까지 알려졌다. 때문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큰 활약이 기대됐다. 더욱이 한국은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무패로 본선 진출을 결정지은 터였다. 일부에서는 8강행까지도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와 같은 조에 편성된 한국은 3전 전패를 당하며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6월 12일 베로나의 벤테고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별리그 첫 상대는 벨기에였다. ‘천재 플레이메이커’ 엔조 시포만 묶으면 승산이 있다던 예상과 달리 한국은 경기 내내 졸전을 펼치며 0-2로 완패했다. 이날 김주성은 신예 황선홍과 최전방에 배치됐으나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두 번째 경기인 스페인전에서도 세계적인 선수였던 미첼에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1-3으로 패했다. 한국은 황보관의 프리킥에 이은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마지막 경기 상대는 우루과이. 박경훈이 세계적인 공격수 루벤 소사를 잘 마크하고 김주성도 제 몫을 해내는 등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종료 직전 다니엘 폰세카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무릎을 꿇었다.

대표팀의 가장 큰 패인은 상대국에 대한 정보력 부재였다. 이 대회 참가국 대부분이 3-5-2 포메이션을 사용하면서 강한 압박 축구를 구사했지만 한국의 포메이션과 전술은 세계적인 흐름을 좇아가지 못했다. 또한 대회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두고 현지에 도착하는 등 시차 적응과 컨디션 조절에도 실패했다. 맹활약이 기대됐던 김주성의 경우 부상과 부담감 등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표팀 최고참으로 월드컵 3회 연속 진출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부진을 만회한 것은 그 다음해였다. 김주성은 1991년 K-리그에서 37경기에 출장해 14골을 터뜨리며 소속팀 대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89, 90년에 이어 또다시 아시아 최고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활약을 발판으로 1992년에는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으로 진출했다.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던 김주성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아시아 지역 예선 때부터 대표팀에 합류한 김주성은 어느덧 골키퍼 최인영 다음으로 팀내 최고참의 위치가 됐다. 김주성은 조별리그 스페인전과 볼리비아전에서 황선홍과 함께 최전방 투톱으로 나섰고 독일전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원숙한 공격 능력은 볼리비아전에서 빛났다. 특히 후반 종반 황선홍에게 기막힌 침투 패스를 보냈지만 문전에서 마지막 처리가 불발됐다.

 

독일전에서는 김주성의 진가가 드러났다. 전반전 초 위협적인 슈팅을 날리는 등 묵직한 공격력을 선보이자 독일 미드필더인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고의적인 반칙을 가하며 김주성을 괴롭혔다. 이를 지켜본 관중들은 전반전 종료 후 라커룸으로 들어가던 에펜베르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에펜베르크는 관중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는데, 이에 분노한 독일이 포그츠 감독이 경기 후 그를 조기 귀국시키는 특별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주성의 분전도, 한국의 투혼도 끝내 세계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더위 속에 한국은 0-3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2골을 몰아넣는 추격 의지를 보였지만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독일전을 끝으로 김주성의 월드컵 도전사도 막을 내렸다. 김주성은 월드컵에 3회 연속으로 참가해 9경기를 모두 선발 출장했고, 이 가운데 7경기를 풀타임으로 소화했다.

90년대 최고 축구 스타 김주성

김주성은 중앙고등학교 시절까지 철저한 무명이었지만 피나는 노력과 엄청난 연습량으로 90년대 한국 최고의 축구 스타 자리에 올랐다. 주포지션은 레프트 윙이었지만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능력을 발휘했다. 측면에서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가 장기였던 김주성은 양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탁월한 보디밸런스를 자랑했다. 신장 177cm로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몸싸움을 회피하지 않았고, 볼에 대한 집착력도 매우 강했다. 공격수 시절부터 수비력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났던 김주성은 1994년 월드컵 이후 대우로 복귀하면서 스위퍼로 전향했다. 1997년에는 다시 한 번 대우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생애 처음으로 K-리그 MVP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글. 김유석(축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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