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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소식

댓글 0건 조회 1,894회 작성일 2009-12-01 12:22
긴급조치 9호 세대 대탐험과 중앙동문 1

본문

 
國家安全과公共秩序의守護를爲한
大統領緊急措置
[제정 1975.5.13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1. 다음 各號의 行爲를 禁한다.
  가. 流言蜚語를 捏造, 流布하거나 事實을 歪曲 하여 傳播하는 行爲.
  나. 集會·示威 또는 新聞, 放送, 通信 等 公衆傳播手段이나 文書, 圖畵, 音盤 等 表現物에 의하여 大韓民國 憲法을 否定·反對·歪曲 또는 誹謗하거나 그 改正 또는 廢止를 主張·請願·煽動 또는 宣傳하는 行爲.
  다. 學敎當局의 指導, 監督下에 行하는 授業, 硏究 또는 學校長의 事前 許可를 받았거나 其他 依例的 非政治的 活動을 除外한, 學生의 集會·示威 또는 政治關與行爲.
  라. 이 措置를 公然히 誹謗하는 行爲.
2. 第1에 違反한 內容을 放送·報道 其他의 方法으로 公然히 傳播하거나, 그 內容의 表現物을 製作·配布·販賣·所持 또는 展示하는 행위를 禁한다.
3. 財産을 逃避시킬 目的으로, 大韓民國 또는 大韓民國 國民의 財産을 國外에 移動하거나 國內에 搬入될 財産을 國外에 隱匿 또는 處分하는 行爲를 禁한다.
4. 關係書類의 虛僞記載 其他 不正한 方法으로 海外移住의 許可를 받거나 國外에 逃避하는 行爲를 禁한다.
5. 主務部長官은 이 措置違反者·犯行當時의 그 所屬 學校, 團體나 事業體 또는 그 代表者나 長에 대하여 다음 各號의 命令이나 措置를 할 수 있다.
  가. 代表者나 長에 대한 所屬任職員·敎職員 또는 學生의 解任이나 除籍의 命令.
  나. 代表者나 長·所屬 任職員·敎職員이나 學生의 解任 또는 除籍의 措置.
  다. 放送·報道·製作·販賣 또는 配布의 禁止措置.
  라. 休業·休校·停刊·廢刊·解散 또는 閉鎖의 措置.
  마. 承認·登錄·認可·許可 또는 免許의 取消措置.
6. 國會議員이 國會에서 職務上 行한 發言은 이 措置에 抵觸되더라도 處罰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 發言을 放送·報道 其他의 方法으로 公然히 傳播한 者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7. 이 措置 또는 이에 의한  主務部長官의 措置에 違反한 者는 1年 以上의 有期懲役에 處한다. 이 境遇에는 10年以下의 資格停止를 倂科한다. 未遂에 그치거나 豫備 또는 陰謀한 者도 또한 같다.
8. 이 措置 또는 이에 의한 主務部長官의 措置에 違反한 者는 法官의 令狀없이 逮捕·拘禁·押收 또는 搜索할 수 있다.
9. 이 措置 施行後, 特定犯罪加重處罰等에關한法律 第2條(賂物罪의 加重處罰)의 罪를 犯한 公務員이나 政府管理企業體의 幹部職員 또는 同法 第5條(國庫損失)의 罪를 犯한 會計關係職員 等에 대하여는, 同法 各條에 정한 刑에, 收賂額 또는 國庫損失額의 10倍에 該當하는 罰金을 倂科한다.
10. 이 措置違反의 罪는 一般法院에서 審判한다.
11. 이 措置의 施行을 위하여 必要한 事項은 主務部長官이 정한다.
12. 國防部長官은 서울特別市長·釜山市長 또느 道知事로부터 治安秩序 維持를 위한 兵力出動의 要請을 받은 때에는 이에 應하여 支援할 수 있다.
13. 이 措置에 의한 主務部長官의 命令이나 措置는 司法的 審査의 對象이 되지 아니한다.


부칙 <제9호, 1975.5.13>

 14. 이 措置는 1975年 5月 13日 15時부터 施行한다.
 


[긴조9호세대대탐험58]

제2차 광화문연합시위(1)



‘캠’ 연대, 불가능의 벽을 깨라



알면 다친다.

긴급조치 9호 시대 운동권의 행동수칙 1호는 \'보안\'이다. 

같이 일을 도모할 상대가 어떤 위치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누구와 연결돼 있는지 모르는 게 좋다. 

이름, 학교, 출신지, 연락처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게 예의다. 

본의 아니게 알게 되더라도 철저히 기록을 파기하고, 기억에서도 완전히 

지워야 한다. 

언젠가 그게 화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잡히면 아는 것은 반드시 불게 돼 있다. 

수사기관은 피조사자가 헷갈리는 사실관계, 심지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까지 또렷하게 

되살려주는 ‘기술’을 갖고 있다. 

제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맷집이 좋아도 무엇이든 불게 만드는 ‘긴조9호 수사력’앞에는 소용이 없다.

알아서는 안 될 이름 ‘김준묵’

이우재(전 인사련 부의장)-성욱(현 청양농촌체험학교장)-김종복(현 캐나다 토론토 비벌리힐즈연합교회 목사)

은 도피중에 가명을 쓰고 신분을 위장했다.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김준묵(현 한국문화진흥 대표)도 그랬다.
 
실제로 이우재 외에는 모두 그를 김인철이라는 가명으로 알았지 본명은 몰랐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수사기관은 적어도 1978년 9-13시위 이전까지는 

김준묵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3명이 아니라 4명이 움직이는데, 그중 한 명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굉장한 거물로 보고 정체를 파악하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9-13거사 출정 직전, 가리봉동 은신처의 네 사람은 목욕탕에 갔다. 

거사 성공을 기원하는 목욕재계와 함께 잡힐 경우를 대비해 몸을 건사해두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얄궂은 일이 벌어졌다. 

옷을 벗다가 김준묵이 신분증을 떨어뜨린 것이다.
 
옆에 있던 김종복이 그만 주민등록증에 등록된 그의 실명을 보아버렸고, 9-13시위 현장에서 검거됐다.

이우재는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밤이 깊으면 취흥도 깊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
 
갈수록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침묵이 흘렀다. 

이우재-성욱-김준묵과 새로 합류한 양민호(현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 기약 없는 도망자 생활에 지친 

이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시간이 갈수록 짙어만 갔다.


“안 되겠다. 찢어지자!”

네 사람은 결론을 내렸다. 새로 마련한 시흥동 은신처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모여 있으면 잡히기 쉽다. 모여서 딱히 할 일도 없다. 10-17광화문거사는 다른 섹터에서 준비하기로 돼 있다.
 
9-13거사팀에게는 현장 야사(야전사령관)의 임무만 있었기 때문에 각자 잠복해 ‘지침’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들은 10월 9일 오후 6시에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앞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서로의 행선지를 묻지 않은 채.

긴조9호 운동의 정수는 철저한 비밀주의였다.
 
보안은 이 시기 운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아무리 좋은 안(案)이라도 보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실행할 수 없었다.
 
즉 조직 확대나 연대 활동 등과 같은, 외부에 노출되는 행동은 극도로 자제할 수밖에 없었고, 하더라도 

보안통제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내공’ 높은 운동권이 나섰다

서울대 9-13거사를 통해 예고한 10-17광화문연합시위는 긴조9호 운동의 특징인 이러한 보안 우선의 

불문율을 어긴 것이었다.
 
 6-26광화문시위는 무늬만 연합이었지, 실제로 이를 움직인 연합조직이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조직의 작용 없이 자발적으로 성사된 시위였다.
 
그런데 10-17거사는 달랐다. 학외조직을 통해 실질적인 연합시위를 하겠다는 것이 CT(컨트롤타워)의 

생각이었다.
 
연대든 연합이든 많은 인자가 관계하면 그만큼 보안통제는 어려워진다. 긴조9호 세대는 이를 모를 바보가 

아니었다.
 
2차 광화문연합시위를 기획한 것은 그런 상황을 무릅쓰고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야 할 정도로 때가 무르익었고,
 
자신감도 붙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긴급조치 9호 하의 연합시위는 성공한 예가 거의 없다.
 
긴조9호 원년인 1975년 6월 전대련(명동성당 7인위원회)은 논의단계에서 일망타진됐다.
 
그해 11월 발생한 서울대-경희대 연합시위 미수사건은 거사 하루 전날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무산된 경우다.
 
흥사단아카데미 사건이나 고려대 유인물 사건(1977년 4월) 등에서 보듯 연합시위가 아니어도 

2개 이상의 대학이 관계된 사건은
 
대부분 보안 누수 때문에 불발됐다.

이토록 모험적인 연합시위를 준비해온 강력한 학외조직이 하나 있었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73학번 장준영(현 청와대 사회조정1비서관)이 조직한, 뒷날 ‘6개대연합’으로 명명된 

모임이다.

이 모임은 긴조9호 시대 학외 운동조직으로서는 몇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당시 캠(대학 운동권) 간의 네트워크는 교회나 야학, 흥사단 등 종교-사회활동을 통해 비조직적인 형태로 

이뤄졌다.
 
출신 고교나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적인 비밀 스터디그룹을 통해 연결되는 경우도 일부 있었다.
 
그런데 장준영의 조직은 달랐다.
 
종교적 보호막이나 사회단체의 틀 속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 순수한 캠 중심이었고, 

그런데도 사적 모임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말하자면 긴조9호 시대 최초이자 최대의 본격적인 대학연대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긴조9호 하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 연합조직이 수년간 강력하게 유지된 데는 그럴 만한 요소가 

있을 법하다. 

그것은 이 모임을 조직하고 가동해온 핵심 인자들의 \'내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준영의 운동 경력은 가깝게는 1975년의 ‘짧은 서울의 봄’, 멀게는 민청학련 사건, 더 멀게는 

긴급조치 1호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전남 보성군 벌교 출신인 그는 1971년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뒤늦게 성균관대에 입학했다. 

그는 연세대 의대에 진학한 고교 동기 고영하(전 국민회의 서울 노원갑지구당 위원장)와 자주 소통했다. 

학내에서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던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고영하 때문이었다.

“1973년 12월에 고영하가 ‘데모를 해야겠다’며 나보고 선언문을 써달라고 했다.
 
그걸 써줬는데 실제로 그걸 갖고 했는지 다른 걸 갖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듬해 1월 그가 데모를 

주동하고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들어갔다. 

이 일을 계기로 그해 2월부터 민청학련 사건으로 표면화된 4-3시위에 깊이 빠져들게 됐다고 할까....”


그의 최근 회고. 민청학련 성균관대책은 김수길이었고, 박영석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가세한 그룹이 겨울부터 의기투합한 장준영과 그의 광주일고 동기 3인방이었다.
 
 이들이 합류함으로써 1974년 4월 3일 많은 학생이 검거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도 

성균관대에서는 4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때 장준영은 문과대 앞에 사람을 모으는 임무를 달성하고 무사히 도피했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갈 데가 없었다. 

‘자진출두하면 아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해서 

친구 하숙집에서 하룻밤 자고 이틀 뒤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그랬더니 진짜 아무 문제 삼지 않고 풀어주었다. 막상 그렇게 되니까 학교 다니기가 더 갑갑했다.”



학생운동 조직력을 키울 시기

조직적 기반과 운동적 바탕 없이 시위에 가담했다가 뒷감당을 못하고 있던 그를 잡아준 이가 

권영근(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장)이었다. 

경제학과 69학번인 그는 그 무렵 성균관대 운동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그는 “김수길이 뒷일을 맡기고 갔다”며 사회문제연구회에 입회해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민청학련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먼저 실력 양성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한 장준영은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2학년생 장준영이 지각 입회한 사회문제연구회는 1971년 권영근 등이 창립한 서클로 긴조9호 시대 

성균관대 학생운동의 중심축이 된다. 

이 시기에 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경제학과와 사학과였다. 

과별로 의식화 공부 모임이 따로 있었다. 

그의 경제학과 동기인 허만중(저술가)-최영삼(현 개인사업), 사학과의 핵심인 이수일(현 전교조 위원장) 

등은 사회문제연구회 소속이면서 과 조직도 지도했다.

그런데 긴급조치 9호 발동 전야인 1975년 봄 그는 학내 시위에 연루돼 무기정학을 당하고 만다. 

그는 이듬해부터 1년 남짓 방위병으로 복무하는데, 그렇다고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1977년 4월 19일 학내 단독시위를 감행한 뒤 구속되는 76학번 성종대(현 과학사랑나라사랑 사무총장)는 

그가 방위병 복무 중에 지도한 경제학과 공부 모임 후배였다. 

그리고 대학연합 모임을 구상하고 조직에 착수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학내 문제는 최영삼-이수일, 그리고 경제학과 공부 모임 후배인 이찬근(현 인천대 교수) 등에게 맡기고

 학외 활동에 나섰다.

 이때가 1976년 말이었다. 

그는 일찍이 권영근이 소개한 학외그룹과 방위병 복무 중에 다닌 형제교회를 중심으로 네트워킹에 들어갔다.

권영근이 연결해준 학외그룹은 이우재(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장, 전 열린우리당 의원)-

황민영(현 대통령 자문 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장) 등이 관계하는 

농업근대화연구회(농근연, 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의 전신)의 청년 프로그램이었다. 

장상환(현 경상대 교수)-박진도(현 충남대 교수) 등이 이 모임의 핵심 멤버였다.

김동완 목사가 이끄는 형제교회에는 중요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뒷날 서강대를 대표해 대학연합조직에 합류하는 김선택(현 하이팩스 대표이사)이었다. 

이곳에도 농업문제 관련 스터디그룹이 있었는데, 서울대 농법회 출신의 민인기(현 해남자활후견기관 관장) 

등이 관계하고 있었다.

장준영이 형제교회를 통해 알게 된 김선택과 함께 대학연합조직을 처음 모색하던 때는 

서울대 박석운(현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 등이 대학가의 긴 침묵을 깨고 궐기한 

1976년 12-8시위 직후였다.

 서강대 경제학과 74학번인 김선택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교회라는 틀거리를 이용해 사회과학 학습과 

농활-공활-야학 활동을 통해 운동권의 중심부에 든 케이스였다. 

충남 논산 출신인 그는 제일-연동-수도-새문안-형제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의식을 연마했다.


대학연합모임의 초기 멤버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뒷날 남민전 사건으로 8년 넘게 

옥고를 치르는 서울공대 김부섭(현 큐빅테크 대표이사,중앙고 65회 )이다.
 
기계설계학과 74학번인 그는 동부교회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김성재(현 한신대 교수, 전 문화관광부 장관)가 전도사로, 

이종오(현 명지대 교수, 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가 청년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장준영이 그와 맺어진 연계고리 중 하나는 농근연이다. 

그는 농근연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권영근과 자주 교류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서울공대 특유의, 뒷날 PD로 불린 민중주의적 경향에 젖어 있던 그가 정치투쟁에 

몰입하게 된 것은 12-8시위 이후 이 조직에 관계하면서였다.

“박석운팀의 첫 거사 뒤 누구에게선가 연락이 왔다. 

이제는 좀 더 조직적인 학생정치운동이 필요한 시기라며 분산적이고 파상적인 활동보다는 

얼마 안 되는 역량이라도 연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여서 가급적이면 인맥관계를 동원해 캠퍼스를 추가시켜 나가기로 했다. 

다음 학기에 시위를 하면서 이슈는 뭘로 할 것이며, 몰아서 할 것인지 분산할 것인지 연타를 칠 것인지 등등을 협의했다.”

김부섭의 말이다. 

1977년 봄학기를 대비하기 위한 1차 대학연합모임은 장준영-김선택-김부섭이 참여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구축된 성균관대-서강대-서울공대에다 서울대(관악캠퍼스)-이화여대-한신대 등이 

가세한 형태였다. 관악캠퍼스에서는 김천우(현 강창일의원 보좌관), 

이화여대에서는 홍미영(현 열린우리당 의원), 한신대에서는 오용식(목사, 현 무주자활후견기관 관장) 

등이 이 모임에 나왔다. 

이때 아지트를 제공하는 등 이 모임을 적극 후원한 이가 민청학련 세대인 황인범이었다.

꼭 이 조직의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실제로 1977년 봄에 이들 대학을 중심으로 

봇물 터지듯 시위가 벌어졌다. 

관악의 김천우는 3-28시위의 ‘동’으로 나갔고, 한신대 오용식은 4-7고난선언 사건을 주도했다. 

이화여대에서 홍미영이 참여하기로 한 4-19시위가 무산되면서 고은광순(현 홍명한의원 원장) 등이, 

성균관대에서는 4-19시위를 결행한 성종대가 구속됐다.

 김부섭은 4월 11일 조명진(벤처기업가, 화공과 74학번)과 함께 도서관 앞에서 동떴다가 시위가 불발되자 

피신했다.

차세대 실력자의 ‘암중모색’

이렇게 1977년 1학기를 넘긴 연합모임에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합류하게 된다. 

긴조9호 시대 고려대 운동권 복원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경연(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이다.

전남 함평 출신인 그는 장준영이 성균관대 민청학련에 관계할 때 광주일고 2학년생이었다.

 3학년이 되기 직전 겨울 그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광랑(光郞)’이라는 독서회를 지도하던 

전남대 선배가 “봄에 전국적인 학생 봉기가 있을 것이다\"라며 \"전 대학이 다 움직이는데 

광주에서는 최소한 일고와 전남여고는 해야 할 것이니 준비를 하라”는 게 아닌가. 

그는 대학도 가야 하고 대의를 거스를 수도 없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생각돼 겁도 났다. 

어린 후배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며 선배를 야속하게 여기기도 했다. 

결국 준비를 하던 중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전남도경에 가서 조사만 받고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무마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5년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한 그는 교내 어떤 서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멋 모르고 가입할 게 아니라 학교 사정을 안 뒤에 하라”는 광랑 선배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교 시절 이미 죽을지도 모른다는 운동적 긴장감을 경험했던 그는 한편에서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잔디밭에서 통기타를 치는 캠퍼스의 야누스적 상황을 목격하며 긴급조치 7호로로 

얼룩진 1975년 봄을 무심하게 보냈다.

그는 자신이 가입하려고 했던 민연(민족이념연구회)이 수많은 제적자를 낸 채 공중분해되는 것을 지켜보고는

 선배들의 충고가 옳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치열한 현실을 외면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어쨌든 학내에 몰아친 세찬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은 그는 광주일고 동문 스터디그룹에 

참여해 1년 동안 집중적으로 학습하며 의식을 가다듬은 뒤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뒷날 ‘민맥’으로 불리는 모임이었다. 

고전연구회로 이름을 바꾼 과거의 청연(청년문제연구회) 조직이 워낙 주목받고 있어 활동하기 쉽지 않다고 판단, 뜻 맞는 동료들을 규합해 새로운 조직을 만든 것이다.

새 조직을 지하화한 것은 공개-비공개 활동의 장단점을 면밀히 따진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공개서클은 학생회관 4층의 서클룸을 쓸 수 있고, 포스터를 부착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고 고려대 특유의 혈기가 앞설 수밖에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반면 비공개서클은 정반대였다. 그는 비공개서클의 장점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는 민맥을 통해 내공을 쌓는 한편, 다른 조직의 75학번 인자들과 학내 논의구조를 구축해나갔다. 

고려대 운동권의 언더지도부였다.

대학연합모임에서 그에게 ‘콜’이 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보안이 생명인 연합조직이 고려대 대표로 그를 찍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년 가까이 그를 은밀하게 관찰한 결과였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긴조9호세대대탐험 59]연합전선을 호위하라



제2차광화문연합시위(2)



사람을 \'조직\'에 끌어들이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 

대상을 선정하는 일부터가 고난도의 작업이다. 

우선 운동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골라야 한다. 

이런 사람은, 흔하지는 않지만 찾기 어려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의지와 

신뢰를 지켜낼 능력과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

삼엄한 사찰망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내실 있게 활동하려면 절대 \'실수\'가 없어야 한다. 

실수를 했다가는 자신은 물론 조직까지 다치기 때문이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사찰조직을 능가하는 감각과 지략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달면 리크루트할 대상자는 훨씬 줄어든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안 된다. 

또 한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학내 사정을 꿰뚫고 있어야 하며, 역량 있는 인자들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즉 학내 운동권에 대한 지도력까지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인물은 \'캠\'마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다.

고려대에서는 정경연(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이 이런 조건에 맞는 적임자라는 게 

대학연합 코어그룹의 판단이었다. 

그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장기간 \'스크린\'한 결과였다. 

다시 말하면 그의 의지와 신뢰성, 능력, 조건 등이 충분히 검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를 조직에 끌어들이는 작업만 남았다.

조직의 안전을 염두에 둔 포섭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마지막 단계다. 

여기서 또 한번 고도의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대상자가 조직에 참여하는 과정을 

깔끔하게 해두는 것이다.

정경연은 장준영(현 청와대 사회조정1비서관)이 관계한 농업근대화연구회(농근연)의 

청년 프로그램과 연결돼 있었다. 

따라서 장준영이 직접 그를 접촉할 수 있었다. 

광주일고 선후배라는 관계도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루트를 찾았다.

정경연이 장준영의 권유로 대학연합에 들어오게 되면 뒷날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경연이 노출될 경우 그와 대학연합의 연결점인 농근연이 타격을 입는 것이다. 

농근연 청년 프로그램은 여러 대학의 인자들을 양성하는 중요한 곳이다. 그

러니 우선적으로 보호돼야 할 조직이다. 

따라서 농근연과 관련된 인사가 정경연을 대학연합에 

소개하는 형식을 취할 경우 농근연이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

대학연합은 별도의 루트로 서강대 대표인 김선택(현 하이팩스 대표이사)을 선택했다. 그

는 정경연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김선택은 \"지인의 소개로 정경연을 만나 1년 동안 친분을 

쌓았는데 서로 얘기가 잘 통했다\"며 \"내가 그를 접촉해서 대학연합에 끌어들였다\"고 최근 회고했다. 

정경연도 \"선택이형이 나를 끌어들이려고 1년 동안 탐문했다\"며 \"나도 눈치가 있어서 그 정도는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농근연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그런 낌새를 몰랐다\"고 덧붙였다.


결국 정경연은 김선택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대학연합에 가담했다. 

이렇게 되면 만에 하나 정경연 쪽에서 \'펑크\'가 나더라도 농근연과는 직접 연결이 되지 않는다. 

경찰이 정경연에게 대학연합에 가담한 루트를 캐물을 때 김선택을 이야기하면 되기 때문이다. 

김선택을 알게 된 경위를 밝힐 때도 사실대로 그를 소개한 지인을 대면 끝난다. 

그 지인은 조직과 무관한 사람이라 다칠 염려도 없다.

김선택은 서강대에 자체적인 언더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서강대도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민청학련 사건과 1975년 \'짧은 서울의 봄\'을 거치면서 운동권이 

궤멸된 상태였다. 

이런 척박한 땅에 운동의 씨앗을 뿌린 이가 바로 그였다.

철부지 여대생의 인생 대역전

충남 논산의 부농에 속하는 집안의 막내아들인 그는 서울고 재학 시절 흥사단아카데미와 관련이 있는 

인왕회(仁旺會)에서 활동했다. 

그가 운동권에 발을 디딘 것은 입학 직후 민청학련 세대인 71학번 김택춘(현 서울 노원구 횃불교회 

담임목사)을 만나면서였다.

서강대의 민청학련 사건은 특별하다. 

1974년 서울시내 대학에서 처음으로 3월 28일 서강대에서 유신 철폐 시위가 일어났다.

 \'민청학련\'을 징치하기 위한 긴급조치 4호 발동(1974년 4월 3일) 이전에 발생한 일이라 이 시위 관련자는 긴급조치 1호로 체포되지만 재판은 긴급조치 4호로 받게 된다.

3-28거사를 가능케 한 서강대 조직은 박석률(현 통일연대 학술위원회 간사)-권오성(현 서울 사직동 수도교회 담임목사) 등을 중심으로 한 비밀 스터디그룹이었다. 

여기에는 김선택을 이 그룹에 소개한 김택춘과 민청학련 \'홍일점\' 김윤(작고) 등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제학과 70학번 허성삼(현 사업)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학습과 토론을 했다.

이들 가운데 박석률-권오성-김윤 등은 민청학련 사건의 광풍에 휩쓸려 구속되고, 교지 편집장이던 김택춘은 한달 남짓 뒤인 그해 5월 \'교지 필화 사건\'으로 뒤늦게 동료들의 뒤를 따른다. 

그때부터 김선택은 혼자 남아 김택춘이 연결해준 교회 등의 맥을 통해 운동의 노하우를 습득, 이를 학내에 이입한다.

그가 1년 선배인 이영수(현 부동산업), 1년 후배인 이경숙(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실 부장) 등과 학내에 조직한 언더서클은 긴급조치 9호 시대와 1980년대 \'서울의 봄\'을 이끄는 서강대 운동권의 산실이 된다. 

이 모임은 서클로 등록되지도 않았고, 이름도 없었다. 하지만 뒷날 기성 서클에 침투하거나 새로운 서클로 분화, 79-80학번대에 이르러서는 빅 패밀리를 형성하게 된다.

1980년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 절명한 김의기(무역학과 76학번)도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그는 역시 이 모임의 1년 선배인 박한무(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와 함께 1979년 10월 28일 학내 시위를 계획했다가 10-26사태가 나는 바람에 포기하기도 했다. 

이들 외에 76학번에는 조순실(현 경기 안산 들꽃피는마을 공동대표)-양국선(현 교사), 77학번에는 노재익(현 사업)-임지현(현 한양대 교수), 78학번에는 박석준(현 대구대 한의대 교수)-이종회(현 진보네트워크센터 소장) 등이 이 모임의 주요 멤버였다.

김선택이 대학연합조직에 깊이 관여할 무렵 학내 일은 이경숙이 담당하고 있었다.

 정경연이 대학연합에 가세한 1977년 여름 대학연합의 고정 멤버는 성균관대 장준영, 서강대 김선택, 

서울공대 김부섭 등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학은 일정하지 않았다. 대학연합으로서는 구속력이 없는 단계였다. 

이화여대에서는 홍미영(현 열린우리당 의원)이 빠지고 전방지(현 호서대 교수)가 나왔다. 

연세대도 고정 멤버 없이 몇 사람이 들락날락했고, 서울대(관악캠퍼스)도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그해 여름 계룡산 MT까지는 참여했다가 학내 사정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수한 일도 있었다.

대학연합의 움직임과 별도로 1977년 가을학기에는 학내 시위가 제법 규모 있게 벌어졌다. 

서울대 26동 사건과 연세대 10-25사태는 \'5분시위\'의 벽을 깨고 대중투쟁의 길을 연 놀라운 사건이었다. 

서울대 11-11 도서관 농성사태와 3차에 걸친 서강대 시위 또한 그랬다.




이 무렵 대학연합에는 2명의 기간 멤버가 가세했다. 

서울농대 강구웅(작고)과 서울여대 권명자(전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사무국장)였다. 

강구웅은 옛 서울문리대 민청학련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명인 강구철(작고)의 동생으로, 

김상진 할복사건 이후 초토화됐다가 복원된 서울농대 운동권을 대표하고 있었다.

뒷날 \'6개대연합\'으로 명명되는 이 조직의 홍일점인 권명자는 긴조9호 시대의 강력한 여성 활동가였다. 

그가 서울대 농법회의 자매서클이기도 한 녹수회 회장이던 시절 서울여대 운동권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는 서울여대 시위미수 사건에도, 6개대연합 사건에도 깊이 관계됐지만 검거되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진다. 

긴조9호 시절 장기 도피는 감옥 생활보다 힘들다. 

여성은 더 그렇다. 

하지만 그는 도피중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고 남민전 가입까지 하는 투혼을 보인다.

서울대의 보이지 않는 배후

1975년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여대 국문과에 입학한 그는 1학년 여름 농활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철부지 여대생\'이었다. 

그는 \"입학해서 한 학기는 멋모르고 재미있게 보냈다\"며 \"안 들어간 서클이 없었다\"고 최근 회고했다.

 하고 싶은 게 많아 서클이란 데는 모두 가입하고, 미팅도 빠지지 않고 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여름방학까지 이어졌다.

그의 인생 좌표가 180도 달라진 것은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다. 

그는 여름방학 계획도 빡빡하게 짰다. 

그런데 한 군데서 펑크가 났다.

 KUSA(한국유네스코학생회)의 조국순례대행진에 참가 신청을 해놨는데 그게 갑자기 취소돼버린 것이다. 

그가 녹수회와 서울농대 농법회 합동 농활에 따라간 것은 단순히 KUSA의 일정 취소로 구멍이 난 개인 

스케줄을 메우려는 목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거기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 진지함에 놀랐고, 

선배들의 행동에 감명받았다. 

춘승이형(당시 여학생은 남자 선배를 오빠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렀다)인가가 일하다가 코피를 쏟는데, 

그냥 손으로 쓱 닦고 계속했다. 

하루종일 중노동을 하고 일과 후에는 새벽까지 평가회의를 했다. 

나는 너무 철이 없어 일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방에 누워 있었다. 

다음날 \'빳다\'를 맞은 기억이 있다. 아, 진짜 삶은 여기 있구나.... 한 학기가 물거품이 됐다.\"

권명자의 최근 회고다. 

1975년 여름 농활에 참석한 서울대 농법회 멤버는 이범영(작고)-양춘승(현 지환테크 대표, 관악민주포럼 

회장)-권형택(현 우리자원 대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무총장)-이백만(현 국정홍보처 차장) 등이다. 

뒷날 이범영은 그의 든든한 후견자가 되고, \'영원한 긴조9호 도망자\' 권형택은 그에게 도피생활의 

노하우를 전해준다.

어쨌든 전혀 다른 사람이 돼서 농활에서 돌아온 그는 1학기 때의 철없던 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세미나만 쫓아다녔다. 

미팅도 끊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1978년 그는 녹수회 회장으로서 서울여대 운동권의 핵심이 됐다. 

이미 그는 농근연을 통해 장준영과도 알고 지냈고, 서울공대 김부섭과도 소통하고 있었다. 

대학연합에 가담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1978년 봄 대학연합은 6개 \'캠\'의 탄탄한 연합전선을 이루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인자가 하나 빠져 있었다. 

서울대 본진, 즉 관악캠퍼스였다. 

관악이 없는 대학연합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장준영 등은 1978년 들어서야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정경연은 \"오랫동안 관악이 없어 이리저리 수소문했는데 누가 데려왔는지 삼철이를 데려왔다\"고 

최근 회고했다.

서울대 한사의 대통을 이어받은 백삼철(현 세명대 한의대 재학)은 정경연과 광주일고 동기였다. 

그의 가세로 대학연합은 명실상부한 연합조직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연합은 1978년 상반기 연합시위 조직에 실패한다. 

이때 서울시내 학생운동은 서울대 한사의 수장이자 학내 언더그룹의 CT인 

김수천(현 아시아나항공 이사)이 주도하는 형국이 된다. 

대학연합은 5-8시위, 6-12데모, 6-26광화문연합시위로 이어지는 서울대의 독자행보를 관망하는 데 그친다.

이렇게 된 데는 사정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각 캠퍼스가 처한 환경이 다를 뿐 아니라 독자적인 시위 조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학내 역량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극도의 비밀주의가 \'캠\' 간의 조율을 가로막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적 요인은 대학연합 측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캠 간의 불균형이었다.


김선택의 기억을 더듬으면....

\"원래 1978년 봄에 (연합시위를) 하기로 계획했다. 

너무 오래 하니까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부섭이는 수배돼 도망다니기 시작했고, 관악에서는 확고하게 결정을 못했다. 

6-26 이전에 하자고 관악에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그게 관철이 안 됐다. 

그 와중에 6-26이 터지고 우리 계획은 다시 가을로 연기됐다.\"

관악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1978년 여름이 끝나고 가을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양민호(현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가 이우재(전 인사련 부의장)-성욱(현 청양농촌체험학교장) 등과 결합해 

9-13시위를 결행하면서 10-17 제2차 광화문연합시위를 예고해 자연스럽게 날짜가 확정되면서였다. 

백삼철의 최근 회고.

이미 조직과 대오는 갖춰졌다

\"9월 13일 건은 우리의 원래 연간계획과 별도였다. 

1학기 때부터 다른 대학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관악은 2학기에 2번 정도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른 학교에는 데모할 인력이 없었다. 

우리는 나 말고도 민호가 있어 두 팀이었지만 다른 대학은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학교는 상황이 더 어렵구나 하고....\"

다른 대학과 달리 서울대는 백삼철의 배후에 두 거두가 버티고 있었다. 

복학생 정태윤(전 한나라당 사이버위원장)과 주대환이었다. 

두 사람은 백삼철에게 학내외 상황을 보고받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 관계 때문에 뒷날 대학연합조직 사건에 꼼짝없이 연루된다. 

장준영을 중심으로 한 모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숨은 멤버로 활동한 셈이다. 

9-13 학내시위, 대학연합조직의 동시 거사, 그리고 제2차 광화문연합시위로 이어지는 1978년 하반기 학생운동의 밑그림은 이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백삼철의 얘기를 더 들어보면....

\"2학기 때 제일 친하고 가까웠던 사람이 태윤이형과 대환이형이었다. 

같이 의논하고 상담하는 중요한 선배였는데 당면 과제뿐 아니라 학생운동 앞날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했다.

 특히 태윤이형을 좋아했고 충격을 받았다. 

매우 강인한 사상을 갖고 있었고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형을 많이 따라서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한사의 핵심 멤버로서 민청학련 사건 때 기소를 면하고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 뒤늦게 복학한 두 사람은 서울대 긴조9호 운동권의 최고 배후 위치에 있었다. 

백삼철을 고리로 해서 서울대의 거물들이 발 벗고 나서면서 대학연합은 엄청나게 외연이 확대되고 분위기도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 무렵 관악에는 또 한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백삼철을 구심점으로 한 학내 언더그룹의 영향권에는 한발 벗어나 있지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강력한 활동가였다. 

사복회와 기독학생회의 수장이자 교회를 기반으로 한 학외그룹의 핵인 사회사업학과 4학년 유종성(현 하버드대 박사과정, 전 경실련 사무총장,중앙고 66회)이었다.

75학번 언더지도부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고 잠복해 있었다. 

그는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수석이사로 있으면서 학외 활동으로 수차례 연행된 전력이 있는 A급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가 4학년이 되면서 마음을 잡고 공부하는 양 했던 것은 정보요원을 속이려는 위장술이었다. 

1학기에 감시를 느슨하게 해놓고 2학기에 본격적으로 뛰기로 묵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6-26광화문시위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하고 가을에는 더 큰 시위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될 무렵 그는 백삼철을 만났다.

 한 학기 동안 잠수해서 구상한 연합시위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깜짝 놀랐다. 

이미 5개 대학의 연합이 구축돼 있었던 것이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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