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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소식

댓글 0건 조회 1,759회 작성일 2009-12-01 12:24
긴급조치 9호 세대 대탐험과 중앙동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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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9호세대대탐험](60)예비시위로 분위기를 띄워라



제2차광화문연합시위(3)





대입 본고사일을 10일 앞두고 데모를 한 ‘간 큰‘ 고등학생이 있었다.
 
1974년 12월 31일 서울 중앙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겨울철이 되면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가슴에 ‘불조심‘이라는 글귀가 적힌 리본을 달았다.
 
그런데 이날 몇몇 학생이 ‘불조심‘ 대신 ‘자유언론‘이라고 쓴 리본을 달고 등교했다.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가 국민적 관심과 공분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으니까, 감수성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짓눌린 고3 수험생의 치기 정도로 예쁘게 봐주면 그만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번진 것은 이를 본 교사가 리본을 빼앗는 등 한바탕 법석이 연출되면서였다.
 
흥분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 ‘진짜‘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들은 교사 몰래 ‘언론자유 보장‘ ‘광고탄압 중지‘ 등의 구호를 적은 피켓을 준비하고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동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20여명이 밖으로 뛰쳐나가 피켓시위를 벌였다.

주모자들은 이 시위가 주동자가 없이 이뤄진 것으로 하자고 사전에 입을 맞췄다.
 
본고사를 코앞에 두고 한명이라도 다쳤다가는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도 20여명을 모두 자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학생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과 학교 당국의 추궁이 의외로 거세자 한 학생이 “모든 걸 내가 다 했다“고 나섰다.
 
실제로 그는 시위 준비 멤버가 아니었다.
 
도서관에 공부하다 연락을 받고 나온 단순가담자였다.



삼총사의 ‘아름다운 우정‘


이날 경찰은 8명은 연행했다.
 
애꿎은 친구가 십자가를 자청하자 너도나도 앞다퉈 “내가 진짜 주동자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의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했는지 경찰은 학생들을 모두 훈방하고, 학교 당국은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
 
그리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주동자라고 끝까지 우겨 경찰에 연행된 8명 모두가 그해 서울대에 합격했다.


심상완(현 창원대 교수,중앙고 66회)-
 
유종성(전 경실련 사무총장, 현 하버드대 박사과정,중앙고 66회)-
 
조희연(현 성공회대 교수,중앙고 66회).
 
긴급조치 9호 시대 학생운동과 뒷날 사회 변혁의 흐름을 선도하는
 
서울대 75학번 ‘중앙고 삼총사‘의 고교 시절 일화 한 토막이다.
 
피켓시위 때 “모든 걸 내가 다 했다“고 나선 학생이 심상완이다.
 
주모자 유종성은 이때 처음으로 경찰 유치장 신세를 지고, 조희연 역시 난생 처음으로 시위라는 걸 경험한다.

세 사람의 인연은 특별하다.
 
고교 동기이자 대학(서울대 사회대) 동기라는 것부터가 그렇고, 대학 본고사 열흘 전 피켓시위를 함께 한 ‘동지‘라는 것이 그렇다.
 
후사연(후진국사회연구회)의 후신인 사복회(사회복지연구회)에 나란히 입회한 것도 보기 드문 기연이다.


이들을 이어준 ‘운명의 사슬‘은 같은 고교, 같은 대학, 같은 서클에 몸담은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종교단체를 기반으로 한 학외조직, 즉 ‘교회운동권‘의 중심에 서는 것까지 같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조희연은 대학 시절 경동교회 대학생 모임인 ‘젊은 둘째‘의 일원이었다.
 
 당시 경동교회에는 문성현(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대표)-박노해(시인) 등 뒷날의 노동운동 거두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심상완-유종성은 새문안교회 멤버가 된다.
 
두 사람은 중앙고 시절 깊은 교류가 없었으나 피켓시위 사건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유종성은 원래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를 교회에 끌어들인 것이 심상완이었다.
 
새문안교회에는 서경석(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 전 경실련 사무총장)-신대균(현 행정개혁시민연합 본부장) 등이 있었다.
 
고학년에 되자 심상완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회장, 유종성은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수석이사로서 학내외 조직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중앙고 삼총사의 대학 시절 마지막 동행은 ‘비극적‘이다.
 
차례로 감옥에 가기 때문이다.
 
심상완은 1977년 26동 사건으로 구속된다. 유종성-조희연은 1년 뒤에 그의 뒤를 따른다.
 
이들의 동행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유종성이 하버드대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뒤 강단에 선다면 세 사람이 다시 학계에서 만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1978년 가을 백삼철(현 세명대 한의대 재학)을 만나 학내운동에 적극 개입하기 전까지 유종성은 교회와 학교를 넘나들면서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에서 활동하던 중에 신대균의 권유로 서울대 기독학생회(기생회)에 들어갔다.
 
보수적인 기생회의 체질과 성격을 바꾸라는 밀명을 받고서였다.
 
사복회 대표로서 75학번 언더지도부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4학년 2학기 때 한차례 시위를 책임지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대학연합조직에 생명력을


백삼철로부터 대학연합시위를 준비중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활동 반경은 이미 캠퍼스를 벗어나 있었다.
 
관악만의 ‘나홀로 데모‘가 아닌 다른 대학과 연결된 동시다발 데모나 연쇄시위, 나아가 연합시위까지 꿈꾸고 있었고 그 기반도 갖고 있었다.
 
바로 KSCF였다.

“6-26광화문시위가 후반기를 준비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됐다. 이 분위기를 살려서 판을 더 키우려고 대학연계시위를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백삼철을 만나보니 그게 이미 돼 있었다. 그렇다면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기반으로 외연을 확대할 수 있었다. K(KSCF를 지칭) 조직을 통해 다른 대학을 붙이기만 하면 되니까....“

유종성의 최근 회고다.
 
재판 기록에는 유종성이 백삼철과 연합시위를 하기로 최초로 합의한 시점이 1978년 9월 11일로 돼 있다.
 
양민호(현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팀의 9-13거사 이틀 전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기억으로는 두 사람이 만난 때는 이보다 앞선 8월 말이나 9월 초쯤이다.
 
다시 말하면 9-13시위는 양민호팀의 단발성 거사가 아니라 유종성-백삼철의 연합시위 계획과 맞물려 이뤄졌다는 얘기다.

유종성-백삼철의 결합은 장준영(현 청와대 사회조정1비서관)팀이 도모해온 대학연합조직은 물론 긴급조치 9호 시대 학생운동 전반에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백삼철의 서울대(관악캠퍼스)가 참여하면서 대학연합조직이 명실상부하게 뼈대가 갖춰지고 여기에 유종성이 가세하면서 살이 붙은 셈이기 때문이다.
 
뼈와 살이 완성되면 그것은 생명력을 지닌다.
 
장준영팀이 2년 동안 은인자중하면서 다져온 조직이 마침내 동력을 얻은 것이다.

“긴조9호 시대 학생운동은 90%가 관악“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대의 역량이 다른 대학을 압도했음을 말하려는 과장법이다. 따라서 백삼철-유종성이 가세한 순간부터 연합전선은 관악이 주도하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백삼철 뒤에는 학내 조직을 장악하고 기성 재야와도 선이 닿는 복학생 정태윤(전 한나라당 사이버위원장)-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유종성 뒤에는 KSCF 간사로서 교회운동권을 쥐고 있는 민청학련 세대 황인성(현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이 버티고 있었다.

9-13시위를 통해 광화문연합시위를 예고했을 때 관악은 모든 전략을 10-17거사에 맞추고 있었다. 그에 따른 큰 그림과 학내외 조직의 역할 분담도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조직의 정점에서 전략을 수립하고 지시를 내린 CT(컨트롤타워)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긴조9호 시대의 특징인 철저한 비밀주의 때문인 듯하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의 일도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할 정도로 보안을 중시한 만큼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란 가능하지도 않고 의도할 수도 없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핵심 관계자조차 연합시위의 방식이나 성격을 놓고 기억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유종성-백삼철의 얘기를 차례로 들어보자.

유종성:10월 17일에는 6월 26일보다 많은 사람이 광화문에 모일 것이다. 현장에서는 잘 될 것이다. 따라서 주동그룹을 광화문에 배치할 게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 시위를 하고 광화문으로 끌고나오는 것으로 했다.

백삼철:10월 17일에 학내에서 시위대를 조직해 광화문으로 끌고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서울대를 뺀 나머지 대학의 역량은 시위를 한번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학간 편차가 심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9월 27일 서울 신문로 문화방송국(현 경향신문사) 옆 코스모스다방에서 만나 최종적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백삼철은 10월 12일 서울시내 6개 대학 동시 거사 때 학내 시위를 주동하고, 유종성은 10-17광화문연합시위 때 세종문화회관 앞 시위대를 조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유종성은 그동안 쌓은 학내외 기반을 총동원해 10-17거사를 위한 조직을 해나갔다. 이때 합류하는 인물이 류인렬(연출가, 현 인디저널리스트학교 대표)-이필렬(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에너지대안센터 대표)이다.
 
재판 기록에는 유종성이 9-13시위 3일 뒤인 9월 16일 류인렬을 학생식당에서 만나 동조를 얻고, 24일 영등포역앞 옥호 미상 중국음식점에서 류인렬-백삼철과 함께 이필렬을 만나 시위 방법에 관해 논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류인렬은 교수가 될 사람“


유종성의 광화문팀에 가세하는 류인렬-이필렬은 1978년 학내활동을 책임진 75학번의 핵심 인자였다.
 
이들은 유종성과는 다른 경로로 2학기 활동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여름방학 때 이미 학내 언더조직을 복원하고 2학기 활동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경기도 양평으로 MT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백삼철-양민호-조희연 등이 함께 갔다.

류인렬은 75학번 주요 활동가 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다.
 
김수천(현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이 언더그라운드의 수장이었다면 그는 문화패를 중심으로 한 오픈그룹을 대표했다.
 
대구 계성고 출신인 그는 기획가이자 연출가였고, 전략가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976년 10월 15일 발생한 서울대 축제데모 사건, 일명 ‘감나무골 사건‘을 촉발한 마당극 ‘허생전‘의 기획자가 바로 그였다.
 
감나무골이라는 이름도 그 자리에 감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착안해 그가 붙인 것이었다.

1975년 4-3 및 4-7데모, 뒤이은 오둘둘 사건을 거치며 옛 문리대 연극회가 전멸한 상황에서 서울대 총연극회를 조직한 것도 그였다. 1976년 16개 단과대 연극회의 협의체로 총연극회를 등록한 그는 탈반(민속가면극회)의 이선복(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허생전‘을 기획했다. 그의 말을 잠시 들어보면....

“언더그라운드 운동은 한계가 있었다.
 
밧줄로 매달려도 금방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선도투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니까 문화운동과 결합해서 대중집회를 할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전에 춘원 이광수와 단재 신채호를 비교하는 인문대 대토론회를 기획한 적이 있었는데 수천 명이 참여해 대성황을 이뤘다.
 
그래서 ‘허생전‘을 마당극 형태로 기획해 이상우(연극연출가) 선배를 연줄로 엮어 연출을 맡겼다.
 
데모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감나무골 사건‘으로 1급 요시찰 인물이 된 뒤 그는 용산 바울학사에 들어가 겉으로는 학자의 꿈을 가꾸며 공부에 몰두했다.
 
감시의 고삐를 늦추려는 페인트모션 가운데 하나였다.
 
1978년 여름 양평 MT에 다녀오기까지 그는 표면적으로는 얌전한 학생처럼 보였다.

9-13시위는 은인자중하던 그의 본모습이 노출될 뻔한 위험한 사건이었다.
 
 이 시위에서 그와 이필렬의 역할은 동뜨지 않고 인원 동원만 하는 것이었다. 그
 
런데 동뜨기로 한 이우재(전 인사련 부의장)-성욱(현 청양농촌체험학교장)이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치고나갈 뻔했다.
 
다시 그의 기억을 더듬으면....


“그날 동뜨면 안 되니까 앞에 나설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뒤에서 부추기기나 하다가 임시로 가투팀을 짜서 장승백이로 나갔다. 그런데 사진에 찍혀 그만 관악서에 연행됐다. 거기서 끝날 뻔했는데, 바울학사에서 나를 담당하던 중정요원이 와서 빼내주었다. 1년 동안 나를 지켜본 결과 틀림없이 교수가 될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필렬 역시 6-12데모의 동으로 뛰었는데도 노출되지 않고 6-26광화문연합시위, 9-13학내시위 및 장승백이 가투 등 시위 현장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 자연대의 ‘대표선수‘였다.
 
 류인렬-이필렬의 가세로 유종성의 광화문팀은 막강 파워를 구축한 것이다.

유종성은 광화문시위에 적극 가담할 전사(戰士)들, 즉 시위대를 조직할 ‘현장팀장‘으로 옥광섭(사회학과 77학번)을 발탁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10월 6일 오후 6시경 고려대부속병원 옆 옥호 미상 중국음식점에서 옥광섭을 만나 시위 가담을 제의해 동의를 얻었다. 옥광섭의 역할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학생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10월 6일은 그에게 매우 바쁜 하루였다. 이날 오전 11시경 그는 광화문 시위 현장에 출현해 극적 분위기를 연출할 도망자 3인방, 즉 이우재-성욱-양민호 가운데 양민호를 만났다.
 
세 사람은 시흥동 아지트에서 흩어져 각자 고난에 찬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종성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양민호와 접선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울 석관동 37번 버스 종점에서 마침내 접선한 유종성-류인렬-양민호는 광화문시위에서 사용할 유인물 초안 작업을 분담했다. 유종성은 ‘전 국민에게 드리는 글‘, 양민호는 ‘전 학우에게 고함‘, 류인렬은 ‘10-17민주화투쟁선언‘을 각각 맡기로 했다.

이날 오후 6시경 옥광섭을 섭외해 현장팀장 역할을 맡긴 그는 곧바로 황인성을 만나 선언문 내용과 시위 전략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이때가 저녁 8시였다. 10-17광화문연합시위 D-11일인 이날 유종성은 파김치가 되어 귀가했다.



모든 채널이 닫히다


한편 거사일을 불과 며칠 남겨놓은 대학연합조직도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10-17본시위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본시위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10-12예비시위였다. 연합모임에 참여한 모든 대학이 같은 날 동시에 거사하는 데는 난관이 많았다. 학교마다 사정이 다르고 학사일정 등 환경도 제각각이기 때문이었다.



견고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대학은 장준영의 성균관대를 위시해 김선택(현 하이팩스 대표이사)의 서강대, 정경연(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의 고려대, 권명자(전 참교육학부모회 사무국장)의 서울여대, 강구웅(작고)의 서울농대 등었다. 여기에 서울공대와 이화여대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연합전선을 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서울공대 라인은 김부섭(현 큐빅테크 대표이사)이 수배중이라 제기능을 못하고 있었고, 이화여대는 전방지(현 호서대 교수)의 뒤를 이어 원혜경(사학과 76학번)이 나왔지만 학내 사정이 어려웠다.

1975년 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 미수사건으로 구속된 원혜영(현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의 동생이자 역시 같은 사건으로 구속된 서울상대 운동권 유진권(현 퓨처커뮤니케이션 사장)과 뒷날 결혼하게 되는 원혜경은 이화여대 아카데미 소속으로 학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장준영은 이화여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찍었다. 하지만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는 실패했다.

“장준영 선배가 명자 언니를 통해서 나를 불렀다. 당시 3학년이었고 기본적인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따라간 것이다. 그런데 학내 사정과 연합조직의 계획이 서로 맞지 않았다. 날짜도 어긋났고 효율성으로 봐서도 이화여대는 따로 학내에서 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우리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

관악에서는 백삼철이 대학연합조직과 긴밀히 공조하면서 나름대로 연합의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관악 라인을 통해 연합시위의 논의구조 속에 포함된 대학은 숙명여대-중앙대 등이었다. 숙명여대는 유종성이 KSCF를 고리로 이향순(현 노동인권회관 상담지원팀)을 끌어들였고, 중앙대는 주대환의 민청학련 동지 문국주(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가 이석표(현 문화유통북스 대표이사)와 소통했다.

10-12연합시위의 선언문은 신길동 정태윤의 집에서 채택됐다. 그런데 10-17광화문시위 참여와 국회의원 선거 불참, 구속인사 석방과 유신헌법 철폐 투쟁을 촉구하는 내용의 이 선언문과 비슷한 내용의 유인물이 서울시내에 뿌려진 것은 D데이 이틀 전인 10월 10일이었다. ‘격! 때는 왔다 드디어 때는 왔다‘라는 제목의 남민전 산하단체인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명의의 이 유인물이 가을바람에 흩날리던 날, 대학연합조직에서는 이 유인물의 정체를 알 길 없듯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모든 채널이 닫혀버린 것이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긴조9호세대대탐험](61)잔인한 10월 ‘3일간의 악몽’



제2차광화문연합시위(4)



1978년 10월 10일.

광화문연합시위 D-7일, 대학연합시위 D-2일이 되는 이날, 수년 동안 공들여 구축했던 서울시내 대학의 연합전선이 갑자기 마비돼버린다.

긴급조치 9호 세대는 이날부터 3일 동안 벌어진 일을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장준영(현 청와대 사회조정1비서관)을 위시한 대학연합조직에서부터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정점으로 한 관악팀, 유종성(전 경실련 사무총장, 현 하버드대 박사과정)의 광화문시위 조직팀, 그리고 이우재(전 인사련 부의장) 등 10·17시위의 ‘야사’로 내정된 팀에 이르기까지 당대 학생운동의 핵심 중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이 일망타진됐기 때문이다.

지금도 관계자들은 10월 거사를 허망하게 물거품으로 만든 ‘10·10검거선풍’의 진상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어디서 ‘펑크’가 났는지도 함구하고 있다. 알아도 말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몰라서’라는 게 더 솔직한 이유일 것이다. 이들은 사후에도 왜 그렇게 됐는지 따로 ‘복기(復棋)’해보지 않았다.

정보기관 손바닥 위에서 놀다

“이른 아침에 하숙집에서 연행됐다. 전부 따로 조사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하나씩 무너졌다. 딱히 누구 때문에 샜다기보다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면서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다들 영문도 모르고 잡혀갔다. 무슨 건 때문인지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는 아마추어였다. 보안을 중시하고 극도로 신경썼지만 경찰과 정보기관은 ‘프로’였다. 우리를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대학연합조직의 서울대 책임자였던 백삼철(현 세명대 한의대 재학)의 최근 회고다. 장준영에 따르면 검거가 시작됐을 때 연합조직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연합시위에 대한 확고한 방침과 사후 지침이 마련되기도 전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장준영의 활동 근거지였던 농업근대화연구회(농근연) 옆에 인쇄회사로 위장한 중앙정보부 사무실이 있었다. 거기서도 이들의 움직임이 체크됐던 것이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펑크가 난 것은 관악 쪽인데, 백삼철이 자기들 내부에서 (대학연합조직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그쪽에서 꼬리가 잡힌 것 같다. 모호한 조건이 있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짜도 정하지 않았다. 역량 점검 결과 학교마다 사정이 있었다. 그런 시점에 터졌다. 그래서 당황했다. 서로 말도 맞추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0·17 광화문연합시위 미수사건’이라고 기록된 이 사건의 진상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구속됐는지조차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당시 재야단체나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의 집계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학생은 30명 안팎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터진 동국대·숙명여대·서울여대·서울공대의 사건도 광화문연합시위와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관련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 무렵 경찰은 이미 이들을 사정권 안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았다면 학내조직·학외조직·연합조직 등 여러 갈래의 세력이 확실한 CT(컨트롤타워) 없이 움직인 것을 한꺼번에 굴비 엮듯이 검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 관계자는 “남민전 하부조직인 민투가 활동을 시작한 시점이라 경찰의 수사력이 집중됐을 것”이라며 10월 거사와 관련한 세력이 한꺼번에 제압된 배경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10월 거사팀이 경찰 정보망에 포착된 경로는 밝혀진 바 없다. 김준묵(현 한국문화진흥 대표)·옥광섭(전 사업) 등이 먼저 검거되면서 조직이 연쇄적으로 드러났다는 일부 관계자의 증언도 확인된 것은 아니다. 백삼철의 말처럼 경찰은 특정 루트가 아닌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한 수많은 조각의 ‘정보 퍼즐’들을 조합해 실체에 접근했을 개연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김준묵·옥광섭이 검거되기 전에 경찰은 10월 거사 조직의 윤곽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민철이 형은 어떻게 됐어요?’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으로 주목받아온 이우재·성욱(현 청양농촌체험학교장)·양민호(현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의 검거는 김준묵이 덜미를 잡히면서 급진전됐다. 그가 검거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불운이 겹쳤다.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운이 나빠 잡힌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 겹쳐 있는 것이다.

김준묵은 9·13시위 전날 기한이 남은 가리봉동 셋방을 빼서 시흥동에 새 아지트를 마련했다. 이삿짐을 옮길 때도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이중의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짐을 용달차에 실어 신촌에 내려놨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용달차를 불러 시흥동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면 경찰이 용달차를 추적해 시흥동 집을 찾아내는 데 적어도 2~3일은 걸린다.

9·13시위를 주동하고 도피에 성공한 이우재·성욱·양민호는 시흥동 새 아지트에서 이틀밤을 묵은 뒤 흩어져 각자 따로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이우재·양민호는 대전으로, 성욱은 충주로 떠났다. 김준묵도 시흥동 아지트를 버리고 일단 속초로 잠적했다. 모두가 ‘도바리(도망)’에 도가 튼 터라 쉽게 잡히지 않을 상황이었다.

경찰이 김준묵에 대한 단서를 포착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9·13시위 관련자를 조사할 때였다. 당시 서울대 인문대 동양사학과는 수사의 표적이 돼 있었다. 9·13시위 주동자 5명 중 양민호·이우재·조성을(현 아주대 교수) 등 3명이 동양사학과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민호·이우재가 도망쳤으니 경찰은 이들을 잡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동양사학과는 한 학년 정원이 10명이었다. 전 학년 학생이 40명 정도밖에 안 돼 서로를 속속들이 알았다. 이 가운데 75학번은 4명이 ‘내놓은’ 운동권이었다. 조성을은 구속되고, 이우재·양민호는 도피중이고, 이승배(전 전국노운협 사무국장)는 ‘현장’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은 동기라고 해봐야 오주석(미술사학자, 작고)·이성구(현 울산대 교수)·신용진(현 MBC 보도국장)·박태욱(현 중앙일보 편집국 부국장)·송충식(현 경향신문 수석논설위원)·송규헌(현 오픈베이스 대표) 등 달랑 6명이었다. 4학년 10명 중 4명이 ‘유고’인 상황이니 과 분위기가 어떨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가뜩이나 ‘요주의 과’로 주목받는 가운데 9·13시위에 대거 주동자로 나섰으니 동양사학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지는 것은 당연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 남학생과 여학생, 학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동양사학과 소속 학생이라면 모두 경찰에 불려갔다. ‘사고’는 여기서 터졌다.

인문대에 의식화된 여학생 그룹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대에서는 여학생은 전면에 나서기보다 남학생의 활동을 뒤에서 돕는 ‘내조자’ 구실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김경화·남화숙·신현숙 등 인문대 여학생 그룹은 과외·번역 등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도피 자금을 마련, 김준묵에게 전달했다. 뒷날 ‘운동권 자금줄’로 통하는 김준묵은 당시에도 이들이 전달한 8만원을 포함해 무려 200만원을 모았다. 200만원은 당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양민호의 최근 회고.

“9·13시위 때문에 인문대 여학생 몇몇을 조사했는데 우리 과 여학생이 실수를 했다. 잘 조사받고 나오다가 조성을한테 ‘민철이 형은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었다. 그걸 경찰이 듣고 ‘민철이가 누구냐’며 다시 조사한 것이다. 김준묵의 가명이 김민철이었다. 결국 경찰이 우리 세 명(이우재·성욱·양민호) 말고 제3의 인물이 있다는 확증을 잡은 것이다.”


경찰은 9·13시위 현장에서 체포한 조성을·김종복(현 캐나다 토론토 비벌리힐즈연합교회 목사)의 진술에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이우재·성욱·김종복이 3개월간 도피하고 또 거사를 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있어야 했다. 9·13주동자들은 양민호가 파이프라인 노릇을 한 것으로 말을 맞추고 알리바이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경찰은 양민호만으로는 그 자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지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김준묵’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포착한 것이다.



실수가 아니라 운이 나빠서

그런데 김준묵을 검거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리봉동 아지트는 텅 비어 있었고, 용달차를 추적해 신촌을 거쳐 시흥동에 이르기까지는 김준묵의 예상대로 3일 이상 걸렸다. 그리고 막상 시흥동 아지트를 덮쳤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김준묵의 주변을 이 잡듯 뒤져 속초로 간 사실을 알아낸 경찰은 거기서도 또 허탕을 쳤다. 김준묵이 막 서울로 떠났다는 것이다.

잔뜩 약이 오른 경찰이 김준묵을 체포한 것은 10월 8일이었다. 김준묵은 10월 10일 저녁 6시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앞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다가 경찰의 집중 추적을 받아 검거됐다. 그가 붙잡힌 이상 이우재·성욱·양민호의 검거는 시간 문제였다.

이 무렵 이우재·성욱은 상계동 은신처에 있었다. 박우섭(현 인천 남구청장)이 마련해준 셋방이었다. 서울대 미생물학과 72학번인 박우섭은 1975년 4·3시위로 제적된 뒤 극단 연우무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문화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우재·성욱에게 상계동 셋방을 마련해준 그는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셋방 자금을 대준 서울공대 제적생 이래경(현 호이트한국 대표)도 이때 조사받지만 구속은 면한다.

그러나 김준묵이 검거됐을 때 이들은 상계동 셋방에 함께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 도피생활로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들은 경찰의 추적이 상계동까지 미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동네 파출소에까지 수배자 전단에 얼굴이 붙어 있어 안전하게 몸을 의탁할 곳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미리 약속한 10월 10일 만나기로 하고 상계동 아지트를 버리고 각자 따로 은신처를 찾았다.

성욱이 찾아간 곳은 탈반 선배인 채희완(현 부산대 교수)이 운영하는 선인장 하우스였다. 장기 도피생활에 지친 그는 그 전까지는 잡힐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9·13시위 때도 흔쾌히 ‘동’으로 참여했다. 잡혀도 ‘편안한’ 감옥이 기다릴 터이니 손해 볼 게 없었다. 그런데 잡히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군중이 형성되자 사복형사들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학교를 빠져나가 관악산 등산로로 도주했다.

사람의 일이란 원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갈 때가 많다. 힘든 도피생활을 청산할 방도만 찾던 성욱은 선인장 하우스에서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생활이 안정되면 감옥에 갈 필요는 없어진다. 삶이 편안하면 감옥은 두려운 곳이 되는 것이다. 인간사의 부조리는 이런 순간에 찾아온다.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잡힐 위험이 가장 큰 법이다. 성욱의 최근 회고.

“도피생활은 정말 암담했다. 철권시대는 언제 끝나고, 내 장래는 어떻게 되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선인장 하우스에서는 지낼 만했다. 생활도 안정됐다. 10월부터 좀 망설였다. 잡혀가서 끝장낼 것인가, 그대로 앉아 있을 것인가…. 10월 10일 약속 장소에 나갈 때도 주저했다. 선배는 위험하니까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양민호가 어렵다고 해서 그의 은신 장소를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나갔고, 먼저 잡혀 있는 민호를 보고 내가 아는 체해버렸다. 그래서 끝난 것이다.”

양민호는 두 사람과 달리 수배 중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10월 6일 석관동 37번 버스 종점에서 유종성·류인렬(연출가, 현 인디저널리스트학교 대표)을 만나 10·17 거사에 사용할 유인물 초안 작업을 분담했다. 그는 왕십리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종성·백삼철팀과 자주 소통하고 있었다. 그가 약속 장소인 수도여사대 앞 다방에 갔을 때는 경찰이 김준묵을 ‘미끼’로 삼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이우재는 다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동양사학과 선배인 고아석(전 무역일보 인터넷본부장)의 아현동 하숙집에 숨어 있었다. 10월 10일 약속에는 예감이 좋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단서를 하나 남긴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상계동 은신처에서 성욱과 헤어질 때 고아석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틀 후 그가 몸을 숨기고 있던 아현동 하숙방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찰을 깨달았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김준묵·양민호·성욱·이우재가 차례로 검거되면서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사람도 줄줄이 구속됐다. 박우섭·고아석은 물론 김준묵의 친구인 편승화까지 구속됐다. 채희완은 성욱이 박우섭 선에서 끊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수배자를 숨겨준 세 사람은 약 한달 동안 구속 상태에 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경찰은 4개월간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이우재·성욱 등을 검거하면서 더욱 기세를 올렸다. 현상금과 2계급 특진의 포상이 걸린 거물에다 김준묵이라는 매우 중요한 인물까지 잡아 수사가 급진전됐다. 이우재는 “성동서에 가니 시경 정보과장이 와서 ‘각하의 지시로 너를 잡으러 다녔다’고 말했다”고 최근 회고했다.



감옥에서 전환점 찾은 조희연

김준묵을 잡으면서 영구미제사건이 될 뻔했던 다른 사건도 하나 해결됐다. 얼마 후 이우재팀은 조희연(현 성공회대 교수)이 잡혀오는 것을 보았다. ‘조 가재’라는 그의 별명은 이들이 붙여준 것이다. 김준묵을 조사하면서 옆구리로 걸려들었다는 뜻이다. 즉 ‘도랑 치다가 잡은 가재’라는 말이다.

뒷날 사회구성체(사구체) 논쟁을 정리하는 등 진보적 학술운동의 최전선에 서는 조희연은 감옥에 갈 계획이 없었다. 사복회 핵심 멤버로서 학내 운동에 깊이 개입했지만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예비조로 빠져 정상적으로 졸업하기로 돼 있었다. 이럴 경우 필요할 때 안전한(?) 유인물 작업만 하면 된다.

판결문에 따르면 조희연은 1978년 5~6월 몇 차례 유인물을 만들어 우편으로 발송하는 일을 했다. 유인물 등사, 수취인 주소 추출, 봉투 제작 등의 작업은 주로 가리봉동 김준묵의 자취방에서 했다. 조희연을 도와서 작업을 함께 한 사람은 한사(한국사회연구회, 당시 등록명은 사회과학회)의 권호영(현 SK 상무), 사철(사회철학회)의 이대현 등이었다. 영원히 묻혀 있어야 할 그의 이런 행적이 김준묵·이우재 등이 검거되는 바람에 드러난 것이다. 이 일로 조희연·권호영·이대현이 구속되고, 김준묵도 여기에 엮여 이들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된다.

조희연의 유인물조에는 이우재의 동양사학과 1년 후배인 김종수(현 도서출판 한울 대표,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도 활동했으나 드러나지 않았다. 김종수는 “가리봉동에 여러 번 간 기억이 있다”며 “이우재 선배의 소재를 캐는 조사는 받은 적 있으나 유인물 건에는 연루되지 않았다”고 최근 회고했다. 그는 한사와 사철 등에 가입했으나 당시에는 ‘대학신문’ 업무에 주력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빵잡이’가 된 것이 조희연에게는 큰 전환점이었다. 다른 긴조9호 세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때 감옥에 들어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주류에 선 많은 교수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연구 주제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그는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암울했던 유신시대에 일체의 것을 박탈당하고 앞길이 꽉 막힌 것 같은 조건 속에서 감옥에 가게 되니, 그동안 존재적 구속으로 지체되었던 의식 발전이 가속된 것 같다. 나는 감옥에서 비로소 돕, 스위지, 루카치 책을 읽었고 밖에서 읽지 못한 많은 책을 읽었다. 감옥은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서대문은 나에게 비판적 연구자가 되게 하는 학교였다.”

김준묵을 검거할 무렵, 경찰은 또 한 명의 결정적인 인물을 잡는다. 광화문시위 조직팀과 대학연합조직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쥔 옥광섭이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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