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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717회 작성일 2009-12-01 12:29
긴급조치 9호 세대 대탐험과 중앙동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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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9호세대대탐험](62)‘공포의 침묵’을 깨고 외치다



제2차광화문연합시위(5) 서울공대 유인물 사건



이화여대 사회학과 73학번 고은광순(현 홍명한의원장, 당시 이름은 고광순)은 ‘노란 딱지’를 두 번 달았다.
 
다시 말해 긴급조치 9호를 두 번 위반했다. 1975년 9월 수도여사대 시위미수 사건과 1977년 4월 이른바 이화여대 ‘검은 리본’ 사건(4·16시위미수사건)에 연루돼서다.
 
‘법무부 학교’(감옥살이를 지칭하는 운동권 은어)를 두번이나 졸업한 그녀는 1978년 10월 즈음에는 학생운동을 청산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해 있었다.

옥광섭(서울대 사회학과 77학번)이 그녀의 서울 구로동 자취방에 찾아온 때는 10월 7일에서 10일 사이의 어느 야밤이었다.
 
그녀는 구로동 도시산업선교회(도산) 간사로 있으면서 구로공단 공장에 위장취업해 있었다.
 
옥광섭 역시 도산의 교사로 자원봉사하고 있어서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다.
 
그는 그날 밤 고은광순의 자취방에서 그녀와 함께 기거하는 후배의 귀가를 기다렸다.
 
경찰이 그곳을 덮친 것은 그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고은광순의 기억을 잠시 빌리면…

카터가 연합조직을 살리다

“밤이 꽤 늦었는데 같이 있던 후배가 안 들어왔다. 옥광섭이 그 후배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기다리던 중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아마 시위 미수 건으로 추적당하는 과정에서 꼬리가 밟혀 미행당한 모양이었다. 그때 나도 함께 연행됐는데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잠깐 조사받고 나왔지만 그는 나오지 못했다.”

사건 관계자 사이에서 대학연합조직과 광화문연합시위팀이 드러난 경로 가운데 하나로 옥광섭을 지목하는 근거가 바로 이 대목이다. 즉 옥광섭이 잡히는 바람에 유종성(전 경실련 사무총장, 현 하버드대 박사과정)이 노출되고, 유종성을 통해 백삼철(현 세명대 한의대 재학)이, 백삼철을 통해 배후그룹이 수사선상에 올랐으며, 나아가서 그 불똥이 대학연합조직에까지 튀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편에 언급했듯이 경찰은 이미 그 이전에 10월 거사 조직의 윤곽을 잡고 있었다는 관측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옥광섭은 서울대 사복회와 새문안교회 등 학내외에 두루 기반을 갖고 있었다. 검거 당시에는 유종성의 광화문연합시위 준비팀의 핵심 활동가로서 시위 현장 동원팀을 조직하던 중이었다. 판결문에는 10월 6일 오후 6시께 고려대부속병원 인근 중국음식점에서 유종성을 만나 ‘광화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학생들을 구하라’는 제의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유종성은 그의 학내 서클 선배이자 교회 선배였다.

광화문시위 조직과 관련한 구속자는 유종성·옥광섭을 비롯해 류인렬(연출가, 현 인디저널리스트학교 대표)·황인성(현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김성남(고려대 간호학과 76학번) 등 5명이다. 황인성은 유종성의 배후로 연루됐고, 김성남은 유종성의 부탁을 받고 선언문을 초안한 혐의였다. 유종성·류인렬과 함께 움직인 이필렬(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에너지대안센터 대표)은 검거를 피해 ‘공소외’로 처리됐다. 다음은 유종성의 최근 회고.

“옥광섭이 제일 먼저 연행됐다. 내가 김성남한테서 유인물 초안을 전달받은 다방에서 꼬리가 잡힌 것 같다. 그가 잡히면서 나도 잡혀갔고, 얼마 안 돼서 백삼철이 들어왔다. 그래서 삼철이가 고생을 많이 했다. 황인성 선배가 드러난 것은 삼철이가 약속장소를 적은 메모쪽지를 갖고 있어서였다. 몸수색 전에 먹어치우려고 했는데 그게…”


유종성은 광화문시위를 준비하면서 황인성의 ‘코치’를 받았다. 백삼철은 정태윤(전 한나라당 사이버위원장)·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의 자문을 받았다. 민청학련 세대인 이들 학내외 배후그룹까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서울공대 운동권의 터닦기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경찰이 더 이상 수사를 확대하지 않은 점이다. 이들 3명 외에는 배후를 더 캐내지 않은 것이다. 대학연합조직도 6개교 선에서 매듭지었다. 긴급조치 9호 시대 초반처럼 엄중하게 수사했다면 참여 대학도 더 되고, 구속자도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

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인권외교를 표방한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악재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긴조9호 체제에 대한 저항과 반감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수사 확대는 이를 더욱 자극해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대학연합조직이 ‘서울시내 6개대연합’에 그친 것은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한 경찰 덕이다. 이 건으로 구속 또는 수배된 사람은 장준영(현 청와대 사회조정1비서관, 성균관대)·김선택(현 하이팩스 대표이사, 서강대)·정경연(현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 고려대)·권명자(전 참교육학부모회 사무국장, 서울여대)·강구웅(작고, 서울농대)과 서울대(관악캠퍼스)의 정태윤·주대환·백삼철 등 8명이다.

하지만 대학연합조직에는 이들 외에 숙명여대·서울공대·중앙대·이화여대 등이 참여하고 있거나 한 적이 있다. 관계자들이 “실제로는 ‘7개대연합’ 또는 ‘8개대연합’이었다”고 주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가운데는 연합전선의 지침에 따라 행동에 돌입한 학교도 있었고, 날짜를 조율하던 중에 학내 사정 때문에 독자적으로 시위를 시도한 곳도 있었다.

이 무렵 독특한 세력과 컬러를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인 캠퍼스로 서울공대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울공대는 공릉동(현 서울산업대 자리)에 있었다. 서울대의 15개 단과대학 중에 하나지만 캠퍼스가 따로 떨어져 있고, 전국 대학 캠퍼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였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관악 캠퍼스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운동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한 1978년 10월 11일 서울공대 캠퍼스에는 정체불명의 유인물과 벽보가 나붙었다. 반정부 유인물이 1·2호관 강의실 의자 밑에서 대량 발견됐고, 1호관 학생과 및 2호관 기계설계학과 사무실 앞 편지함에 투입돼 있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기숙사 1·2호동 화장실 대변칸 벽과 옥상 등에도 유인물이 부착돼 있었다.

“보라! 학우여, 유신독재의 폭력 아래 유린당하고 억압받는 민족의 진실을! …민족 통일이라는 허울 좋은 사기술로 유신독재체제를 발족하여… 박정희 독재정권은 강압적 수단으로 긴급조치를 연이어 발동…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

‘학원민주투쟁선언’이라는 제목의 이 유인물 말미에는 ‘10월 17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시민·학생 연합 유신헌법 철폐, 독재정권 타도의 대집회를 개최한다’ 등 3개 항목의 행동강령이 적혀 있었다. 따라서 이 유인물을 살포한 주체는 관악팀 또는 대학연합과 연계된 조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학연합조직과 서울공대의 연결 관계를 파악하려면 먼저 공릉동 운동권의 맥락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긴급조치 9호 시대 학생운동은 학내·학외·대학간 연결이 점조직 형태를 띠는 게 보통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거에 모든 인자가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불암회’(회장 이화영)라는 친목 모임이나 ‘참여하는 과학기술인 연대’(공동대표 오승렬·윤조덕·신철영·이화영·김태유) 등으로 남아 있는 서울공대 운동권의 족보는 66학번 서경석(목사, 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집행위원장)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서울공대 학생운동의 본진이 되는 이른바 A팀, B팀, C팀이라 불리는 조직이 그가 4학년 올라갈 무렵 결성한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산사연 창립 멤버는 이병령(전 유성구청장)·신진휴(현 기업인)·오승령(현 기업인)·윤조덕(현 한국노동연구원 주임교수)·김화곤(현 기업인) 등 68·69학번 그룹이다. 

유재현(전 경실련 사무총장)·김석준(현 한나라당 의원)도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 서경석은 산사연 창립 과정을 저서 ‘꿈꾸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1996)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총궐기와 학생회 사이에서

“학생운동의 불모지대인 서울공대에 진보운동의 싹을 심고 말겠다는 결심을 한 뒤 실제로 산업사회연구회라는 서울공대 최초의 학생 서클을 만드는 데도 성공한다. 그 당시 나는 학내 데모가 있을 때면 현장에 나가 앞에서 선동하는 학생들을 유심히 봐두곤 했다. 

그리고는 데모가 끝난 뒤 눈여겨 봐두었던 후배를 찾아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가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선동을 했는지, 민중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있는지, 이것 저것 관찰했다. 말하자면 공대 후배들 가운데 운동권 후배로 키워볼 만한 재목을 찾아내는 일을 한 것이다.”

산사연은 70학번 신철영(전 경실련 사무총장)·김태유(서울대 교수) 등을 거쳐 71학번 들어 급성장하게 된다. 교련반대운동으로 10·15위수령이 난 해에 입학한 71학번에는 이화영(현 기업인, 불암회 회장)·최준영(혁신교육전문가)·신수철(작고) 등을 비롯한 열혈 활동가가 넘쳐났다. 그

래서 단일 조직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새*를 쳐서 산업경제연구회(산경연)라는 또 하나의 조직을 탄생시킨다. 뒷날 산경연은 A팀, 산사연은 B팀이라고 불리게 된다.

A·B팀 간에는 특별한 이념적 성향이나 파벌의식이 없었다. 굳이 차이점을 들라면 A팀은 외부활동, B팀은 내부활동에 더 비중을 두는 정도였다. 팀간 교류도 활발해 A·B라는 이름만 다를 뿐 양쪽이 ‘한식구’처럼 지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라도 일단 수목이 자라기 시작하면 저절로 물이 생기고 토양이 비옥해지는 법이다. 그것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밀림으로 변할 수도 있다. 

운동의 불모지에서 씨앗이 자라면서 서울공대는 급격하게 변모해갔다. 백경진(현 과학기술인연대 상임부대표)·이종원(현 일본 릿쿄대 교수)·조중래(현 명지대 교수)·양태열(현 기업인) 등 72학번과 이래경(현 호이트한국 대표)·김양화(현 부산대 교수)·홍성표(현 학원강사)·이화성(현 농업) 등 73학번에 이르러 다소 주춤하는 듯했으나 74학번에 이르러서는 A·B 두 팀으로도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팽창해 C팀이라는 또 하나의 그룹이 분가하기에 이르렀다.

72·73학번의 숫자가 적은 것은 1971년 10·15위수령과 이듬해 10·17유신쿠데타와 관련이 있다. 

위수령과 계엄령을 경험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리크루트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여건에 운동권이 된 72·73학번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이듬해 긴급조치 9호 선포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72학번이 3학년이 되던 1974년 4월 초에 서울공대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운동권에서는 학생회를 ‘접수’하기로 하고 이종원을 후보로 내정해놓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4월 3일 전 대학 총궐기’라는 민청학련의 지침이 내려왔다. 72학번 의식분자들은 고심했다.

 총궐기에 참여하느냐, 학생회를 구성하느냐. 백경진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단 이 데모는 유보하자, 학생회 구성부터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종원과 양태열이 학생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4·3은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이종원이 학생회장이 된다. 그런데 우리 계획은 빗나가버렸다. 민청학련이 워낙 크게 터지니까…”


모든 학교가 다 죽고 4·3거사에 호응하지 않은 서울공대만 살아남은 꼴이 돼버린 것이다. 이종원·양태열·백경진은 4·3 때 시도하지 못한 시위를 4월 9일 하기로 결의한다. 민청학련으로 학생들을 다 때려잡았어도 아직 살아 있는 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아니, 모든 학교가 다 죽었으니 서울공대라도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백경진의 기억을 더듬으면…

“공대 1호관 앞에 학생총회 안내문으로 소집 통보를 했는데 워낙 얼어붙은 분위기라 겨우 30명 정도가 모였다. 유인물을 뿌리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다 어차피 3명이 책임지기로 한 마당이니 결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인물을 뿌리니 학생들이 줍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래서 현장을 지휘하기로 한 이종원은 동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현장을 떴고, 양태열과 나도 제각기 도망쳤다.”

양태열은 산사열 계열이 아니라 서울공대 농촌 관련 서클인 향토공학회(향공회) 소속이었다. 그가 운동권에 리크루트된 일화가 있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되고 학교 문이 닫히자 백경진 등 산사연 계열 운동권은 학교 앞 자취방에 모여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막걸리 마시고 대성통곡하는 1학년이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수소문해서 찾아보니 양태열이었다. 그 뒤부터 그는 산사연 그룹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임 보시기에 좋은 공범’

다른 대학이 쑥대밭이 된 상황에 서울공대가 ‘공포의 침묵’을 깨고 나온 예는 73학번이 활동한 이듬해에도 그대로 재연된다. 4월 8일 긴급조치 7호 발동과 11일 서울농대 김상진 할복 사건으로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이들은 4·15시위로 침묵을 거부했다(본 시리즈 제8화 ‘산 자는 따르리라’ 참조). 이 시위로 이래경·홍성표·이화성 등 7명이 제적된다.

전통적으로 공과대학은 학생운동과 큰 인연이 없는 대학이었다. 엔지니어를 꿈꾸는 공학도의 일반적인 정서가 그렇고, 빡빡한 수업 일정 등 커리큘럼도 운동에 대한 생각을 가로막는다. 다른 과목과 달리 공학은 잠시 딴 생각을 품거나 공부에 소홀하면 금방 표시가 나기 때문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피어난 서울공대 운동은 뭔가 다른 색깔을 띨 수밖에 없었다. C팀에서 활동했던 75학번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환경전문기자)의 분석이 시사적이다.



“학생대중의 조직이 약하고 운동가는 소수일 수밖에 없는 조건, 진로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극과 극을 달릴 수밖에 없는 조건, 그런 악조건에서 힘들고 외롭게 운동을 하다 보니 골수 운동가가 많이 나오고, 이념적으로 래디컬한 경향을 띠기 쉬웠다. 졸업 후 진로를 놓고 고민할 때 가장 모범 답안이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으로 많이 갔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사회·시민운동의 개척자를 많이 배출한 것이 서울공대 운동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C팀을 만든 74학번 주축은 김부섭(현 큐빅테크 대표이사,중앙고 65회) ·김일섭(전 부천시의원)·
 
김경중(현 넥스트바이오 대표이사,중앙고 65회) 등이다.
 
김부섭은 “2학년 후반기부터 학내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며 “별도로 활동하다 보니 C팀으로 불리게 됐다”고 최근 회고했다.
 
이렇게 A·B·C 3개 진용으로 재편되면서 서울공대 운동권은 한결 체계를 갖추게 됐다.
 
3개 그룹은 학번별로 모여 당면 문제와 활동 방향을 논의하는가 하면 비운동권 서클에 ‘침투’해 그들을 개조하는 역할도 분담했다.
 
이를테면 1977년 4·11시위는 A·C팀에서 책임지기로 74학번끼리 합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검거선풍 와중인 1978년 10월 11일 서울공대 구내에 유인물이 뿌려진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대학연합조직의 초기 멤버였던 김부섭은 수배중이었고, 그를 대신할 서울공대 라인도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분명히 연합조직과 교감하는 세력이 한 일 같은데 당사자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열쇠는 유종성이 쥐고 있었다. 유종성과 소통한 인물은 뜻밖에도 76학번 배규식(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었다.
 
그는 유종성으로부터 “광화문연합시위에 맞춰서 공대에서도 한 번 쳐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검토 끝에 “공대는 어려우니 유인물 작업이나 하겠다”고 말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주대환이 관리하는 76학번 언더그라운드 10인방의 일원이기도 한 그는 이 일로 구속되고 만다.
 
 75학번 A팀 변재용(현 한솔교육 대표이사)과 C팀 조홍섭까지 구속되는 이 사건이 드러난 루트는 유종성이나 관악팀은 물론 대학연합조직도 아니었다.
 
기막히게도 그 진원지는 서울공대와 끈끈하게 연결된 서울여대였다.

서울공대생 3명과 서울여대생 3명이 함께 투옥돼 ‘임 보시기에 좋은 공범’으로 회자된 이 사건은 가장 에로틱(?)한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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