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세대 대탐험과 중앙동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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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광화문연합시위(6) 서울여대 유인물 사건
대학연합조직이 무너지고 있던 1978년 10월 14일 오후 5시께 서울 공릉동 주택가.
졸업을 앞둔 서울여대생 4명이 한 자취방에 모여 있었다. 학내 최대 운동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녹수회의 대표주자이자 대학연합조직의 일원이기도 한 권명자(전 참교육학부모회 사무국장), 탈춤반(민속극연구회)의 김숙임(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 여연회(여성문제연구회)의 박희옥(현 한솔교육 상무), 그리고 학도호국단 연대장 출신의 이연숙(현 경남대 강사)이었다. 모두 나름대로 학내 조직의 리더이자 의식화된 그룹을 대표하는 수장이었다.
이들은 10·17광화문연합시위를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으로 다음날 학내에 반정부 유인물을 살포할 계획이었다. 이날 모임은 유인물 문구를 최종 확정하고 밤새 등사 작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생을 뒤바꾼 축제 프로포즈
권명자의 자취방에서 이뤄진 이 모임은 서울여대뿐 아니라 서울공대, 나아가 대학연합조직까지 연결되는 대사건으로 비화한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이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울여대 운동권의 독특한 성격과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서울여대에서 가장 강력한 학생 조직은 녹수회였다. 녹수회는 67학번 김연옥(전 교사)이 서울법대 66학번 권형원(현 대주전자재료 전무·대만지사장)과 연대해 학내에 조직한 서클이었다. 즉 농법회와 연합서클 형태였다. 두 사람은 뒤에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녹수회와 농법회는 이 둘의 관계만큼이나 끈끈한 유대를 이어오고 있었다.
녹수회는 72학번 권태순(현 대명중 교사), 73학번 박성자(전 농림부 여성정책담당관), 74학번 박문숙(현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등을 거쳐 75학번 권명자에 이르는 동안 학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조직으로 떠오른다. 이 가운데 뒷날 서울상대 운동권 김병곤(작고)과 결혼하게 되는 박문숙은 4학년 때인 1977년 4월 서울공대·이화여대 등과 연합시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학내에 유인물을 살포한 뒤 ‘동’을 뜨려다 형사들의 마크가 심해 포기했다.
공릉동 자취방에 모인 4명의 여학생은 모두 녹수회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었다. 권명자와 이연숙은 녹수회의 정식 멤버였다. 박희옥·김숙임은 다른 조직을 주도하는 위치였지만 녹수회 사람들을 거의 다 알았고, 활동도 함께 했다.
권명자가 이연숙보다 늦게 녹수회에 입회하지만 강력한 활동가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연숙은 권명자와는 개인적으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었다. 즉 이날 자취방 모임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이연숙은 집이 가난했다. 단칸 셋방에 살며 막노동 등으로 생계를 잇는 가정의 1녀1남 중 장녀였다. 사립 여대에 들어갈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공부를 잘해 서울여대 농촌과학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특별입학을 한 것이다.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할 처지였던 그는 녹수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학교로부터 적잖은 주목을 받는다. 서울여대는 다른 여자대학이나 기독교계 학교와 비교해서도 독특한 점이 있었다. 1~2학년 때 의무적으로 생활관에 들어가야 했다. 생활관 과정이 커리큘럼에 포함돼 있는 것이 다른 여대의 기숙사 생활과 차이점이었다.
2학년 때 이연숙은 직선으로 뽑는 생활관 자치회장이 된다. 이것이 그가 3학년 2학기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학도호국단 연대장에 임명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학교 측으로서는 학생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을 공조직 대표로 지명하는 것이 무리가 없었다. 이연숙이 비록 녹수회 농활 등을 통해 의식화됐다고 해도 중책을 맡겨놓으면 최소한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을 법하다.
하지만 학도호국단 연대장으로서보다 녹수회 회원으로서의 활동이 이연숙의 인생에 더 지독한 인연을 안겨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였고, 모두 운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찾아온 인연의 색깔은 핑크빛이었다. 3학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피하고 싶었던 잔이 눈앞에
“3학년만 참가하는 축제가 있었다.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특별히 사귀는 사람이 없었다. 녹수회는 농법회와 매년 합동 농활을 가는데, 그러기 위해 학기 중에도 함께 공부하고 세미나하고 평가회를 하는 등 서로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모두 진지했고 열심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무슨 일이든 매우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축제 파트너로 초청하기로 했는데….”
이연숙의 눈에 들어온 농법회 사람은 서울대 철학과 75학번 김재현(현 경남대 교수)이었다. 이연숙이 날린 ‘태릉축제 초대장’은 또 한 쌍의 농법회-녹수회 커플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첫 번째 프로포즈는 이연숙이 거절당했다. 매우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연락이 왔다.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처음에 거절한 것은 축제 때 입을 양복이 마땅찮아서였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묘한 일이 벌어진다.
청량리 동산다방에서 파트너를 기다리던 이연숙은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나타난 김재현으로부터 겁나는 얘기를 들었다. 동료·후배 수백명이 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얄궂게도 그 날이 서울대 26동 사건이 일어난 1977년 10월 7일이었던 것이다.
역사나 개인사에서 가정법은 무의미하다지만 두 사람의 인생에서 그것은 중요한 현실이었다. 이연숙이 다른 파트너를 구했다면, 김재현이 이연숙의 프로포즈를 끝내 거절했다면…. 이연숙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고, 김재현도 다른 길을 갔을 가능성이 크다. 김재현은 축제 때 입고 갈 양복을 사느라 26동에서 열린 사회학과 심포지엄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연숙이 태릉축제에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26동에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두 번째 찾아온 녹수회와의 인연은 잿빛이었다. 학도호국단 연대장 임기를 무사히 마친 그는 녹수회 동기 권명자로부터 긴급 제의를 받는다. ‘10월 17일 서울의 전 대학과 시민이 광화문에서 총궐기한다. 그 전에 서울여대도 시위를 해야 한다. 반드시….’ 피하고 싶은 잔, 그토록 두려워하던 잔이 기어이 그의 앞에 놓이고야 만 것이다.
권명자의 국문학과 동기 김숙임은 조금은 별난 의식분자였다. 대구 섬유자본가의 딸인 그는 당시로서는 더없이 좋은 환경인 잠실의 아파트에 살았고, 남들이 의식화 공부를 할 때 재즈피아노를 치는 등 노는 물이 완전히 달랐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기독교운동, 여성운동, 민중교회운동 등 여성운동권이 전개해온 모든 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여성평화운동가가 돼 있는 그의 삶은 원래부터 꿈꾸었거나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다.
1977년 연세대 10·25데모로 구속된 이대수(목사, 현 경기시민사회포럼 사무처장)와 결혼한 것도 학창시절에 의도하지 않았던 길을 간 덕이었다. 그 역시 1978년 10월 14일 권명자의 자취방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여성평화운동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대수와 맺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김숙임은 문화적 소양과 신명이 깊었다. 거기에 남다른 자질을 보였고, 스스로도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의 문화적 ‘끼’는 교내 탈춤반 조직으로 나타난다. 당시 꽤 유명하던 극단 ‘민예’가 이화여대 앞에 있었다. 거기에 그의 친척이 있었다. 그는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그 극단에 가서 탈춤을 배웠다. 1977년 1학기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한 서울여대 민속극연구회는 그와 권명자·박희옥 등 국문과 75학번의 2년 가까운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김숙임은 탈춤과 운동의 상관관계에 대해 친구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탈춤에 대해 ‘문화’ 그 자체로서 의미를 두려고 했다. 스스로 학생운동을 할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럴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기억을 잠시 빌리면….
“1학년 때부터 권명자를 비롯한 녹수회 친구들이 학생운동을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이념적인 부분보다 문화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재미도 있었고 잘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대학 탈춤반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념적인 요소 때문에 자꾸 그쪽으로 돌았다. 탈춤이 학생운동과 연결된 부분이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내게 영향을 주기도 한 것이다.”
부담을 느끼면서 영향을 받는 것, 이런 아이러니컬한 상황은 뒷날 더 엄청난 무게로 그의 인생을 돌려놓게 된다. 하지만 권명자의 자취방 모임에 참여할 때만 해도 그는 사고를 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꼭 졸업을 해야겠다는 분명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 몰래 한번 (유인물을) 뿌리고 조용히 지나가는 거다. 꼭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거다….’ 그는 스스로 위안했다.
또 한명의 참석자 박희옥은 이연숙·김숙임에 비해서는 홀가분한 처지였다. 부모는 해남에서 병원을 하고 있었고, 그는 광주의 조부모 슬하에서 전남여고를 다녔다. 크게 걸리는 문제도, 갈등할 것도 없었다. 생활관에 묶여 있던 2학년 때까지 그는 학내에서 활동했다. 김숙임과 함께 탈춤반 조직에 참여하고, 권명자와 함께 녹수회 사람들과 어울렸다.
3학년이 되어 생활관에서 풀려난 그는 긴조9호 세대의 필수 코스인 야학에 뜻을 두었다. 1978년 10월 14일 공릉동 자취방 모임에서 비롯된 대사건의 씨앗이 바로 여기서 싹튼다. 서울여대 학생운동의 또 하나의 끈끈한 라인인 서울공대와의 커넥션이 생성되는 것이다.
서울여대-서울공대 커넥션
서울여대 캠퍼스는 육군사관학교와 서울공대 사이에 있었다. ‘좌육사 우공대’라는 지리적 조건이 서울여대생의 인생을 정반대로 갈라놓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물론 인적 커넥션은 거꾸로 ‘좌공대 우육사’로 나타난다. 보수적 성향이 짙은 서클이나 그룹은 자연스럽게 육사와 교류를 맺게 되고, 이념적 경향성을 띤 것은 서울공대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맺어지는 커플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박희옥은 상계동에 야학을 시작하면서 경험 있는 강학(야학 교사)이 필요했다. 녹수회 선배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이 서울공대 토목과 75학번 변재용(현 한솔교육 대표이사)이었다. 사건 공범으로 같이 재판받고, 감옥살이를 함께 하고, 졸업식·결혼식을 동시에 치르고, 한솔교육 동업자가 되는 두 사람의 기막힌 연분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변재용은 서울공대 A그룹의 핵심 활동가로 구로동 등 여러 곳을 섭렵한 야학의 베테랑이었다. 두 사람은 동년배지만 야학에서는 변재용이 대선배였다. 박희옥은 그의 성실하고 겸손한 면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야학의 노하우 등을 배우고 그 과정에 다른 영향도 받았음은 물론이다.
남녀가 함께 오래 지내면 그만큼 가까워질 기회도 많게 마련이다. 공릉동 일대에는 서울여대와 서울공대 자취생이 많았다.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이 자주 생긴다. 연탄이 꺼지면 불을 빌리고 좀 더 친해지면 반찬을 나눠 먹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 진도(?)가 나간다.
변재용은 공릉동·월계동 등 학교 부근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박희옥도 공릉동에서 권명자와 함께 자취하던 시기가 있었다. 3학년 들어 박희옥은 야학활동과 별도로 여연회라는 서클을 학내에 조직한다. 녹수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 탈춤반 일부와 이념적 색채가 있는 몇몇 서클의 인자를 모은 것이다. 이연숙·김숙임 등이 여연회 창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서울여대 여연회가 A·B·C그룹으로 대표되는 서울공대 운동권과 ‘혈맹’ 수준의 굳건한 커넥션을 구축한 데는 변재용-박희옥 커플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3명의 서울여대생과 3명의 서울공대생의 인생을 바꾼 운명의 날인 1978년 10월 14일 밤, 권명자의 자취방에는 서울여대 4인방 외에 남자 한명이 있었다. 이미 박희옥과 애인 사이로 발전한 변재용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박희옥의 연락을 받고 저녁 8시께 자취방에 참석해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유인물 등사 작업을 도왔다. “서울여대 천이백 학우들이여!”로 시작되는 ‘자유민주선언’은 권명자가 초안한 내용을 나머지 3명이 검토해 확정한 것이었다.
유인물 등사를 마친 이들은 다음날 오전 11시 30분부터 4명이 각자 구역을 담당해 교내에 유인물을 뿌리기로 하고, 10시까지 눈을 붙이기로 했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 것은 이들이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때였다. 여자들의 거처에, 그것도 꼭두새벽에 또 한 명의 남자가 들이닥친 것이다. 권명자의 최근 회고.
“부모님이 광명에 계셨다. 거기서 작은 오빠가 찾아왔다.
6개대연합 건으로 형사들이 나를 잡으러 우리 집에 왔기 때문이다.
오빠가 내게 그걸 알려주려고 물어물어 내 자취방을 알아내 새벽녘에야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계획을 수정했다. 유인물을 뿌리지 않기로….
여기서 덮어버리면 아무 일도 없는 게 되니까. 나만 피하면 모든 게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권명자가 추적당하는 상황에 유인물 살포를 강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이들은 아쉽지만 하던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만들어놓은 유인물을 소각하고 등사기는 추적되지 않을 곳으로 숨기는 등 모든 증거를 없애는 게 급선무였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들은 모든 증거를 인멸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꼬리가 잡힌 것은 이들도 어쩔 수 없는 곳에서 경찰이 단서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해야겠다”
권명자를 추적하는 경찰이 문제의 공릉동 자취방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론 서울여대 유인물 건은 경찰로서도 알 수 없었다. 경찰이 눈을 붉히고 알아내려는 것은 권명자의 소재였다.
당연히 자취집 주인을 조사할 것이고 거기서 단서가 나올 수 있었다.
권명자에 따르면 경찰이 주인을 통해 그날 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거기에 남학생도 있었다는 가외소득까지 얻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유인물 작업에 참여했으나 뿌려보지도 못하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김숙임은 재판을 받으며 비로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 된다. 부담을 느끼면서 영향을 받은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느꼈던 부담은 자신의 안이한 생각에서 비롯됐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만한 일로 실형을 때리는 체제에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법정 진술을 통해 공언했다. “앞으로 이런 일을 해야겠다”고.
출소 후 그는 곧바로 노동현장에 뛰어들었으나 옥중에서 비특이성 골수염 수술을 한 병력 때문에 육체노동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래서 방향을 바꾼 곳이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였다. 평생의 반려자이자 동지가 될 인연인 이대수가 거기에 있었다.
고민 고민 끝에 권명자의 자취방에 갔던 이연숙은 하나를 잃고 다른 하나를 얻는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가 투옥된 지 석달 후 어머니가 유방암 수술을 한 것이다. 유방암이 드물던 시절이라 그는 그것이 전적으로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충격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가슴 아픈 가족사와 별도로 그가 얻은 것은 사랑이었다. 김재현이 면회를 다니면서 둘의 관계가 주변에 알려져 공식화(?)되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긴조9호 시대 운동권 커플은 어느 한쪽이 투옥되면 다른 쪽은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 관례였다. 남자가 활동하고 여자는 옥바라지를 하는 게 보통이다. 김재현-이연숙 커플처럼 반대의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남자의 옥바라지는 책을 넣어주고 가끔씩 가족 면회 때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은 배려도 여자의 고단한 감옥살이에 큰 힘이 된다. 서신이 제한되던 시절이라 김재현은 책 안의 특정 부분에 ‘나는 잘 있소, 건강하오’라는 정도의 간단한 메모로 사랑을 전했다.
이들과 변재용-박희옥 커플이 구속되면서 불똥을 맞은 사람은 서울공대 10·11유인물팀인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편집국 부국장)·배규식(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었다. 이들은 또 다른 루트를 통해 서울여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죽순회라는 연합서클이었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제2차광화문연합시위(7)
구름 같은 여자였다.
백경진(현 과학기술인연대 상임부대표)은 혼란스러웠다.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어느 샌가 바싹 다가와 있는 여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뭔가 간절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듯하면서도 말이 겉돌고 진지하지 못했다. 이화여대 의류학과 한민성은 한마디로 정체불명의 여자였다.
후배의 소개로 세 번째 그녀를 만난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이런 여자와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여자와 만나는 것, 특히 이런 여자를 만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사실 그는 여자를 사귈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말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도망의 달인’ 김부섭의 무용담
서울공대 기계공학과 72학번 백경진은 열혈 공학도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직후 무모하게도 4·9데모를 주동한 전력도 있었다. 당시 그는 산사연 소속이면서 흥사단아카데미 경인지역연합회장이기도 했다. 학내외 기반을 두루 갖춘 만큼 민청학련 조직에 옭아넣기 좋은 인물이었다.
서울공대 민청학련 사건은 이종원(현 일본 닛쿄대 교수)이 혼자 재판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종원만 검거되고 4·9시위를 함께 주동했던 백경진·양태열(현 금정공업 대표)과 서울공대책으로 조직도에 오른 신수철(작고), 예비검속 대상자인 최준영(혁신교육전문가) 등이 모두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백경진의 동기이며 조영래(작고)의 동생이기도 한 조중래(현 명지대 교수)도 이때 피신했다. 그는 형 때문에 심한 견제를 받았지만 이들과 활동을 함께 했다.
백경진은 신수철·양태열과 함께 이문동에 숨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설을 따라 중앙정보부 코앞에 은신한 것이다. 이들은 경찰이 가가호호를 방문해 수배자를 색출하는 과정을 면밀히 체크하면서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경찰에 자수한 것은 긴급조치 4호가 해제되고 두 달이 지나서였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는 경찰도 일을 확대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다.
적용 법규가 긴급조치가 아닌 집시법이라 구류 25일이라는 가벼운 처분을 받고 이듬해 초 군에 입대했다.
1978년 봄 그가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공릉동은 바뀌어 있었다.
산사연은 A·B·C팀으로 분화돼 있었고, 학생운동의 주도권도 후진에게 넘어가 있었다.
서울공대 최장기 도피 기록을 보유한 ‘도망의 달인’이라는 그의 명성도 빛이 바래 있었다.
더 ‘엄청난’ 후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74학번 김부섭(현 큐빅테크 대표이사)이었다.
당시 서울공대 운동권의 ‘히어로’는 단연 C팀의 김부섭(중앙고 65회)이었다.
1977년 4·11시위 후 2년째 도피중이었다.
백경진의 6개월을 더블스코어로 앞선, 그것도 여전히 진행중인 기록이었다.
그는 강한 신념과 카리스마를 갖춘 활동가였다.
복학생 백경진의 귀에는 김부섭이 수배중에도 변장을 하고 후배를 만난 이야기라든가
4·11시위 때 연행된 김경중(현 넥스트바이오 대표 ,중앙고 65회)이 조사받던 중에
도망나온 무용담 등이 들렸고, 그 영향이 캠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뒷날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기까지 약 20개월 도피행각을 벌이고 약 9년 동안 복역하게 되는 김부섭은
후배 운동권의 정신적 사표(師表)였다.
운동에 있어서 결코 겁먹거나 비굴하게 처신하지 않았다는 게 그와 운동을 함께 한 서울공대 인사들의
증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우 낙천적인 면모를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피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후배들과 교감하며 “잘 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이런 학내 분위기로 보아 백경진은 자신이 역할을 할 특별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학업에 충실하고, 후배들 세미나 지도나 하며 ‘조용히’ 지내던 참이었다.
1978년 가을 일어난 10·17광화문연합시위 미수사건과 서울공대 유인물 사건은 그와 무관한 것이었다.
변재용(현 한솔교육 대표이사)·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편집국 부국장)·배규식(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등 75·76학번 후배들이 구속되는 과정에서 그가 개입한 부분은 없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운명적인 계기는 이 사건 뒤에 찾아왔다.
후배들이 구축한 서울공대-서울여대 커넥션에 의해서였다.
72학번인 그가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서울공대 운동권은 서울여대와 활발한 교류가 없었다.
오히려 이화여대의 새얼·파워·아카데미 멤버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파워의 박혜숙(작고, 약학과 72학번), 아카데미의 정강자(현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등이 그와 알고 지내던 이화여대 운동권이었다.
서울공대 운동권은 이화여대팀을 태릉 배밭에 초대하는 등 각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복학해서 보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후배들은 멀리 있는 이화여대보다 가까이 있는 서울여대와 동지적 유대를 맺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그룹이 죽순회였다.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된 조홍섭·배규식이 바로 이 죽순회 소속이었다.
여자 한명을 무조건 책임져라
죽순회는 원래 서울공대·건국대·수도여사대(세종대의 전신) 등 3개 대학의 연합서클이었다.
농촌봉사를 주요 활동 영역으로 삼은 순수 서클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서울공대 학생운동에서 한몫을 차지하는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 죽순회의 세미나에 서울여대생이 함께 참여하면서 두 학교 운동권의 관계가 급진전된 것이다.
이 무렵 서울공대 운동권은 주력인 A·B·C그룹 외에 향공회·흥사단아카데미·교회운동권 등과 이 죽순회가 활동하는 구도였다.
C팀 소속의 조홍섭은 죽순회 외에도 공해 관련 스터디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조영래가 공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의 동생 조중래가 주축이 돼서 운영한 공해연구회는 뒷날 한국 환경운동의 한축을 형성하는 환경과공해연구회(회장 장영기, 1989년 창립)의 밑거름이 되는데, 조홍섭도 일찍이 공해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참여했다.
그는 감옥에 가서 최열로부터 환경 관련 서적을 물려받는다.
배규식은 아카데미, 경동교회, 죽순회 등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부인 임주희(현 한솔교육 학원프랜차이즈사업단장)를 만난 것은 죽순회 활동을 통해서였다.
임주희는 박희옥(현 한솔교육 상무)의 뒤를 이어 여연회 회장을 지낸 서울여대 운동권의 중심적 인물이다.
배규식은 공대뿐 아니라 관악, 나아가서 학외조직과도 광범위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유종성(현 하버드대 박사과정, 전 경실련 사무총장)·조형제(현 울산대 교수)·박순성(현 동국대 교수) 등이 그의 관악캠퍼스쪽 채널이었다.
변재용·조홍섭·배규식이 구속되던 시기에 서울공대에는 75학번 임국진(현 창의와탐구 대표이사)·김광섭(현 블라디보스토크 거주)·김연민(현 울산대 교수)·김명원(현 환경대안협회 이사장)·이종현(현 웰컴소프트 대표), 76학번 송경평(현 창의와탐구 인천지사 대표)·김두희(현 동아사이언스 대표이사), 77학번 이효추(현 명승건축 대표), 78학번 한록희(현 효명ECS 대표)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배규식에 따르면 10·11 유인물 살포는 구속자 3명 외에도 김연민·이효추 등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움직인 것이었다.
이러한 학내 동향을 조용히 관조하던 백경진에게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는 유인물 사건이
학내를 휩쓸고 지나간 지 한달쯤 지나서였다.
도피중이던 김부섭이 긴급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부탁이었다.
여자를 한 명 붙여줄 테니 무조건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 시대 운동가에게 이성(異性)은 장애물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어렵게 하거나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운동을 계속할 사람은 이성교제를 자제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토였다.
그게 본인을 위해서나 이성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 점은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였다.
복학생 백경진의 귀에는 김부섭이 수배중에도 변장을 하고 후배를 만난 이야기라든가
4·11시위 때 연행된 김경중(현 넥스트바이오 대표 ,중앙고 65회)이 조사받던 중에
도망나온 무용담 등이 들렸고, 그 영향이 캠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뒷날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기까지 약 20개월 도피행각을 벌이고 약 9년 동안 복역하게 되는 김부섭은
후배 운동권의 정신적 사표(師表)였다.
운동에 있어서 결코 겁먹거나 비굴하게 처신하지 않았다는 게 그와 운동을 함께 한 서울공대 인사들의
증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우 낙천적인 면모를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피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후배들과 교감하며 “잘 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이런 학내 분위기로 보아 백경진은 자신이 역할을 할 특별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학업에 충실하고, 후배들 세미나 지도나 하며 ‘조용히’ 지내던 참이었다.
1978년 가을 일어난 10·17광화문연합시위 미수사건과 서울공대 유인물 사건은 그와 무관한 것이었다.
변재용(현 한솔교육 대표이사)·조홍섭(현 한겨레신문 편집국 부국장)·배규식(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등 75·76학번 후배들이 구속되는 과정에서 그가 개입한 부분은 없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운명적인 계기는 이 사건 뒤에 찾아왔다.
후배들이 구축한 서울공대-서울여대 커넥션에 의해서였다.
72학번인 그가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서울공대 운동권은 서울여대와 활발한 교류가 없었다.
오히려 이화여대의 새얼·파워·아카데미 멤버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파워의 박혜숙(작고, 약학과 72학번), 아카데미의 정강자(현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등이 그와 알고 지내던 이화여대 운동권이었다.
서울공대 운동권은 이화여대팀을 태릉 배밭에 초대하는 등 각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복학해서 보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후배들은 멀리 있는 이화여대보다 가까이 있는 서울여대와 동지적 유대를 맺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그룹이 죽순회였다.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된 조홍섭·배규식이 바로 이 죽순회 소속이었다.
여자 한명을 무조건 책임져라
죽순회는 원래 서울공대·건국대·수도여사대(세종대의 전신) 등 3개 대학의 연합서클이었다.
농촌봉사를 주요 활동 영역으로 삼은 순수 서클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서울공대 학생운동에서 한몫을 차지하는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 죽순회의 세미나에 서울여대생이 함께 참여하면서 두 학교 운동권의 관계가 급진전된 것이다.
이 무렵 서울공대 운동권은 주력인 A·B·C그룹 외에 향공회·흥사단아카데미·교회운동권 등과 이 죽순회가 활동하는 구도였다.
C팀 소속의 조홍섭은 죽순회 외에도 공해 관련 스터디그룹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조영래가 공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의 동생 조중래가 주축이 돼서 운영한 공해연구회는 뒷날 한국 환경운동의 한축을 형성하는 환경과공해연구회(회장 장영기, 1989년 창립)의 밑거름이 되는데, 조홍섭도 일찍이 공해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참여했다.
그는 감옥에 가서 최열로부터 환경 관련 서적을 물려받는다.
배규식은 아카데미, 경동교회, 죽순회 등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부인 임주희(현 한솔교육 학원프랜차이즈사업단장)를 만난 것은 죽순회 활동을 통해서였다.
임주희는 박희옥(현 한솔교육 상무)의 뒤를 이어 여연회 회장을 지낸 서울여대 운동권의 중심적 인물이다.
배규식은 공대뿐 아니라 관악, 나아가서 학외조직과도 광범위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유종성(현 하버드대 박사과정, 전 경실련 사무총장)·조형제(현 울산대 교수)·박순성(현 동국대 교수) 등이 그의 관악캠퍼스쪽 채널이었다.
변재용·조홍섭·배규식이 구속되던 시기에 서울공대에는 75학번 임국진(현 창의와탐구 대표이사)·김광섭(현 블라디보스토크 거주)·김연민(현 울산대 교수)·김명원(현 환경대안협회 이사장)·이종현(현 웰컴소프트 대표), 76학번 송경평(현 창의와탐구 인천지사 대표)·김두희(현 동아사이언스 대표이사), 77학번 이효추(현 명승건축 대표), 78학번 한록희(현 효명ECS 대표)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배규식에 따르면 10·11 유인물 살포는 구속자 3명 외에도 김연민·이효추 등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움직인 것이었다.
이러한 학내 동향을 조용히 관조하던 백경진에게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는 유인물 사건이
학내를 휩쓸고 지나간 지 한달쯤 지나서였다.
도피중이던 김부섭이 긴급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부탁이었다.
여자를 한 명 붙여줄 테니 무조건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 시대 운동가에게 이성(異性)은 장애물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어렵게 하거나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운동을 계속할 사람은 이성교제를 자제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풍토였다.
그게 본인을 위해서나 이성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 점은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였다.
“지금 도망다니고 있어요”
하지만 이념이나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 남녀간 사랑이다.
‘겨울공화국’에도 사람이 사는 이상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는 따뜻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게 마련이다.
백경진은 김부섭이 소개한 여자를 세 번 만날 때까지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만큼 ‘이제 그만 만나자’고 확실한 의사표시를 해야 했다.
그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어느날 파랑새가 찾아왔다.
품안으로 날아든 파랑새를 내 손으로 내보내야 한다.
한번 품을 떠난 파랑새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잠깐요, 저….”
상념에 젖어 있던 그를 향해 그녀가 정색하고 말했다.
“사실, 제 이름은 권명자거든요.”
그는 열려던 입을 닫았다. 그
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어졌다.
“서울여대 국문학과고요, 지금 도망 다니고 있어요.”
그는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안도했다.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던 한민성이란 이름이 권명자(전 참교육학부모회 사무국장)로 바뀌는 순간 한 마리의 파랑새가 그의 품안에 완전히 들어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백경진-권명자 커플이 탄생한 사연은 긴급조치 9호 세대의 수많은 러브스토리 중에서도 특별한 면이 있다.
3번의 탐색 과정을 거쳐 비로소 서로의 진심을 드러낼 정도로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 한 가지다.
권명자가 여자로서 긴급조치 9호 시대 최장기 도피 기록을 갖게 되는 배경에 백경진의 절대적인 도움이
숨어 있는 점도 그렇다.
‘6개대연합 사건’으로 추적당하던 권명자가 공릉동 자취방에서 도망친 뒤 처음 찾아간 곳은
김승균-최옥자 부부의 집이었다.
성균관대 4·19-6·3세대인 김승균(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은 ‘오적’ 사건으로 복역한 전력이 있었고,
이화여대 운동권의 맏언니격인 최옥자(현 일월서각 대표)는 출판사 일월서각을 운영하며
후배 여자들의 후견인 구실을 하고 있었다.
안전한 도피처는 아니지만 갈 데가 마땅찮은 여자가 잠깐이나마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도피 생활은 여자가 남자보다 몇 곱절 어렵다.
권명자는 농법회 선배인 이범영(작고)의 집에도 머물렀고, 역시 농법회 선배로서 장기도피중이던
권형택(현 우리자원 대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무총장)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흘러든 곳이 망원동 박미옥(현 당대출판사 대표)의 집이었다.
박미옥은 한국외국어대 75학번으로 서울공대 김부섭을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박미옥은 청계천 야학을 하면서 김부섭을 만났는데, 김부섭이 도피생활을 시작한 뒤 서로 가까워져 이
때는 이미 애인 관계가 돼 있었다.
때는 이미 애인 관계가 돼 있었다.
권명자가 백경진을 소개받은 때는 이곳에 은신할 즈음이었다.
“도망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중간에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위험한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형사가 찾아왔다.
엄마가 마당에서 나 들으라고 ‘왜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느냐’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창문 모기장을 뜯고 맨발로 도망쳤다.
신발은 가다가 대문 열린 집에서 슬쩍하고….”
권명자의 최근 회고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알 듯이 그녀의 이런 고충을 잘 아는 사람이 김부섭이었다.
“도망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중간에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위험한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형사가 찾아왔다.
엄마가 마당에서 나 들으라고 ‘왜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느냐’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창문 모기장을 뜯고 맨발로 도망쳤다.
신발은 가다가 대문 열린 집에서 슬쩍하고….”
권명자의 최근 회고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알 듯이 그녀의 이런 고충을 잘 아는 사람이 김부섭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남자를 소개해줄 테니 반드시 애인을 만들어라”고. 권명자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면….
“변장하고 신분을 위장해서 만났다.
이름도 바꾸고 이화여대 의류학과라고 속이고….
만나보니 예쁘고 선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남자를 소개해줄 테니 반드시 애인을 만들어라”고. 권명자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면….
“변장하고 신분을 위장해서 만났다.
이름도 바꾸고 이화여대 의류학과라고 속이고….
만나보니 예쁘고 선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영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껄렁한 얘기만 하니까 애프터 신청도 하지 않았다.
껄렁한 얘기만 하니까 애프터 신청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다음에 또 만나면 안 될까요’라고….”
겉돌기만 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급진전된 것은 세 번째 만남에서 권명자가 ‘실은 도망중이다’라고
고백하면서였다.
‘다음에 또 만나면 안 될까요’라고….”
겉돌기만 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급진전된 것은 세 번째 만남에서 권명자가 ‘실은 도망중이다’라고
고백하면서였다.
도망자 생활을 경험한 백경진은 그녀의 처지와 고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도피 생활은 남자도 혼자서 하기 어렵다.
2~3명이 함께 해야 서로 의지도 되고 안테나도 되기 때문이다.
2~3명이 함께 해야 서로 의지도 되고 안테나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명자는 그럴 수 없었다. 같이 도망 다닐 여자가 없을뿐 아니라 있다고 해도 여자끼리는 불안했다.
김부섭의 ‘애인 만들기 작전’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6개대연합의 연장선상에서
이때부터 권명자가 남민전 사건으로 검거되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백경진의 ‘도피 외조’가 시작된다.
백경진은 답십리에 권명자가 은신할 방을 얻고, 자신도 그 부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5만원짜리 월세방이었다.
5만원짜리 월세방이었다.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청량리 일대와 노량진 등지를 전전했다.
쫓기는 자는 잡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강박관념으로 남을 수 있다.
쫓기는 자는 잡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강박관념으로 남을 수 있다.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 40대가 되어서도 징집영장이 다시 나오거나 탈영하는 꿈을 가끔 꾸듯이
긴급조치 9호 세대 중에는 지금도 비슷한 악몽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형사에게 쫓기거나 붙잡히는 꿈이다.
그 시절 달동네에는 행상이 많았다.
긴급조치 9호 세대 중에는 지금도 비슷한 악몽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형사에게 쫓기거나 붙잡히는 꿈이다.
그 시절 달동네에는 행상이 많았다.
권명자는 월세방에 혼자 있을 때 ‘다리미 사세요’ 등과 같은 남자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한다.
내려앉았다고 한다.
심약한 여자의 이런 도피생활에 큰 힘이 되는 것이 애인이다.
백경진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자 든든한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여자가 도망 다니고 남자가 뒷바라지하는 구조는 두 사람의 인생도 바꾸어놓았다.
백경진은 학교에 다니면서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했다. 자연히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명확한 진로를 정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전개된 정세로 볼 때 그는 학내외 활동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처지였다.
그가 ‘무사히’ 졸업한 것은 어쩌면 그녀 덕인지도 모른다.
반면 권명자는 수배 중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물론 백경진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김부섭을 매개로 남민전에 가입했고, 그 때문에 결국은 영어의 신세가 된다.
그녀를 백경진과 맺어준 김부섭-박희옥 커플도 남민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만 백경진은 ‘가입 예비자’로 남겨놓는 바람에 화를 면했다.
이 역시 권명자를 보호하는 차원의 조직적 배려로 볼 수 있다.
‘6개대연합 사건’에서 살아남은 김부섭·권명자가 1년 뒤 긴급조치 9호 시대 최대의 공안사건인
남민전 사건에 함께 연루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김부섭은 권명자가 수배된 뒤인 1978년 말 남민전으로부터 가입 제의를 받았다.
남민전이라는 상부 조직은 알지 못하고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민학련(민주구국학생연합) 지도위원회의 조직담당 지도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곧 그가 6개대연합을 통해 시도해온 연합활동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부섭도 “내가 연합활동을 해왔으니까 그 역할이 맡겨진 것”이라고 최근 회고했다.
즉 김부섭·권명자는 1978년 6개대연합이 궤멸된 뒤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활동했으며,
그 결과가 남민전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우재팀, 유종성팀, 조희연팀, 장준영팀 등 10·17광화문연합시위 조직이 일망타진되면서
1978년 학생운동도 ‘방학’에 들어갈 즈음인 11월 초, 관악캠퍼스에는 또 한 차례 광풍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제2차광화문연합시위 조직이 뿌리 뽑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여자가 도망 다니고 남자가 뒷바라지하는 구조는 두 사람의 인생도 바꾸어놓았다.
백경진은 학교에 다니면서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했다. 자연히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명확한 진로를 정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전개된 정세로 볼 때 그는 학내외 활동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처지였다.
그가 ‘무사히’ 졸업한 것은 어쩌면 그녀 덕인지도 모른다.
반면 권명자는 수배 중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물론 백경진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김부섭을 매개로 남민전에 가입했고, 그 때문에 결국은 영어의 신세가 된다.
그녀를 백경진과 맺어준 김부섭-박희옥 커플도 남민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만 백경진은 ‘가입 예비자’로 남겨놓는 바람에 화를 면했다.
이 역시 권명자를 보호하는 차원의 조직적 배려로 볼 수 있다.
‘6개대연합 사건’에서 살아남은 김부섭·권명자가 1년 뒤 긴급조치 9호 시대 최대의 공안사건인
남민전 사건에 함께 연루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김부섭은 권명자가 수배된 뒤인 1978년 말 남민전으로부터 가입 제의를 받았다.
남민전이라는 상부 조직은 알지 못하고 민투(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민학련(민주구국학생연합) 지도위원회의 조직담당 지도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곧 그가 6개대연합을 통해 시도해온 연합활동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부섭도 “내가 연합활동을 해왔으니까 그 역할이 맡겨진 것”이라고 최근 회고했다.
즉 김부섭·권명자는 1978년 6개대연합이 궤멸된 뒤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활동했으며,
그 결과가 남민전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우재팀, 유종성팀, 조희연팀, 장준영팀 등 10·17광화문연합시위 조직이 일망타진되면서
1978년 학생운동도 ‘방학’에 들어갈 즈음인 11월 초, 관악캠퍼스에는 또 한 차례 광풍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것은 제2차광화문연합시위 조직이 뿌리 뽑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신동호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서울대 11·13시위(상)
풀벌레 소리만이 늦가을 밤의 고요를 흩트리고 있었다.
서울 근교의 외딴 자취방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없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각본 없는 드라마가 종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리라는 것을.
“우리…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윽고 누군가가 침묵을 깨뜨렸다.
“전부 포기하는 거야. 여기서 모든 것을 중단하고….”
‘루쉰의 수제자’ 박병태의 고민
침중한 어조로 말을 잇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병태(작고)였다.
서울대 국문학과 4학년인 그는 1978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시위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내정돼 있었다.
부산고·한사·75학번이라면 관악 운동권의 성골 중에 성골이었다.
그런 그가 강하게 ‘시위 불가론’을 폈다.
좌중에는 침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긴장감이 흘렀다.
박병태는 긴급조치 9호 세대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감옥살이를 하거나 노동현장 등에 투신함으로써 개인적 성취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긴조9호 세대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코스였다.
그렇다보니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이를테면 옥고를 치르면서 신체적 장애나 정신질환을 얻은 경우도
십수 명에 이른다.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백수로, 나아가서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그 숫자가 훨씬 많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도 박병태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5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는 친가와 외가로부터 강직한 선비 기질과 지조 높은 독립운동가의 가풍을 물려받았지만 성장 환경은
매우 불우했다.
5살 때 아버지가 실종돼 영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된 어머니가 어린 그와 젖먹이 동생을 어렵게 거뒀다.
대학생이 된 그는 홀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공부시키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볼 때 그는 데모를 해서 감옥에 가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 점이 그를 주저하게 한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긴조9호 시대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와 비슷한 사정을 가진 활동가가 많았다.
그들이 ‘결단’을 내리는데 장애가 된 것은 감옥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를 배반한다는 것,
그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데 대한 괴로움이었다.
자식의 투옥으로 부모가 병을 얻어 세상을 뜨거나 집안이 몰락한 사례를 긴조9호 세대에게서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1977년 서울대 3·28시위를 주동한 양춘승(현 관악민주포럼 회장, 지환테크 대표이사)은 옥중에서 부친을
잃었다.
기대를 하고 있던 아들이 구속되고 그 여파로 다른 아들마저 직장에서 쫓겨나자 크게 상심해서
울화병을 얻은 것이다.
1979년 7월 17일 마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줄 몰랐다.
가족들은 옥중에 있는 그에게 부고를 전하지 않은 대신 그가 나올 때까지 빈소를 치우지 않고 있었다.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박병태의 결단에 어느 정도 걸림돌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임무’를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4학년 1학기 초 부산고·한사 동기이자 75학번 언더그룹 수장인 김수천(현 아시아나항공 이사)에게
가을에 데모를 주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10월 하순 경기도 구리 이흥국(현 오티스LG엘리베이터 상무)의 자취방 모임에서 거사 불가론을
펼 때까지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필요할 때마다 유인물 작업에 참여하면서 2학기 거사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
뒷날 그가 남긴 일기나 기록,
주변 인물의 증언으로 볼 때 그를 가장 고민하게 만든 것은 감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가족문제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
를 어렵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었다.
지인들은 그를 ‘작은 루쉰(魯迅)’ ‘루쉰의 수제자’라고 부른다.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을
존경하고, 루쉰의 사상과 문학세계에 조예가 깊으며, 외모와 생각과 언행이 루쉰과 많이 닮아서였다.
10월 17일 광화문은 조용했다
가족들은 그가 죽은 뒤 라면 상자 2개 분량의 유고를 발견했다.
일기와 시, 소설, 루쉰의 ‘양지서(兩地書)’ ‘삼한집(三閑集)’ ‘이심집(二心集)’ 등을 번역한 원고였다.
대학 재학 시절이나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리고 군복무 중에 틈틈이 한 작업들이었다.
뒷날 동료들은 이 원고를 모아 ‘벗이여, 흙바람 부는 이곳에’(청사, 1982년), ‘루쉰 선생님’(청사, 1983년)을
출간했다.
이렇듯 문학적으로 이미 깊은 경지에 들었으니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붓고 싶었을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취조를 기다리면서 노트의 여백에 밤새워 소설을 쓰고, 군복무 중 내무반에서 루쉰을
번역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다시 말해 문학은 그가 가장 집착한 것이었고,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처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루쉰적 인간형’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긴조9호라는 억압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모순된 현실이 그를 끝없이 고뇌케 한 원흉이었다.
그의 국문학과 동기 박희병(현 서울대 교수)은 유고집 후기에 ‘낡은 사회의 철벽을 깨뜨리다
스스로 피투성이가 된 인간에게서 간간이 새어나오는 신음과 같은 것’이라고 그의 글에 대한 느낌을 밝혔다.
이를 더 인용하면….
“고 박병태형, 그는 맑고 깨끗한 혼을 간직한 이 시대에 드물게 보는 인간이었으며, 벗들과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괴로워 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실과의 타협을 모르는 지독한 경골(硬骨)이었고, 스스로 헐벗은 자로 생활하면서, 부패한 사회가 허여하는 어떠한 기쁨도 거부한 채, 스스로와 싸우고 현실과 싸우면서 죽어갔다.”
1978년 10월 그는 그토록 사랑하던 문학과 잠시 결별해야 했다.
광화문연합시위일인 10월 17일 학내 데모를 주동, 시위대를 광화문으로 유도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더 이상 글을 쓸 수도 없고 언제 나올지 기약도 없는 감옥으로 가는 일이었다.
함께 ‘동’을 뜰 동지는 75학번 이필렬(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에너지대안센터 대표)과
76학번 김용흠(현 연세대 강사)이었다.
이미 보도한 대로 10·17거사는 불발됐다.
판을 크게 벌이려고 여러 갈래에서 공들여 준비하던 팀의 핵심들이 10월 10일부터 12일 사이에
일망타진됐다.
나머지 종범도 10월 15일에는 대부분 검거됐다.
당국은 15일로 예정된 민방공훈련을 17일로 연기, 등화관제훈련으로 대체했다.
17일 밤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모든 교통이 차단되고 암흑천지로 변했다.
이날 서울시내에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는 일부 증언이 있긴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어떤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이재오,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년).
광화문거사팀과 별도로 학내 시위를 준비했던 이필렬·박병태·김용흠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이필렬이 유종성(현 하버드대 박사과정, 전 경실련 사무총장)팀과 소통한 것이 조사 과정에 드러나
지명수배된 게 전부였다.
이필렬은 인천 본가에 형사가 들이닥쳤다는 연락을 받고 수배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서울 흑석동에 은신처 겸 거사 준비 장소로 새로 방을 얻었다.
경기도 구리 이흥국의 방에 이필렬·박병태·김용흠이 회합한 때는 10·17거사 불발 직후, 이필렬이 흑석동에
새 아지트를 마련하기 직전으로 추정된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0월 12일 이흥국의 자취방에서 10·17학내시위에 사용할 플래카드 제작과
유인물 초안 작업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이필렬·김용흠은 3마 길이의 옥양목에 ‘타도 유신독재’라고 매직잉크로 써 플래카드를 만들었고,
시위에 사용할 3종의 유인물 초안 작업을 분담했다.
박병태는 ‘학원자유화투쟁선언’, 이필렬은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하자’, 김용흠은 ‘우리들의 나아갈 바에
대하여’를 초안했다.
하지만 광화문 거사 준비팀이 사전에 궤멸되자 이들은 계획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병태가 ‘거사 불가론’을 들고나온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하지만….”
이필렬이 박병태의 말을 잠시 끊었다.
“나는 생각이 달라.”
단호한 어조였다.
그는 거사 강행을 주장했다.
김용흠도 그의 편에 섰다. ‘관악의 루쉰’도
이필렬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박병태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닫았다.
이필렬도 구차하게 더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 갑자기 풀벌레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감옥에 간 75학번 활동가 중에 유일하게 자연대(화학과) 소속인 이필렬은 특이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운동권 리스트에 오른 학회나 서클 출신이 아니었다.
그가 속한 휴머니스트회는 자연대 운동권의 본류라고 볼 수 없었다.
휴머니스트회는 1960년대부터 존재한 범대학 교양서클로서 1970년대 후반 그를 비롯한 자연대생이
대거 입회하면서 자연대 중심 서클이 됐다.
이 서클은 1980년 ‘서울의 봄’에 자연대 시위 조직의 산실이 되는데,
자연대 학생회장 배명규(현 삼성화재 노원지점장, 78학번)가 바로 이 서클 출신이다.
자연대가 나설 수 없는 이유
자연대는 서울대 단과대 중에서도 운동의 뿌리가 없는 곳이었다.
1975년 캠퍼스의 관악 이전과 함께 문리대 이학부가 분리돼 생긴 것이 자연과학대학이다.
문리대라면 학생운동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지만 거기서 자연대만 따로 떼어내서 보면 아무 것도 없다.
운동의 기반이 되는 학회나 서클도, 운동의 맥을 이어줄 선배도 존재하지 않는 신생 단과대학인 것이다.
물론 운동을 한 선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박인배(물리학과, 현 민예총 기획실장)·박우섭(미생물학과, 현 인천 남구청장)·
연성수(미생물학과, 현 두레생활문화원장) 등이 1970년대 중반에 맹활약한 자연대 운동권 선배였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문리대적 전통과 연극반·탈춤반 등과 같은 인문대적 조직을 기반으로 활동한 것이지,
자연대에 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 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