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74회)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잊을 수 없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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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 페이퍼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김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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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서 얻는 인기는 자만심을 부추겨 자칫 발전의 장애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젊은 선수들에게 한국 무대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최고의 스타로 군림한 김주성이 경험을 토대로 후배들에게 하는 당부다. <홍찬일 기자 hongil@sportschosun.com>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장산리.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버스도, 택시도 구경 못 했다.
보자기에 책을 싸서 등에 메고 다녔다.
눈이 많이 와 학교에 못 간 적도 많다.
때로는 눈이 처마까지 쌓여 방문을 못 열었고, 눈을 치우지 못해 굴을 뚫고 다닌 적도 있다.
한마디로 오지였다.
깡시골 농부 아들이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 풀 뜯기는 게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내 고삐 잡고 따라다니는 건 아니다. 인근 군부대까지 가면 소는 버렸다.
알아서 풀 먹고 다니게 내버려두고 동네 형들과 연병장에서 축구판을 벌였다.
"야외 교육장, 각개전투장 가리지 않았습니다. 축구에 미쳐 소는 뒷전이었죠."
나중에는 이웃 마을 형들과 감자내기를 했다.
선수들은 뛰고, 후보들은 감자를 서리해 와 밭에서 구웠는데 이긴 팀이 다 먹었다.
"동네축구인데도 지면 다음 경기 때까지 가슴에 묻어두곤 했습니다. 분한 마음에 벼른 거죠."
해거름까지 놀다 보면 소는 흔적도 없다.
온 데를 헤매다 인근 마을에 가서 찾아오곤 했다.
집에 오면 늘 깜깜했다.
축구가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부모님을 졸랐다.
축구부에 들어가 제대로 공을 차고 싶었다.
까짓 축구부 가입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일까마는 부모님에겐 일생일대의 고민거리였다.
강현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어 아들 소원을 들어주자면 고향 마을을 등져야 했던 것이다.
결국, 금쪽같은 외아들(1남3녀)의 성화에 부모님이 두 손 들고 말았다.
4학년이 되면서 속초 중앙초등학교로 옮겨 축구부에 가입했다.
덕분에 부모님은 먼 거리를 오가며 '원정농사'를 지어야 했고.
6시부터 새벽훈련을 했다.
행여 늦기라도 하면 야단도 맞을뿐더러 그 좋은 축구를 못하게 되니 잠자리에 들 때마다
부모님께 신신당부를 했다.
꼭 깨워달라고.
"어쩌다 한새벽에 잠이 깨도 그 길로 학교에 갔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다 벤치에서 잠든 적도 있어요."
▶무작정 상경은 했는데…
축구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에 멍이 든 건 6학년 때였다.
'정말 축구를 하고 싶으면 서울로 가라'는 은사의 권유에 6학년 2학기 때 성수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마침 큰누나가 성수동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에 옮기는 건 어렵잖았다.
한데 사고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막상 전학은 했는데 공을 못 차게 된 것이다.
6학년 축구부원들의 중학교 진학이 확정된 상황이라 선수로 뛰는 게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래서 축구부 가입 자체도 불가능했고.
특기생이 아닌 일반학생 신분이라 '뺑뺑이'에서 걸리는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기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성수중학교로 가게 해 달라고요
. 배정 지역에 학교가 여러 개 있었는데 축구부 있는 학교는 성수뿐이었거든요."
간절함이 통한 걸까, 운이 좋았던 걸까.
일단 성수중 입학에는 성공했다.
하나 '선수'들로 구성된 축구부에 일반학생이 들어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체육선생님을 졸라 간신히 유니폼을 입었으나 한 달 만에 쫓겨났다.
마침 세계 축구계에는 기량보다 체격과 체력을 선호하는 바람이 불었으니,
흐름을 좇는 축구부가 1m40 갓 넘은 '일반 꼬맹이'를 붙여둘 리 만무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마음고생 말도 못하게 했죠.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임흥세 코치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공 차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쫓아다니며 네댓 달을 들볶았습니다.
상대방 입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늦가을 어느 날 임 코치가 더는 못 버티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의 길을 열어주신 임 선생님께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요.
정말 열정적인 지도자였어요. 때묻지 않은 신념을 지닌 그분께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볼에 대한 감각을 익히라며 맨발로 공차게 하던 일은 잊을 수가 없어요.
운동장에 자잘한 돌이 많아 고생은 했지만요."
운동보다 선후배 관계가 더 강조되던 그 시절, 빨래와 볼보이가 주된 임무였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선배들에게 몽둥이로 엉덩이 맞고 그만둔 선수가 수두룩해도 그 또한 축구부원으로서 겪는 고통이기에
행복했다.
▶최고의 보금자리, 다락방
정작 힘든 건 운동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중학생이 밥을 해먹고 다닌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상경해 자취방에 합류했다.
하숙도 했고, 다락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가난으로 힘겨웠지만, 다락방은 아버지와 지내는 둘만의 공간이자 다시 없는 보금자리였다.
생활은 어려워도 공은 정말 열심히 찼다. 한데 고교 진학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명문 동북고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체격 조건이 안 좋다는 게 이유였다. 고교 입학을 앞둔 축구선수 키가 겨우 1m62였으니 기술이 좋다
해도 지도자로서는 고민스러울 수밖에.
결국, 2차로 지망한 중앙고 유니폼을 입었다..
"중앙고에 테스트받으러 가는 날 선배들한테 찍혔습니다.
바바리코트를 입고 갔거든요. 당시 청바지에 손바닥 만한 버클의 벨트를 하고 바바리를 입는 게
유행이었거든요.
그렇다 해도 중3짜리가 테스트받는 날 그러고 갔으니….
선배들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하면서 기막혀하더라고요. 사춘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모임에 나가면 선배들이 그 얘기를 한다.
▶'삐끼', 4강 신화를 재우다
대학 1학년 여름휴가는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보냈다.
피서객 반, 호객꾼 반으로.
여름 대목을 노리고 여관을 통째 빌려 숙박업에 나선 고등학교 선배를 도우러 갔다.
영업장소는 직행버스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는 피서객들에게 "방 있어요" 외쳐 여관으로 안내해 주는 역할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축구로 보냈다.
"아침에 물이 빠지고 오후에 들어오는데 물 빠진 백사장은 천연잔디보다 좋더라고요.
모래가 딱딱해 맨발 운동에는 최고였죠.
그래서 틈만 나면 동네 사람들과 내기 시합을 했어요."
승승장구. 붙었다 하면 이겼다.
한번은 10만 원짜리 내기가 들어왔다.
'옳거니' 쾌재를 불렀으나 이상한 소문이 묻어 왔다. '
그 팀에 이기근 하고 이태형이 들어 있다'는. 이기근 이태형이면 며칠 전 멕시코에서
세계청소년선수권 4강 신화를 만든 주인공이 아니던가.
그들이 귀국해 만리포에 놀러 왔다가 내기한다는 말 듣고 끼었다는 얘기였다.
판돈 대던 선배가 단박에 꼬리를 내렸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붉은악마가 둘이나 포함된 팀과는 하나 마나한 게임이라는 건 코흘리개도
알 법한 이치가 아닌가.
더더군다나 동네축구에서는.
"무조건 하자고 선배를 졸랐죠.
당시 멕시코 멤버는 대부분 제 또래였어요.
그들은 영웅이 되어 돌아왔는데, 저는 삐끼나 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더 붙어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근데 두 판을 붙어 우리가 다 이겼습니다."
맨발에 배구공이었지만, '만리포 빅매치'는 머잖아 탄생할 아시아 축구영웅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침내 태극마크 가슴에 달다
조선대 1학년 때인 83년, 마침내 청소년대표로 선발됐고, 이듬해 박종환 사단인 대표팀 2진
'88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85년 1월 1일 김정남 감독이 이끄는 월드컵대표팀과의 평가전(부산)에서 30m 중거리포로
결승골(2대1 승)을 쏴 단박에 스타로 비상했다.
월드컵대표 발탁은 예정된 순서나 다름없었다.
87년 K-리그 대우에 입단하면서 야생마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냥 개성 한번 살려 보려고 머리를 기른 건데 트레이드 마크가 돼 버렸습니다.
좋지만은 않았어요. 잘하면 아무 말 없다가 못하면 긴 머리를 질타하곤 했으니까요."
92년 6월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하면서 인생에 눈을 뜬다.
대성 후 안주해 버린 사실, 명성을 얻으면서 자만심이 생긴 사실, 나아가 축구가 인생 전부는 아니라는
부분까지 깨달으면서 '초심'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94년 미국월드컵 직후 대우에 복귀했으나, 두 게임 뛰고 오른무릎 연골 파열로 주저앉았다.
그때 나이 30세.
은퇴의 기로에서 어금니 물고 다시 일어섰다.
최전방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다시 최종 수비수로 변신을 거듭하며 축구판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줬다.
3년 연속 아시아 MVP, 97년 K-리그 3관왕, 은퇴식 생중계, 16번 영구결번….
김주성은 대표팀과 K-리그에서 숱한 화제와 기록들을 남기고 축구화를 벗었다.
"앞으로 축구 외교력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게 목표입니다.
국제전문위원이 필요한 시점인데 제가 그 시발점이 되어 보려고요."
행정가로서는 또 어떤 역사를 남길까.
체구는 작았지만, 기술이 좋아 1학년 2학기부터 경기에 투입됐다. 더불어 운동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때맞춰 2학년 연습벌레 선배의 부탁이 들어왔다. 새벽 개인훈련에 동행해 달라는. 혼자는 영 심심했던 모양이다. 거절할 수 없어 한동안 구경꾼으로 따라다녔다. "구경만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같이 했죠. 계단과 언덕을 뛰는 체력훈련을 1시간 반씩 했습니다. 저녁엔 역도부 헬스장에 가서 줄넘기를 40~50분 정도 했고요." 둘 사이에 차츰 경쟁 기류가 형성됐고, 결국 헤어졌다. 그렇다고 개인 운동을 그만둔 건 아니었다. 근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되레 강도를 높여야 할 판이었다. 그 외롭고 고달픈 '나 홀로 운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했다. 고3이 되어서는 새벽 개인훈련에 오후 정규훈련까지 한 다음 종로 YMCA 헬스장에 가서 또 밤 9시까지 땀을 쏟았다. 그러고 나서야 늦은 저녁을 먹었다. 라면에 밥 한 공기. 언제나 그랬다. "아마 1년에 300일은 라면에 공깃밥이었을 거예요." 아침은 문구점에서 김밥 반 토막과 우유를 먹었다. 한창 힘쓸 나이에 온종일 뛰고도 김밥조차 한 줄을 다 못 먹었다. 점심은 친구들이 싸다 주는 도시락을 먹거나 친구들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세 끼 메뉴는 거의 고정이었다. 가난의 터널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잠은 밥보다 더했다. "2학년 2학기부터 교내 축구부 숙소에서 생활했습니다. 합숙훈련이 없었으니 혼자 산 거죠. 겨울엔 난방이 안 돼 힘들었습니다. 끼니만 때울 수 있어도 행복했을 때니 추위는 견딜 만했죠. 옷 많이 입고 이불 푹 덮어쓰면 되니까요." 춥고 배고픈 축구 여정에 볕이 든 건 고3 9월 무렵. 대한축구협회가 꾸린 고교상비군에 선발된 것이다. 전국에서 쓸만한 재목 80명을 뽑아 네 팀으로 나누고 경기를 통해 최종 20명을 추렸는데 거기에 든 것이다. "장학금 50만 원을 받았습니다. 축구로 얻은 첫 수입인 셈이죠." 사실은 그 이상의 의미였다. 팀 전력이 약해 성적은 초라했고, 대학 진학도 어렵던 차에 멋진 자격증을 얻었으니 말이다. 포항제철, 한양대 등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 조선대를 택했다. '친구 두 명을 업고 가는 조건으로 자신을 희생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정작 김주성은 "후회는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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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29)
댓글목록
중앙 나오신 축구 선수로 두분을 알지요...김준현,김주성...두분 선배을 알고 있지요...김준현 선배는 고2때인가 체육교생으로 학교에 오신걸로 알고요...
90년도 군에 있을때 내무반에서 김주성...와~~~하던 기억이 나네요...군제대호에 김주성 선배님이 중앙 선배라는것을 알았죠...너무 기뻤습니다...주성이형 홧팅!!!
90년도 군에 있을때 내무반에서 김주성...와~~~하던 기억이 나네요...군제대호에 김주성 선배님이 중앙 선배라는것을 알았죠...너무 기뻤습니다...주성이형 홧팅!!!
입단 테스트에서 불합격시킨 동북고에 감사해야겠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무지개를 위해 인생을 골몰한 당신이 있어 나는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후배님 건강 하시구요
언제나 후배님 건강 하시구요
동기인 친구가 자랑스럽습니다...
이야기 다들으니 한편의 드라마네요..
김주성 선배가 하교후에 혼자서 중앙중계단을 오르 내리며 운동하는 모습이 생각 나네요...
김주성 선배가 하교후에 혼자서 중앙중계단을 오르 내리며 운동하는 모습이 생각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