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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左편향 위원회가 건국세력을 친일로 낙인찍었다 (동아일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규명위)가 일제 말기(1937∼1945년)의 인사 550명을 포함해 모두 1005명의 친일행위자 명단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세우고 키운 전 부통령 김성수,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총장을 각각 지낸 유진오 백낙준 김활란, 초대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 6·25전쟁 때 공훈을 세웠던 군 장성 백선엽,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 노기남, 시인 서정주, 화가 김기창 등이 포함됐다.
규명위가 새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인물 중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특히 눈에 띈다.
규명위가 이번에 조사 대상으로 삼은 1937년부터 광복 직전의 시기는 일제가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패망을 앞둔 때였다.
일제는 한반도의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 온갖 악랄하고 집요한 수단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이런 엄혹한 시대상황을 직시하지 않은 채 부정확하고 제한된 자료를 근거로, 더구나 편향된 잣대로 친일 여부를 가리겠다는 것은 무모하다.
盧전 대통령 묘에 ‘報告’, 정치성 스스로 드러내
노무현 정권 때 구성된 규명위는 11명 전체 위원 가운데 6명이 노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규명위의 일부 위원은 곧 노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친일명단을 담은 보고서를 봉정한다는 소식이다.
이런 행동만 보더라도 명단 작성자들의 편파성이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에 부정적인 좌파 학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옮겨 ‘우리 역사는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거듭 말했던 인물이다.
한 위원은 “규명위가 친일명단을 선정할 때 9 대 2나 8 대 3의 표결로 ‘친일’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유족들이 제기한 이의는 대부분 묵살됐다.
명단 발표를 앞두고 시간에 쫓겨 위원들이 몇 분 만에 자료를 읽고 친일 여부를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는 내부 증언이 있다.
그래서 건국 세력에 대해 ‘친일 낙인찍기’를 밀어붙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강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日帝치하 벗기 위해 ‘민중의 힘’ 되고자 했거늘
규명위는 김성수 선생에 대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학병을 권유하는 기고를 했으며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에서 친일명단에 올렸다.
그러나 당시 경성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던 김달수 재일동포 작가는 자서전에서 ‘일제 말 전쟁 시기 실린 신문기사들은 거의 전부 만들어진 것’이라고 증언했다.
관련된 말과 글은 일제가 김성수 선생의 이름을 빌려 왜곡 날조한 것으로 다른 관련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밝혀졌다.
김성수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 언론 기업 부문에서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이라는 폭넓은 평가를 받아왔다.
고려대 중앙고 등 교육기관을 운영하면서 인재를 양성했으며 경성방직이라는 민족기업을 육성했다.
규명위는 인촌의 이런 공로에는 눈을 감았다.
그가 창간한 동아일보는 1940년 강제 폐간 때까지 20년 동안 정간 4회, 발매금지 2000회 이상, 신문 압수 89회의 고난을 겪으며 민족의 표현기관 역할을 했고 어느 의미에선 국가를 대신했다.
규명위는 좌익 인사 여운형에 대해서는 감싸기로 일관했다.
총독부 기관지 등에 여운형 명의로 학병 권유 글이 실린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성대경 위원장은 ‘입수한 자료가 1건밖에 없었으며 독립운동의 공적이 있기 때문에 조사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건국세력은 흠만 찾아내고, 현 좌파세력이 떠받드는 대표적인 인사는 공만 따진 이중 잣대다.
이 세상을 떠나 자기변호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친일 너울을 들씌운 행위야말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만든 규명위원회 반민특위(反民特委)
·광복회 기준까지 무시
- 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위원회 구성부터 '편향적'사안마다 표결로 밀어붙여
친일규명위는 관련 법안 제정부터 출범·활동 과정에 이르기까지 편향적 역사관을 지닌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무리하게 추진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우리 사회에서 느닷없이 '친일파 청산'이 이슈가 된 것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지난 2002년 2월 김희선 당시 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있던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며 708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명단은 당초 함께 선정 작업을 했던 광복회가 작성한 명단 692명 이외에 '민족정기 모임'이 자의적으로 16명을 추가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이들이 추가한 16명은 여성계의 고황경·김활란·모윤숙·박인덕·송금선·황신덕, 문화예술계의 김은호·심형구·현제명·홍난파·이능화·정만조, 언론계의 김성수·방응모, 종교계의 권상노, 장덕수 등이었다.
이에 대해 윤경빈 당시 광복회장은 본지 인터뷰(2002년 3월1일자)에서 "'민족정기모임'이 추가한 명단은 광복회와는 관련 없다.
그분들은 우리도 심사했는데, 안 넣는게 좋겠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조사관으로 설립부터 해체까지 지켜봤고, 광복회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한 이원용씨(2002년 6월 작고)는 본지 인터뷰(2002년 3월4일자)에서 "광복회에서 16명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반민특위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민특위)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친일파 심판 의지가 강했다"고 말했다.
- ▲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던 이원용씨가 일부 정치인들이 추가한 친일파 명단이 반민특위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 본지 2002년 3월 4일자 인터뷰 기사.
이어 노무현 정권 들어 김희선 의원이 발의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 5월 국회를 통과했고, 2005년 5월 이 법에 따라 '친일규명위'가 출범했다.
장관급인 위원장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선임됐고, 사무처장에는 대표적인 친노(親盧)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출신인 정운현씨가 임명됐다.
위원장을 포함한 위원 11명은 대통령(4명), 국회(4명), 대법원장(3명)이 추천했기 때문에 당시 정부·여당과 가까운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나라당 추천으로 활동한 한 위원은 "토론이나 표결을 하게 되면 늘 9대 2, 또는 8대 3으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친일규명위가 27일 발표한 명단에는 2002년 민족정기모임이 추가한 16명 가운데 황신덕과 행정소송으로 기재가 유보된 홍난파를 제외한 14명이 포함됐다.
국가기관이 광복 직후 반민족행위 실태를 가장 잘 알았던 반민특위와 그 기준을 이어받은 광복회의 판단마저 짓밟은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사설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뿌리에서 허물어 보겠다는 이념적 정치적 의도의 결과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성대경 위원장(가운데)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규명위는 이날 25권에 달하는‘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친일ㆍ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성대경 위원장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사설] 외눈박이 친일반민족조사위의 발표를 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7일 1905~1945년 일본 제국주의 강점 시기 1005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이완용 박제순처럼 조선왕조의 고관(高官)으로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대가로 작위를 받거나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처럼 일왕에게 한일합병 청원서를 제출한 공로로 한일합방 공로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던 인물, 그리고 총독부 고위 관료로서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 통치기구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 헌병·밀정·고등계 형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일제의 손발이 돼 악질적으로 동포를 학대·탄압했던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광복 직후인 1949년 친일세력 청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反民特委)가 조사를 위해 작성했던 명단에 이미 올라 있던 인물들이다.
반민특위는 극악했던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를 막 빠져나왔던 시기에 만들어져 국민 전체가 누가 일제를 위해 진짜로 몸과 마음을 팔았고, 누가 진짜 일제의 앞잡이로서 동포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고문했는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상황에서 활동했다.
반민특위 위원과 조사관들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의 회원으로서 일제의 통치에 맞선 독립운동가나 일제가 강제 징집했던 학병을 탈출해 중국 본토나 만주에서 광복군에 가담했던 인사들이었다.
조사관의 이름과 경력은 당시 언론에 공개됐다.
조사관들의 독립운동 체험과 국민들의 생생한 기억이 종합돼 작성한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 688명이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씨는 "광복 직후의 친일파 청산 의지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반민특위가 작성했던 명단이 그 당시의 최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번에 4년 동안 377억원의 예산을 들인 조사결과라며, 60년 전 반민특위가 작성한 688명에 300여명을 추가하면서 유진오 백낙준 김활란 고황경 이숙종 등 교육계 인사, 김동인 김기창 서정주 유치진 노기남 등 문화·종교계 인사, 방응모 김성수 등 언론계 인사, 백선엽 신현준 등 군 원로들을 추가로 포함시켰다.
일제 말 전시동원 체제에서 일제의 강요로 학병 권유 연설을 했거나 그런 내용의 글을 썼거나 일제가 조선의 유지(有志)와 지식인들을 강제로 얽어매 조직했던 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을 위한 일제 관변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일제의 학병 권유 강연장 단상(壇上)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조선의 유지들이 연사(演士)로 앉아 있었고, 단하(壇下)의 청중석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연희전문 보성전문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단상·단하가 함께 일제에 강제로 끌려나왔지만 이 자리가 진심을 말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단상·단하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을 안으로 삼키며 함께 울었다는 것을 세상이 모두 알고 있었다. 광복 후 학병 권유 연설장에서 연사들의 선동에 떠밀려 학병에 지원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하의 학생으로서 훗날 반민특위 조사관이 됐던 이들은 진짜 악질적 부일(附日) 협력자를 제외하고는 강제동원된 연사들을 문제 삼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언론에 학병 권유문을 발표한 사람 중에 자기가 진짜 일왕(日王)의 자식이나 된 듯이 날뛰던 무리도 있었다. 반민특위는 물론이고 당시 국민은 그들이 누군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반민특위의 명단에는 그들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일제 강압 통치하에서 중국과 미국으로 탈출했던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당시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은 조선이 이민족(異民族)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의 날을 기약(期約)하려면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언론을 통해 민족의 잠든 얼을 일깨우고 종교를 통해 정신적 자주(自主)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태평양전쟁에 광분(狂奔)한 일제는 바로 이 대목을 약점으로 잡고 학교 문을 닫겠다, 신문사를 폐간하겠다, 교회 문을 닫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우 대립의 어느 한편에 서서, 처참한 식민지 현실에 무지(無知)하거나 무지한 체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조사관들은 유진오 백낙준이 보성전문·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민족의 진로를 일깨웠던 1000번의 강의에는 일부러 귀를 막고, 신채호 문일평 한용운이 우리 말 우리 글이 일제에 목 졸려 죽음에 몰리던 상황 속에서 한글을 붙들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지상(紙上)을 통해 고구려의 웅대한 혼(魂), 백제의 영화(榮華), 신라 화랑(花郞)의 충용(忠勇)을 들어 잠든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수천 편의 논설에는 눈을 감고, 노기남이 명동성당에서 무거운 짐을 진 식민지 백성을 어루만지던 강론을 애써 모른 체하며, 김활란 고황경이 봉건의 틀에 갇혀 숨죽여 살던 조선 여성을 해방시키려 노력했던 외로운 고투(苦鬪)를 외면한 채 그들 이마에 친일 부역자(附逆者)의 도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냈다.
광복 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그리고 백낙준은 고려대학과 연세대학 총장으로 두 대학을 세계의 대학으로 키우는 기틀을 만들었고, 김활란 고황경은 이화여대와 서울여대의 오늘을 일궜으며, 백선엽은 북한의 6·25 침략으로 낙동강변까지 밀려났던 전세(戰勢)를 다부동 전투의 선두에 서서 뒤엎어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신현준은 해병대를 이끌어 북한군을 몰아내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을 탈환했으며, 소설가 김동인, 화가 김기창, 시인 서정주, 극작가 유치진 등은 모두 20세기 한국 예술의 밑거름을 뿌렸고, 김성수와 방응모는 자신의 전 인생과 전 재산을 민족언론, 민족학교의 건립에 쏟아부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6·25 때 북한군에 피랍돼 이북(以北) 산하에 외롭게 뼈를 묻어야 했다.
외눈박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 수립 6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고 키운 이들을 친일의 오명(汚名) 속에 빠뜨려 파묻으려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이고 누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든 전(前)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1절 기념사에서 "한국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규정했다. 만일 대한민국이 정말 그런 나라였다면 오늘 우리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의 선진국을 목전(目前)에 두고 민족의 힘을 모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들이 대답할 차례다.
대한민국 세운 인물 대거 포함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친일행위' 명단 1005명 발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규명위·위원장 성대경)는 27일 모두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이유를 담은 2만1000여쪽 25권 분량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다.
친일규명위는 이날 조사대상자 1043명 중 1007명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화가 정현웅은 유족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결정을 취소했고, 서울행정법원의 26일 결정에 따라 음악가 홍난파를 유보하여 이날 발표된 명단은 1005명이다.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발표한 명단에는 교육계의 김활란·유억겸·백낙준·고황경·이숙종·배상명, 종교계의 노기남·권상노·신흥우, 문화예술계의 김동인·주요한·모윤숙·이광수·서정주·김은호·유치진·현제명, 언론계의 김성수·방응모·이상협·유광렬,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국군 창설의 주역인 이응준·김석원·이종찬·백선엽 등 훗날 대한민국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당대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당초 조사대상자로 거론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체적 친일행위의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조사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제외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출범한 친일규명위는 초기부터 우파 진영을 겨냥했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일제강점 말기 학병 권유문을 쓴 것으로 밝혀진 좌파 인사는 조사대상자조차 되지 않아, 대상자 선정에도 균형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이완용 같은 매국노와 독립지사를 일제에 팔아넘긴 밀정을 일제 말기 전시 치하에서 집요한 위협과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협력한 인사들과 한데 묶어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함으로써 공평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편, 조선일보사는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가 명단에 포함된 것과 관련하여 "광복 후 반민특위 활동으로 이미 역사적으로 정리된 사안을 정치적 목적에서 다시 제기하고 정해진 잣대에 따라 명단 확정을 강행한 위원회의 폭거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모든 법률적 대응을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동아>, 정부기구의 '친일인사' 규정에 반발
방응모-김성수 포함,
"전 재산을 민족언론 건립에 쏟아부었거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어 정부기구인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까지 사주였던 방응모, 김성수를 친일인사로 규정한 보고서를 발간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력반발하며 공동전선을 구축, 맞대응에 나섰다.두 신문은 28일 일제히 장문의 사설을 통해 규명위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조선일보> "방응모, 전 인생-재산 민족언론 건립에 쏟아부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번에 4년 동안 377억원의 예산을 들인 조사결과라며, 60년 전 반민특위가 작성한 688명에 300여명을 추가하면서 유진오 백낙준 김활란 고황경 이숙종 등 교육계 인사, 김동인 김기창 서정주 유치진 노기남 등 문화·종교계 인사, 방응모 김성수 등 언론계 인사, 백선엽 신현준 등 군 원로들을 추가로 포함시켰다"며 "일제 강압 통치하에서 중국과 미국으로 탈출했던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당시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은 조선이 이민족(異民族)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의 날을 기약(期約)하려면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언론을 통해 민족의 잠든 얼을 일깨우고 종교를 통해 정신적 자주(自主)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항변했다.
사설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조사관들은 유진오 백낙준이 보성전문·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민족의 진로를 일깨웠던 1000번의 강의에는 일부러 귀를 막고, 신채호 문일평 한용운이 우리 말 우리 글이 일제에 목 졸려 죽음에 몰리던 상황 속에서 한글을 붙들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지상(紙上)을 통해 고구려의 웅대한 혼(魂), 백제의 영화(榮華), 신라 화랑(花郞)의 충용(忠勇)을 들어 잠든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수천 편의 논설에는 눈을 감고, 노기남이 명동성당에서 무거운 짐을 진 식민지 백성을 어루만지던 강론을 애써 모른 체하며, 김활란 고황경이 봉건의 틀에 갇혀 숨죽여 살던 조선 여성을 해방시키려 노력했던 외로운 고투(苦鬪)를 외면한 채 그들 이마에 친일 부역자(附逆者)의 도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냈다"고 규명위를 비난했다.
사설은 이어 "광복 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그리고 백낙준은 고려대학과 연세대학 총장으로 두 대학을 세계의 대학으로 키우는 기틀을 만들었고, 김활란 고황경은 이화여대와 서울여대의 오늘을 일궜으며, 백선엽은 북한의 6·25 침략으로 낙동강변까지 밀려났던 전세(戰勢)를 다부동 전투의 선두에 서서 뒤엎어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신현준은 해병대를 이끌어 북한군을 몰아내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을 탈환했으며, 소설가 김동인, 화가 김기창, 시인 서정주, 극작가 유치진 등은 모두 20세기 한국 예술의 밑거름을 뿌렸고, 김성수와 방응모는 자신의 전 인생과 전 재산을 민족언론, 민족학교의 건립에 쏟아부었다"며 자사 창업주인 방응모가 '민족언론'인 <조선일보>를 창간했음을 강조했다.
사설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든 전(前)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1절 기념사에서 '한국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규정했다"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거론한 뒤, "만일 대한민국이 정말 그런 나라였다면 오늘 우리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의 선진국을 목전(目前)에 두고 민족의 힘을 모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들이 대답할 차례"라며 규명위의 해명을 요구했다.
◀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성대경 위원장이 명단 선정 이유 등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
<동아일보> "김성수의 학병권유 기사는 날조된 것"
<동아일보>도 이날자 사설을 통해 규명위의 친일인사 1천5인 명단 발표를 거론한 뒤,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세우고 키운 전 부통령 김성수,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총장을 각각 지낸 유진오 백낙준 김활란, 초대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 6·25전쟁 때 공훈을 세웠던 군 장성 백선엽,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 노기남, 시인 서정주, 화가 김기창 등이 포함됐다. 규명위가 새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인물 중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특히 눈에 띈다"며 규명위가 자사 창업주를 친일인사로 규정한 데 대해 반발했다.
사설은 "규명위는 김성수 선생에 대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학병을 권유하는 기고를 했으며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에서 친일명단에 올렸다"며 "그러나 당시 경성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던 김달수 재일동포 작가는 자서전에서 ‘일제 말 전쟁 시기 실린 신문기사들은 거의 전부 만들어진 것’이라고 증언했다. 관련된 말과 글은 일제가 김성수 선생의 이름을 빌려 왜곡 날조한 것으로 다른 관련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사설은 이어 "김성수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 언론 기업 부문에서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이라는 폭넓은 평가를 받아왔다. 고려대 중앙고 등 교육기관을 운영하면서 인재를 양성했으며 경성방직이라는 민족기업을 육성했다. 규명위는 인촌의 이런 공로에는 눈을 감았다"며 "그가 창간한 동아일보는 1940년 강제 폐간 때까지 20년 동안 정간 4회, 발매금지 2000회 이상, 신문 압수 89회의 고난을 겪으며 민족의 표현기관 역할을 했고 어느 의미에선 국가를 대신했다"고 주장했다.
사설도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권 때 구성된 규명위는 11명 전체 위원 가운데 6명이 노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규명위의 일부 위원은 곧 노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친일명단을 담은 보고서를 봉정한다는 소식"이라며 "이런 행동만 보더라도 명단 작성자들의 편파성이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에 부정적인 좌파 학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옮겨 ‘우리 역사는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거듭 말했던 인물"이라고 노 전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사설은 "이 세상을 떠나 자기변호를 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친일 너울을 들씌운 행위야말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란 비난으로 글을 끝맺었다.
<조선><동아>는 이같은 비난 사설 외에 규명위에 대한 법적 대응도 추진한다는 방침이어서, 친일논란은 앞으로 법정에까지 설 전망이다.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30)
댓글목록
역사는 어디까지나 옳바러야 할진데 ..... 우리가 시대의변화를 인식하지못하고 고리타분하게 옛일에만 몰두해 있지말고서 ....이제 지나간것은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앞으로는 더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함이옳은 일이 아닌가? 하노라
2009년 12월7일 오전 11시 58분
독립문에서
55회졸업생
안경식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