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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290회 작성일 2009-03-05 16:25
[현대사 아리랑]‘볼셰비키 작가’ 포석 조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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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볼셰비키 작가’ 포석 조명희

2009 03/10   위클리경향 815호

넘쳐 넘쳐 흘러 ‘돌아오지 않는 낙동강’

<범우사 제공> (서울통신) 조선문학계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포석 조명희씨는 단편집 <낙동강>을 남기고 17년 전 표연히 고국을 등진 후 소식을 끊고 안부조차 막연하였는데 해방과 더불어 죽은 줄만 알았던 씨가 소련 하바롭스끄대학 조선문학과 교수로 활약하여 이역에 있어서도 조선문학 발전의 전위로서 활약하여 조선사람으로서 단 하나인 쓰따린문학상까지 받고 그 명성을 전로에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쓰따린상까지 받은 포석 조명희씨란 어떠한 분인가. 시인이며 또 씨의 당질인 조벽암씨에게 포석의 이모저모를 들어보기로 하자.

<해방일보> 1946년 4월 29일치 기사이다. ‘이역에 찬란한 조선문학’이라는 제목 아래 ‘조명희씨 소련서 활약’ ‘쓰따린문학상 수상자’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기사는 이어진다.

포석 조명희씨는 충북 청주 출생으로 당년 55세. 동양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는데 재동경시 처녀작으로 조선 최초의 희곡집 <김영일의 사>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와 상연하였는데 이 공연은 토월회(土月會) 이전이며 그 반향은 컸다. 타골을 숭배하는 순정가이며 극빈에 못이겨 가두에 나와 팟죽장사도 하고 과일장사를 한 적이 있는 만큼 그의 생활의식은 당시부터 철저하였고 그의 사상도 또한 당시의 선봉이었다. 씨는 일세의 센세이숀을 일으킨 단편집 <낙동강>을 남기었는데 전 조선 사회에 갈채를 받은 작품으로 그 당시 치열한 프로문학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던 것이다. 그리고 시를 좋아하는 씨는 재동경시에 벌써 조선 최초의 시집 <봄 잔디밭 위에>라는 로맨틱한 작품을 가졌었다. 씨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서는 이기영씨 한설야씨 정지용(鄭芝鎔)씨 등 현재 조선문학계의 중진들을 들을 수 있다. 친우로서는 고 김수산(金水山)씨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 부모에게 유서를 남기지 않고 포석에게 유서를 남긴 사람으로 그 우정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러한 씨(가) 17년 전 ML당사건 관계로 간도로 잠행 그후 연해주에(서) 활약하게 되었는데 현금 소련 연해주에 장성(長成)한 조선문학은 국내보다 훨씬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다고 하니 씨의 조선문학계에 남긴 공적은 진실로 거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카프에 참여 단편집 ‘낙동강’ 발표
이 위대한 조선의 문학가를 숙부로 가진 조벽암씨는 포석의 작품 <낙동강>을 새로이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니 조선문학의 주옥을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몰락 유생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4살 때 부친을 잃고 둘째 형님댁에서 자라며 서당에서 진서를 익히다가 진천소학교를 나왔다. 

1910년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한학자로 세속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맏언니 공희(恭熙)의 입김을 받아 애국적 영웅전기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갈 작정으로 중앙고보를 그만두고 서울을 떠났으나 평양에서 둘째 언니에게 잡혀 집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 1914년 21살 때였다. 

<삼국지> <수호지> 같은 중국 고전과 우리나라 고전,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으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 똥구녁이 찢어지는 찰가난 속에서 뽕나무 장사를 하고 금점판을 떠돌며 날품팔이를 하다가 1919년 3·1운동에 들어 몇 달 징역살이를 하였다. 형무소를 나온 다음 스스로 극본을 써 군내를 돌며 공연을 하다가 친구 도움으로 일본 동경으로 간다. 동양대학 철학과에 들어갔으나 학자금과 생활비를 댈 수 없어 닥치는대로 막노동을 하면서도 사상·철학·문학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1920년 봄 극작가 김우진(金佑鎭)과 함께 ‘극예술회’를 얽고 동경 유학생 가운데 고학생과 노동자를 위한 회관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자 1921년 7~8월 국내 여러 도시를 돌며 연극공연을 하였는데, <김영일(金英一)의 사(死)>도 들어 있었다. 1923년 귀국하여 펴낸 것이 시집 <봄 잔디밭 위에>였다.

내가 이 잔디밭 위에 뛰노닐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 주실 수 없을까
어린 아기가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어리광함같이
내가 이 잔디밭 위에 짓둥굴 적에
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참으로 보아 주실 수 없을까

미칠 듯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엄마! 엄마! 소리를 내었더니
땅이 우에! 하고 하늘이 우에! 하오매
어느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없어라.

러시아로 망명 스탈린문학상 수상
1925년 카프, 곧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들어간 포석은 <개벽>에 처녀작인 자전적 단편소설 <땅 속으로> 발표. 26년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들> <저기압> <새거지> 27년 <농촌사람들> <동지> <한여름밤> <낙동강> 28년 <춘선이> <이쁜이와 용이> <아들의 마음>을 발표하면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하나의 두동진 꼴로 깨닫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세찬 작가의식을 보여준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안받침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농촌의 끔찍한 가난으로 보았던 것이다. 조카인 조벽암(趙碧巖 중흡)과 주고받은 이야기다.

“너는 어느 과목을 제일 좋아하느냐?”
“문학이어요.”
나는 솔직히 대답하였다.
“아서라. 문학은 밥을 굶는다. 더욱이 조선서는….”
“그렇지만 밥 굶는 것이 무서워서 설마 못할까요?”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밥을 굶는 일도 무던히 어려운 일이다. 설마가 두려운 것이니까.”
하시며 포석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어느 새에 나왔는지 모르게 굵은 눈물 방울이 덤벙 그의 볼을 스쳐내렸다. 나도 속없이 따라 웃었다. 한참 후에 내 손을 덥석 쥐시더니
“중흡아! 정 문학이 하고 싶으면 고농(高農)을 가 보아라. 농사를 지으면서 문학을 하면 좀 덜 굶을 수도 있잖을까… 그렇다고 내가 지금 굶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만….”

1927년 <조선지광> 7월호에 발표한 <낙동강>으로 드날리는 이름을 얻었지만 팔자처럼 달라붙는 찰가난은 떨어지지 않았다. 28년 7월 러시아로 망명을 떠나게 되는 것도 왜경들 사나운 눈길 탓도 있지만 새로운 세계로 가서 지긋지긋한 찰가난을 벗어나 보자는 생각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때 러시아는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인 ‘인민의 나라’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던 때였다. 그 시절 포석 모습이다.

(…)글로 포석과 민촌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또 이 세 가난뱅이는 마침 가까운 지점에 살고 있어서 문학 이야기 외에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민촌이나 나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 대해서 마치 무슨 면역성이나 생긴 듯이 별로 대책이랄지 그런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었지만 시인적 정열이 넘치는 포석은 늘 가난과 싸울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실과행상 팟죽장사 등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안을 내고 또 마침내 그 실행에까지 나아갔었다. 포석의 말을 빌면 몽당 두루마기와 천칭봉(天秤棒)과 거기다 두 개의 광주리와 그것에 채울 실과 살 자금만 있으면 간단히 된다고 하더니 끝내 시인 포석이 일조에 실과장사 포석으로 가두에 진출하였으나 아깝게도 시인의 생활 제일직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가족을 가지고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조금도 그것을 비관하거나 낙망하거나 자기(自棄)하는 일은 없었고 언제 보아도 고요하고도 정열적이요 사색적인 그 전형적인 시인의 믿음성 있는 침착한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한설야(韓雪野)가 쓴 ‘포석과 나’ 한 어섯(부분)이다. <조선인민보> 1946년 5월 24일치. 스탈린문학상을 받았다는 <해방일보> 기사를 보고 쓴 글로 보인다. 포석에 대한 한설야 그리움은 이어진다.

강렬한 내재력을 시인적인 고요한 사색 가운데서 발산하는 그 호수와 같은 깊이를 가진 눈, 그리고 양안(兩顔)까지 내려뜨린 차붓한 머리까지 그의 시인적 면모를 돕는 것으로 지금도 무한한 추억과 함께 눈에 선히 보이고 있다. 결코 격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그 옹글고 선율적인 언성에 실려나오는 정열은 그의 굳센 의지를 말하고 그의 박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양은 적으나 애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우리들 세 세람은 한잔 술을 살 여유도 없어 늘 석천(石天)군의 주인집이 됫술 파는 집이어서 우리들은 오아시스나 찾듯이 자주 그 집에 모였는데 한번은 술 많이 먹는 내기까지 하여 네 사람 다 곤죽이 된 일이 있다.

“위스키 먹을 내기하면 내가 약하지” 하던 그때의 포석의 말을 나는 지금도 무한한 우정과 함께 회상하고 있다. 언제 그가 돌아와서 참말 한번 워드카 많이 마실 내기를 하게 될는지?

그러나 ‘조선문학계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포석 조명희’가 위스키도 보드카도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설야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한설야와 함께 허물없는 사이였던 민촌(民村) 이기영(李箕永)도 모르고 조카 조벽암도 모르고 <낙동강>을 높이 기렸던 김기진(金基鎭)도 알 리 없었다. 위스키나 보드카를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독한 물몬(액체)를 마실 수 있는 입이 달린 몸뚱이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낙동강>을 읽은 김기진 느낌이다. <조선지광> 1927년 8월호.

이만큼 감격으로 가득 찬 소설이- 문학이 있었던가. 이만큼 인상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모든 것을 보여준 눈물겨운 소설이 있었던가. 이것은 어떤 개인의 생활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 조선- 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없는 인생 기록이다.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가-ㄴ들
꿈에나 잊을소냐-
……
재래의 공상적 행방불명의 빈궁소설의 무조직에 비하여 이 작품은 획시대적 작품이다. 조명희군은 <저기압>에서 <낙동강>으로 비약하였다. 제2기에 선편을 던진 우리들의 작가가 나타난 것같이 생각된다.

민족해방 위해 총 대신 붓 들고 싸워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하여 총 대신 붓을 들고 싸우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였던 포석 조명희가 사바세계를 떠난 것은 1938년 5월 11일이었다고 한다. 이기영·한설야와 함께 친일 생채기 없는 거의 오롯한 ‘볼세비키 작가’였던 포석에게 ‘쓰따린문학상’ 대신 ‘일제첩자’라는 덤터기를 씌워 총살해버린 것은 소비에트 붉은경찰이다. 처자와 노모를 포함한 여섯 식구를 고국에 남겨둔 그의 향수 44.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지도부에서 일하며 산문시 <짓밟힌 고려> <10월의 노래> <볼세비키의 봄> <5월 1일 시위 운동장에서> <아우 채옥에게> 같은 것을 썼다고 한다. 소비에트 생활 10년 동안 찰가난은 벗어났을까?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 님에 의해 복사(이동)되었습니다. (2014-06-20 19: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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