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60회) 교우_ <가요사회사13>_<사의 찬미, 10만장의 기적> > 교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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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992회 작성일 2021-09-24 10:04
김영철(60회) 교우_ <가요사회사13>_<사의 찬미, 10만장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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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 10만장의 기적>


1920년대 한국 예술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의 투신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에 ‘음악계의 여왕과 백만장자의 정사극’으로 대서특필된 두 사람의 정사(情死)는 개인의 애정사를 넘어 초창기 예술인들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투신자살 직전 윤심덕이 취입한 <사의 찬미>는 이후 희곡으로 변형되고, 영화, 뮤지칼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점에서 <사의 찬미>는 예술의 다용화(多用化) 현상의 선도적 작품이다.

<사의 찬미>는 노래를 짓고, 부른 주인공 윤심덕의 투신자살로 널리 화제가 된 곡이다. 윤심덕에겐 여러 개의 ‘최초’라는 에피세트(epithet)가 따라 다닌다.

‘최초의 성악가’, ‘최초의 대중가수’, ‘최초의 방송사회자’, ‘최초의 패션모델’, ‘최초의 최다 레코드 판매기록자’ 등이 그것이다. 초창기 예술가답게 선구적인 성과를 거둔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20대의 짧은 나이에 불꽃처럼 살다 꺼져 버렸기에 더욱 큰 화제가 된 것이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남산재 교회의 권사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나 평양여고보, 경성여자 사범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강원도 원주 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여자로서는 최초로 총독부 관비유학생이 되어 동경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1923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인물도 출중하고 성량도 풍부해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로 각광을 받았다. ‘이슬에 젖은 해당화의 화판(花瓣)같은 입술로 구슬소리 같은 곱고 청아한 멜로디’(<동아일보> 1926.8.6)라는 극찬을 받았다.


경성 사범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으면서 ‘극예술협회’에 가입하여 순회 연극공연에 참여한다.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가담하여 연극배우가 되었다. 

1926년 7월에 연극인 이기세의 주선으로 <메기의 추억>, <어여쁜 새악시> 등 10여 곡을 일본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음반에 취입코자 도일(渡日)했는데, 돌아오는 귀국선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녀는 활달한 성격에 지식과 재능을 겸비한 신여성이었다. 예술 전반에 걸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연극, 영화, 무용, 음악 등 전 분야에 걸쳐 재능을 과시했다. 집안도 음악가 집안으로 남동생은 외국곡 번역가였고, 여동생 윤성덕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녀는 명실공히 시대의 선각자이고 자유로운 예술혼을 겸비한 신여성의 대명사였다.


그녀가 운명의 남자 김우진을 만난 것은 극예술협회에 가담하여 순회공연에 나서면서부터였다. 공연비용을 김우진이 댄 순회공연에서 윤심덕은 그의 전공인 소프라노로 독창을 맡았다.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는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홍난파 대신에 소극적이던 김우진에게 호감을 갖고 적극적인 애정을 호소했다. 결국 순회공연을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두 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김우진은 이미 결혼하여 처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련에 빠진 것이다. 김우진은 한국 초창기 연극기반을 구축한 연극계의 선구자였다. 전남 장성의 군수이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대 영문학을 전공한 인테리였다. 

그는 일찍이 1920년 ‘극예술협회’를 결성하여 순회극단을 이끄는 등 연극계의 새바람을 일으켰고, <이영녀>, <산돼지> 같은 주목할 만한 작품을 창작한 극작가였다. 

특히 표현주의 연극을 표방하여 신파극의 경계를 허물고, ‘소극장 운동’을 일으켜 조선연극의 개혁과 현대화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전통인습과 현실을 부정하는 개혁주의자였다. 그가 주장하던 ‘삶의 힘(life force)'이란 바로 자유로운 예술혼이었다. 어느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만이 예술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가부장제적 관습과 도덕률에 무너지면서 그는 죽음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여자의 사랑 앞에 만사가 사라졌다’고 밝혔는데 그 만큼 윤심덕과의 사랑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가정과 사회인습에 불행한 결말을 맺는 여성이나 예술가의 삶을 조명하는데 집중했다. <난파>(1926)는 전통의식과 근대의식이 충돌하는 상극적인 부자관계 때문에 인생의 파국을 맞는 한 시인의 삶을 그린 것으로 김우진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구마모토 농업학교 재학 시절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50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였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그녀의 유언곡이었다면, <난파>는 김우진의 유언작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소설과 음악으로 마지막 유서를 남긴 채 세상을 뜬 것이다.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Ivanovici)가 1880년에 작곡한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란 곡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이고,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부른 노래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 있느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윤심덕, <사의 찬미>


염세적이고 비극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노래다.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에서처럼 삶의 허무와 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조건을 아예 위태로운 곡예사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의미한 삶을 접고 죽음의 세계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역설적인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하여 아예 제목부터 죽음을 예찬하는 <사(死)의 찬미>였던 것이다. <사의 찬미> 뒷면에는 <부활의 기쁨>이란 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죽음은 새로운 부활을 의미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 윤심덕도 죽음 후에 예수처럼 부활하여 새로운 인생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윤심덕은 운명의 남자 김우진을 깊이 사랑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처자를 둔 유부남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련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었다. 자유연애를 갈구하던 시대였지만 엄연한 도덕율과 봉건적 사회윤리가 지배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신여성으로서 자유로운 사상과 사랑을 원했지만 사회는 결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음 뿐이었다. 1926년 8월 3일 관부연락선 토쿠즈마루(德壽丸)호에서 마지막 밀회를 나눈 후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이다. 승선자 명단에는 두 사람의 예명인 김수산(金水山)과 윤수선(尹水仙)이 실려 있었다. 사랑의 완성을 위한 죽음, 그것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최초의 소프라노 여가수와 호남의 유부남이자 촉망받는 극작가의 투신자살은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자유연애를 외치던 젊은이들에겐 진정한 사랑의 아이돌(idol)이 되었고 유사한 동반자살이 유행처럼 번졌다. 투신 후 자살은 거짓이고 나중에 이탈리아에 산다는 소문이 퍼져 사회적 파장은 더욱 커졌다. 이탈리아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투신자살 후 나온 <사의 찬미>는 그래서 더욱 각광을 받았다. 물경 10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던 것이다. 유성기가 들어온 초창기에 10만 장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투신자살도 이것을 노린 축음기 회사의 조작이라는 속설까지 떠 돌아 또 한번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유언이고, 유언곡이 되었다. 그녀는 그의 죽음을 예견했듯이 직접 <사의 찬미>를 썼던 것이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가난한 로맨티스트 음악가와 부유한 이상주의 극작가의 비련의 죽음은 신파극 이상의 극적 효과를 연출했다. 신파극 <장한몽>이 ‘사랑이냐 돈이냐’는 황금 만능주의 세태의 축소판이었다면 <사의 찬미>는 ‘사랑이냐 도덕이냐’는 윤리적 가치관의 축소판이었다. <사의 찬미>는 허구가 아닌 실제 일어난 신파극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세간의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말하자면 <장한몽>이 허구의 신파극이었다면, <사의 찬미>는 실제의 신파극이었다.

두 사람이 연출한 신파극은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와 김우진의 희곡 <난파>로 승화된 것이다. 두 사람의 비극적 죽음이 아이러니칼하게도 작품 탄생으로 부활되는 또 하나의 극적 효과를 빚어낸 것이다. 1991년 마침내 영화로 각색되어 뜨거운 관심과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김호선 감독으로 장미희(윤심덕 역), 임성민(김우진 역), 이경영(홍난파 역)이 열연하여 대종상 여우주연상, 청룡상 남녀주연상을 거머 쥐었다. 당대의 내로라는 배우인 문희, 장미희, 윤석화 등이 비극의 주인공 윤심덕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뮤지칼 <사의 찬미>는 2013년에서 2015년까지 대학로에 뜨거운 호응 아래 공연되었다. 이처럼 <사의 찬미>는 자그마한 날개짓 하나가 음악에서 희곡, 연극, 악극, 영화와 뮤지칼로 확대되는 다용화 효과를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예술의 ‘나비효과’를 빚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의 찬미>는 현재진행형의 종합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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