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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건 조회 1,038회 작성일 2009-08-06 15:02
나는 차라리 이완용을 원한다(시일야방성대곡)

본문

일본의 고교야구 역사를 살펴 봅시다.

흔히들 일본하면 떠올리는게,

스모,다도,애니메이션, 초밥(쓰시), 회 (사시미) 같은 것일겁니다.

그런데, 연일 가판대에서 판매되고 있는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는

야구얘기(광적일 정도로)는 그 역사가 다도나, 스모에 비하면 일천한데도

그렇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일본에서 야구가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본에 야구가 들어 온것은 1870년 혹은 1878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대략 한국 보다 26년 혹은 30년정도 일찍 야구를 도입한 일본이 야구에 열광하고 지금도

4200여 고등학교 야구가 고시엔(갑자원)대회를 통하여 새로운 영웅을 만들고, 그 영웅이 프로를

활성화 시키고, 그 프로는 아마야구를 다시 중흥시키는 이런 선순환 구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본이 우리나라 보다, 서구 열강의 문물을 먼저 들여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은 특유의, 모방과 변형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새로운 형질의 물건을 만들어

원조인 서구 열강을 따라잡는 특유의 국민성이라고나 할까.....

야구도 서구에서 온것이고 기술도 그들에게 배운것이지만, 잔재미를 곁들인 특유의 일본 야구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현재까지는 (공식적으로는) 세계 1위가 된것입니다.

나는 얼마전 일본 고교야구의 한 프로그램을 접하게 된적이 있었습니다.

방과후, 운동장에 입장 할때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부터

던지고 받는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하고 배려하는 모습등, 이것은 단순히

놀이가 아니라  "예"이거나 "도"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입은 유니폼, 눈섶이 보일듯 말듯 눌러쓴 단정한 모자,

과장되거나 흥분되지 않고 일구일구에 어떤 의식을 치르는것 같은 엄숙함......  

 물론 그들 야구부원 모두가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극히, 아주 극히 일부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야구쟁이]를 키우고 기능인을 양성하는 기술자 양성소가 아니라, 지,덕,체를 고루 갖춘 훌륭한

교양있는  시민을 키우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도시와 농촌, 어촌,산촌

인구이동에 따른 사회적 변화로 인하여, 있던 학교가 없어지기도 하고, 새롭게 생기는 학교도

무수히 많다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1999년이나 십년이 지난 지금이나 4천개가 넘는 고교야구가 숨쉬고 살아 있는곳,

그래서 여전히 모든 학생들이 편식하지 않고 고른 자양분을 섭취 하고  마음에 드는 일을 선택 할 수 있도록

그 기회를 주는곳 ......

이것이 일본의 학원 야구를 본 저의 심경이었습니다.

조금 다른 각도의 얘기지만,

우리나라의 서해안, 네덜란드의 일부,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일부 해안이 소위 리아스식 해안이라고 해서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연 환경인데,

새만금 사업이다 뭐다 해서 참으로 논란이 많습니다.

득과 실이 무엇인지는 손계산서가 당도하지 않아 아직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숨쉬고 살아있는

"그것"을 없애거나 변형 시킨 후에는 다시 찾아오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거나, 회복하기가

불가능 하다는데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작금의 상황에서, 제가 가장 우려하고 염려하는 것은

운동부를 존속시킨다,혹은  없어진다는 사실(팩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자율형 사립고"가 되었으므로,자동적(?)으로 운동부는 어떻게 하겠다라는 발상이

기가 막힙니다.

이름만 중앙이지 수업을 전폐하다시피 야구쟁이로 내몬 책임은 누구의 몫입니까?

적어도 우리가, 우리 선배님들이 학교 다닐때 운동부 오전 수업 했습니다.

우리 동기 임도건이는 유격수 보면서 반에서 20등쯤 했고,

경남고를 졸업한 허구연씨는 야구 특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대입예비고사 보고

고려대 법학과 간 사람입니다.

막연하게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 하는것이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타파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거에도 수없이 명멸한 고등학교 운동부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사라진것은 자율형 학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포괄적 의미에 있어

경쟁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 고등학교만이 운동부 존립의 담보가 될 수 없으며,

1910년이래, 단 한 해도 거르지 않은 고교야구를 그것도, 입찰도 경매도 거치지 않은채

포기 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100년된  학생 야구를, 그것도 일본의 고시엔 대회에  내놓아 그 정기를

매각하고, 온전히 이어 주겠노라고 한다면,

그 값어치는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을사년에 오적이 있었다 합니다.

그중 이완용과 송병준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표적 인물인데요,

이완용은 고종초 문과 장원급제 하였던 명문가의 인재이고, 송병준은

서출인데 얼마나 무식했던지 이런 일화가 있다고 하더군요.

한일합방(병합)을 앞두고 일본 관리가 합방의 의미를 아무리 설을 해도 송병준이 알아듣지

못하자,

[ 이것은 조선을 넘겨주는 댓가로 일본이 당신한테 얼마를 주는 것이다]했더니

바로 이해를 하더랍니다.

최소한 송병준이 보다는 이완이 좀 나은것 같은데 야구부를 없애더라도

이완용이 같은 인물이 설명을 해 주었으면 덜 억울할것 같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  이하 생략

 

 

 

 

 

 

 

 

 

 

 

한국에 야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5년, 일본에게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당한 해였다.

당시 선교사로 온 미국인 질레트(P.Gillett:한국명 길례태 吉禮泰)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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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평양 선천 등지로 원정 경기에 나선 황성 YMCA야구단의 모습. (연합뉴스)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길례태 선교사.
길례태 씨는 선교 목적으로 한국을 찾았다가 한국 야구 보급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길례태 씨는 이후 일제의 독립운동가 탄압에 항의하다 추방당한다.


이후 서울의 보성고등학교, 오성학교, 경신학교, 배재학당, 휘문 등 여러 야구팀이 조직되어 1911년 11월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팀이 처음으로 일본원정에 올랐다. 

1922년엔 전조선군과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단 초청 경기가 있었는데, 철도구장에서 경기를 해 21:3으로 대패. 

1923년엔 조선야구협회가 창립되어 한국 야구가 비로소 본궤도에 올랐다. 1926년에는 동아일보사 주최로 제1회 4구락부, 즉 중앙·경신·서울(배재)·고려(휘문) 간에 리그전이 열렸다.

1928년 조선의 도쿄 유학생 팀이 조선 내 최강 야구팀으로 일컬어지던 일본의 용산철도국 팀에 도전장을 던진다. 3-0으로 뒤진 6회말 백기주의 1타점 우중간 적시타 등으로 1점 차로 따라붙었다. 7회말 서승규와 노용호의 적시타가 잇따라 터지며 4-3으로 역전. 9회초 2사 1·2루의 위기서 상대의 우전안타를 잡은 우익수 유약한의 호송구로 2루주자를 홈에서 아웃시키면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백기주는 혼신의 힘을 다해 11안타 완투승. 스탠드에서 국민들이 뛰어 내려와 엉엉 울었다고 전해진다. (관련기사: 잘싸웠다 한국...역대 일본팀 대결의 역사 [스포츠서울 2006.03.19 23:30:36])

그러나 일제 치하의 한국 야구는 결국 1938년 일본인들이 조직한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됨으로써 주체성을 잃고 만다. 한국 야구는 이후 1980년까지 단 한번도 일본과 대등한 경기조차 펼치지 못한 채 국제 무대에서 2류 대접을 감내해야 했다.

1945년 10월 15일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야구인들은 조선야구협회를 다시 조직하였다. 조선학생야구연맹과 한성실업야구연맹이 탄생했고, 제1회 4도시대항전도 창설되었으며, 6월에는 제1회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가 열리고, 7월에는 제1회 전국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1953년 조선일보사에서 청룡기 야구 대회를 부활시켜 한국 야구는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봉황기, 대통령배 이렇게 4개의 고교 야구 대회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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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황금사자기 배너. (동아일보사)
청룡기와 함께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를 대변하는 가장 오래된 대회로,
이 대회를 통해 한국의 수많은 야구 천재들이 배출됐다.


한국의 4대 고교 야구는 모두 신문사가 주최했다. 조선일보사의 청룡기 대회(1946년), 동아일보사의 황금사자기 대회(1947년), 한국일보사의 봉황대기 대회(1971년), 중앙일보사의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1967년).

댓글목록

no_profile 권태웅(高068) 개인프로필 프로필 차단하기게시글 차단하기 작성일
대단하군요
언젠가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허구연해설위원이 했던말이 기억납니다.
학업을 중시여기는 중앙고가 결승에 올라왔다고해서 깜짝놀랐다.
이것이야말로 지.덕.체.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중앙의 참모습이 아닐까요?
no_profile 김혁곤(高080) 개인프로필 프로필 차단하기게시글 차단하기 작성일
교장선생님이 모교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너무 직설적 이지만 동문들의 야구부에 대한 애정과 애교심을 이해하려고 하시지 않는것 같습니다. 우선 임기동안의 눈앞에 보이는 입시실적만 중요시하는것 같습니다. 동문 선배님 후배님 우리모두 우리모교에 대한 주권을 그 한분에게 유린당해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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