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25 북한군의 남침 |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인민군은 7개 보병사단,1개 기갑여단 및 특수전부대를 포함, 총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 하였다. |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
한국의 사태를 보고 받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결의안을 찬성 9, 반대 0, 기권 1로써 가결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이 집단안전보장조치로써 침략을 저지하고 평화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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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계획하였으며, 미 제 8군 사령관 워키중장은 8월 1일 전군에 낙동강방어선으로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
북한인민군은 8월 5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 창녕,·영산, 마산, 포항, 안강 등에서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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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 |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것은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폭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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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
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왜관·다부동,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을 공격하였다. 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이곳에서 반격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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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9.15 인천상륙작전 |
1950.9.15 인천상륙작전맥아더 유엔사령관은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261척의 함선과약1천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으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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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9.28 수도 서울 탄환 |
인천에서 상륙한 미 제 10군단 주력과 낙동강전선에서반격을 실시한 미 제8군 주력이 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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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
반격을 실시한 국군 및 유엔군은 9월 30일 드디어 38도선에 도달하여 대망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제 23연대와 수도사단의선두부대가 동부전선에서 38도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작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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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11.25 중공군, 제2차 공세 개시 |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야간행군으로 북한지역의 산악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의 대군이 처음으로 공세를 개시, 국경선에 접근한 국군 및 UN군 부대들을 포위·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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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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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국경선으로의 공격명령을 받은 국군 중에서 제6사단 제7연대의 선봉부대가 26일 최초로 압록강변에 도달하였다. 9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도 곧 중공군의공격을 받아 급히 철수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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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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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공세를 받아 미 제8군이 청천강선으로 철수한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전선에서는미 제10군단이 계속 북진을 실시하여 미 제7사단의 선두부대가 국경도시 혜산진을 무혈점령하였고, 국군 제3사단은 합수, 백암까지, 수도사단은 청진까지 진출하였다.그러나 이들 부대들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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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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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워커 장군의 뒤를이은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위력수색 작전으로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리고, 3월 중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도선까지 진격한 후 이 선을 돌파하여 재차 북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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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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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미 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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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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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 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 하므로서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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