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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은 투수로, 박찬호는 타자로 활약
연장 11회. 비까지 뿌려 배트와 글러브는 미끄럽게 젖어 있었다. 3시간56분의 숨막히는 사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선린상고 좌완투수 박노준(朴魯俊)의 강속구가 경북고 3번 타자 홍순호의 옆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순간, 홍순호의 방망이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좌익수 앞 적시타. 3루에 있던 김윤영은 껑충껑충 춤을 추며 홈인했다. 1981년 제36회 청룡기 결승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완투수 김건우(金健友)와 함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던 초고교급 스타 박노준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 고교 1년 때부터 주전으로 뛴 그는 청룡기 대회에서 1학년 때 준우승, 2학년 때 우승을 잡아냈던 터. 하지만 3학년 때는 다시 준우승에다 개인적으로는 감투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박노준은 최근 “청룡기는 최고 권위의 학생 야구대회여서 졸업반 때는 꼭 우승하고 싶었다”면서 기자에게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현재 SBS 해설위원인 박노준은 차분하고 논리적인 해설로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당시 선린상고를 물먹인 경북고 좌완투수 성준(成埈)은 프로야구 통산 97승을 기록한 뒤 현재 SK 투수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성준은 고교시절부터 노트에다 상대방 선수의 장단점을 모두 기록, 분석하는 등 가장 공부를 많이 하는 선수로 인정받았다. 당시 선린상고를 격파한 경북고는 청룡기 역사상 최다(7회) 우승 기록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배움’ ‘근검’ ‘예절’ 중시해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올해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6월 1일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된다. 제60회. 사람으로 치면 환갑의 나이다. 올해로 국내에 야구가 도입된 지 100년. 그 역사는 청룡기가 썼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기까지 고교야구의 열기는 요즘 젊은이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면 교통량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대부분 상가는 문을 닫았다.
청룡기 대회는 가장 오랜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명승부와 진기록을 엮어내며 숱한 야구 스타를 배출해냈다. 1973년 대구상고는 강태정 신임감독의 지휘로 대통령배, 봉황기, 황금사자기 등 전국대회 3개를 휩쓸었다. 하지만 강 감독의 마음은 아쉬웠다. 청룡기 대회 땐 대구지역 예선전에서 대건고에 패배해 아예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청룡기에 붙는 ‘선수권(選手權·championship) 대회’란 권위가 못내 그리웠다고 한다. 청룡기는 ‘배움’ ‘근검’ ‘예절’을 가르쳐 다른 대회와는 차별화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래서 역대 청룡 스타는 자부심도 크다.
1949년 제4회 대회. 광주서중(광주일고)의 김양중(金洋中)과 경남중(경남고)의 장태영(張泰英), 두 걸출한 좌완투수가 대결을 벌인 결승전은 사소한 실책 하나가 승부를 갈랐다. 당시 장태영 투수는 170㎝가 조금 넘는 키에도 불구, 140㎞대의 강속구를 던졌다. 9회까지 1 대 0으로 앞서던 경남중은 2사후 2루수의 1루 악송구가 빌미가 돼 동점을 허용한 뒤 연장 11회말 김양중에게 끝내기 중전 적시타를 맞아 1 대 2로 역전패, 대회 첫 3연패(連覇) 달성에 실패했다. 경남중 포수 송재창은 홈플레이트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장태영은 고교졸업 뒤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장태영은 “운동선수도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코피가 흐를 정도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후 장태영은 대한야구협회 등에서 일하다가 1999년 8월 타계했다. 라이벌이었던 김양중(75)씨는 서울중앙병원에 달려와 라이벌의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했다.
청룡기 초기 스타 중엔 동산고 신인식(申仁植) 투수를 빼놓을 수 없다. 동산고와 중앙고가 맞붙은 1956년 제11회 대회 결승전. 역시 실책으로 승부가 갈렸다. 동산은 5회말 안타와 상대방 실책, 그리고 희생타 2개로 귀중한 결승점을 뽑았다. 당시 171㎝, 65㎏의 작은 체구였던 신인식은 결승전에서 삼진 11개를 엮어가며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1회초 중앙고 1번타자 천진환의 타구를 유격수 박하성이 실책만 하지 않았다면 퍼펙트 게임을 기록할 뻔했다. 그는 별다른 변화구도 없이 강속구 하나로 고교시절 3년 연속 청룡기 우승을 이끌어냈다.
청룡기 결승전의 노히트 노런 기록은 1992년 제45회 때도 나왔다. 당시 박찬호의 공주고 1년 후배인 노장진(盧長震)이 선린상고를 상대로 기록한 것. 노장진은 삼성을 거쳐 현재 롯데의 마무리 투수로 뛰고 있다. 선린상고는 결승전만 되면 참 운이 없는 학교로 기억되고 있다.
1960년대 말에는 경북고의 좌완투수 임신근(林信根)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임신근은 1967년과 1968년 경북고를 연거푸 청룡기 정상에 올려놓고 자신은 모두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 불어난 체중과 어깨 통증을 이기지 못해 한일은행에서 타자로 변신, 각종 타격상을 휩쓸었다. 그러다가 1991년 9월 쌍방울 창단 수석코치 시절 구단 버스 안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는 대구 야구의 전성기였다. 1970년 제25회 때는 대구상고 정기혁(鄭基赫)이 오늘날 그렉 매덕스(시카고 커브스)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제구력으로 청룡기를 낚아챘다. 정기혁은 2학년 때도 준우승을 하면서 감투상을 받아 청룡기와는 인연이 깊다. 그가 35년 전 만든 사진 스크랩을 보니 ‘매일 300개의 피칭이 오늘을 이루었다’ 등의 제목이 적힌 사진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1971년에는 강속구를 앞세운 경북고 남우식(南宇植)이 결승전에서 경남고를 1 대 0으로 꺾고 우승기를 안았다. 당시 경북고는 천보성 배대웅 정현발 등 초호화판 멤버를 자랑했다. 흔히 역대 고교야구 최고 스타를 들라면 선동열이나 최동원, 박찬호를 언급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니다. 고교시절만 놓고 보면 단연 남우식이다. 전국 5개 대회를 모조리 우승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게임을 혼자 던졌다. 하지만 남우식은 한양대 진학 이후 고교 시절의 후유증으로 팔꿈치와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끝으로 1980년 12월 야구계를 떠났다.
‘막강투수’ 남우식 대기업 임원
스타는 무얼 해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그는 현재 ㈜롯데햄·우유의 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대기업 임원이 됐다. 그는 “야구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처음엔 너무 어려웠지만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그라운드가 아닌 마케팅에서 경쟁했고 밤에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자신과 싸웠다”면서 “운동을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슬로커브가 일품이었던 중앙고 윤몽룡(尹夢龍) 투수는 1972년 제27회 결승전에서 2연패를 노리던 경북고를 4 대 1로 침몰시키며 대구 야구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당시 윤몽룡의 두뇌피칭에 정구왕 이선희 구영석으로 이어지는 경북고 타선은 내내 헛스윙만 해댔다. 하지만 윤몽룡은 건국대 입학 이후 탁월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한일은행에서 은퇴, OB 코치를 맡았으나 1984년 지병인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현대해상 회장인 정몽윤 전(前) 대한야구협회장은 중앙고 동기생인 윤몽룡에 매료되어 도시락을 싸서 야구장을 쫓아다녔으며 윤몽룡의 죽음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 야구의 명성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현재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대구상고 포수 이만수(李萬洙)는 1977년 제32회 대회에서 투수인 박영진과 짝을 이루어 청룡기를 거머쥐었다. 이만수는 타격·최다안타·타점상과 함께 최우수선수상도 받아 4관왕에 올랐다.
1973년 제28회는 꺽다리 장타자 김용희(金用熙)가 4번을 치며 활약한 우승팀 경남고보다는 배재고의 ‘고무팔’ 투수 이광은(李光殷)이 더 화제를 모았다. 그는 6월 14일 광주상고와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5경기에서 무려 59이닝을 던졌다. 연장전과 서스펜디드 게임이 겹쳐서다. 그는 223명의 타자를 맞아 공 697개를 던졌고 32안타를 맞아 7점만 내주었다. 팀이 결승전에 오르진 못했지만 청룡기 역사상 가장 값진 감투상을 받았다. 그의 호투에는 신언호라는 빼어난 포수의 리드가 있었다. 공수(攻守) 만능의 허슬 플레이어로 활약하다가 은퇴 후엔 LG트윈스 감독을 지냈던 이광은은 팀 성적부진을 이유로 도중하차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6년 제31회는 단연 초고교급 투수인 경남고 최동원(崔東原)의 독무대였다. 최동원은 당시 4번의 완투승을 기록했고, 그 중 2번은 완봉승이었다. 특히 군산상고와의 승자결승전(당시에는 패자부활전이 있었다)에서는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면서 청룡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군산상고는 6월 20일 열린 최종결승전에서도 최동원으로부터 단 2개의 안타밖에 뽑아내지 못하고 12개의 삼진을 헌납했다. 177㎝에 73㎏의 최동원은 금테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과 발을 높이 치켜들고 던지는 다이내믹한 투구 폼으로 팬을 몰고 다녔다. 시속 150㎞에 이르는 시원시원한 강속구에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지는 드롭성 변화구는 아직도 야구 팬의 추억에 남아있다. 프로야구에서도 이름을 날린 그는 현재 한화 투수코치로 최진실의 남편이었던 조성민의 야구 재활을 지도하고 있다.
야구선수 중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양상문(楊相汶) 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부산고 2~3학년 때 포수이자 4번인 김호근과 배터리를 이루며 청룡기를 2년 연속 가져간 주역. 훗날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양 감독은 당시에도 면도날 같은 강속구와 타자의 심리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차원이 다른 야구를 했다. 다만 고교시절 너무 혹사당한 탓인지 고려대에 진학한 이후 그다지 뛰어난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김병현·최희섭도 청룡기가 낳아
‘바람의 아들’이라는 광주일고 유격수 이종범(李鍾範)은 1988년 제43회의 스타였다. 군산상고와의 결승전. 연장 11회말. 2사 1·3루의 마지막 찬스에서 이종범은 군산상고 투수 김성곤의 5구를 그대로 당겨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밖에 군산상고의 ‘싸움닭’ 투수 조계현(趙啓顯·1982년 제37회 우수투수 및 최우수선수상), 경북고의 천재 유격수 유중일(柳仲逸·1982년 제37회 타격상), 서울고의 든든한 안방마님 포수 김동수(金東洙·1985년 제40회 최우수선수), 부산고의 ‘수퍼베이비’ 광속구 투수 박동희(朴東熙·1985년 제40회 감투상) 등도 1980년대 청룡기 스타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하는 국내 스타는 대부분 청룡기에서도 이름을 드날렸다. 뉴욕 메츠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좌완 구대성(具臺晟)은 1987년 제42회의 최고 스타였다. 당시 대전고 2학년이던 구대성은 1회전에서 경기고를 맞아 구원투수로 등판, 승리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다섯 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됐다. 당연히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송곳처럼 곳곳을 찌르는 예리한 강속구와 변화구가 그의 전매 특허였다. 하지만 구대성은 고3 때는 1회전 탈락의 비운을 맛봤다.
현재 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에서 뛰는 ‘국민타자’ 이승엽(李承燁)도 구대성처럼 2학년 때 청룡기 스타가 된 케이스. 당시 그는 타자보다는 왼손 투수로 더 이름을 날렸다. 1993년 제48회 대회 군산상고와의 결승전서 8과 3분의 1이닝 동안 4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7 대 3 승리를 기록했다. 대회를 통틀어 20과 3분의 2이닝 동안 5실점(4자책)으로 방어율은 1.77. 지금은 홈런왕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당시는 결승전 홈런이 유일했다. 이승엽도 구대성처럼 3학년 때는 초반 탈락의 비운을 맛봤다.
이승엽과 반대로 박찬호(朴贊浩)는 청룡기에서 투수보다 타자로 활약했다. 공주고 2학년 때인 1990년 제45회에 참가했다. 당시 박찬호는 투수로도 나섰지만 컨트롤이 좋지않아 우익수를 주로 봤다. 최강이던 경남고에 2 대 6으로 패하며 준우승했고 투수로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타격에선 6번타자로 쭉 출장해 19타수6안타(3할1푼6리)에 3타점을 올렸다.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 중인 휘문고 출신 김선우(金善宇·워싱턴 내셔널스), 광주일고 출신인 서재응(徐在應·뉴욕 메츠)과 김병현(金炳賢·콜로라도 로키스)과 최희섭(崔熙燮·LA 다저스)도 청룡기가 낳은 황금 스타다.
김선우는 1994년 제49회 1회전에서 서재응(당시 2학년)과 김병현(당시 1학년)이 속한 광주일고를 상대했다. 9이닝 동안 10안타를 내줬으나 삼진 10개를 솎아내며 완투승을 기록했다. 김선우는 장충고와의 결승전에서 5 대 2 완투승과 함께 직접 2점 홈런도 쳤다.
제49회 때 김선우에 수모를 당한 광주일고는 1995년 제50회에서는 신입생 최희섭까지 가세하며 최강 전력을 뽐냈다. 2학년 김병현은 특유의 잠수함 투구로 대구상고에 완봉승을 거두는 등 결승까지 4승을 올렸다. 김병현은 특히 덕수상고와의 결승서 3번이나 한 이닝 3탈삼진을 기록했다. 졸업반이던 서재응도 경기고와의 2회전에서 2실점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김병현과 번갈아 마운드를 맡으면서 광주일고에 청룡기를 안겨주었다. 당시 1학년이면서도 4번 자리를 꿰찬 최희섭은 21타수8안타에 2루타만 4개를 기록, 오늘날 ‘메이저리그 2루타의 달인’이 될 것을 예고했다. 이들 메이저리거 3명이 한데 모여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것은 이 해 청룡기가 유일했다.
또다른 메이저리거인 봉중근(奉重根·신시내티 레즈)은 1997년 제52회 때 최고의 스타였다. 세 경기에서 내리 강속구로 쉽게 승리를 따낸 봉중근은 배명고와의 결승에서 피곤과 컨디션 난조로 마운드에서는 다소 부진(6실점)했다. 그러나 타격에서는 4타수4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했다. 봉중근은 이 대회에서 만루홈런 1개를 포함하여 16타수11안타(타율 6할8푼8리)에 9타점을 기록, 팀 우승과 함께 3관왕(최우수선수·타격·타점)에 올랐다.
현재 본격적인 메이저리그 진입을 노리고 있는 경남고 출신 송승준(1998년 제53회 우승)과 덕수정보고 출신 류제국(2001년 제56회 우승)은 최근의 청룡기 스타다. 류제국은 불 같은 강속구로 경기고와 준결승전에서 20개의 삼진을 잡았고, 결승전에서는 현재 기아의 김진우가 버티는 진흥고와의 맞대결을 승리로 이끌었다.
광주동성고의 에이스인 한기주는 2003년 제58회 대회에서 1학년의 몸으로 시속 145㎞의 강속구를 던지며 우승을 이끌어냈다. 186㎝에 90㎏의 체격. 한기주에 대해서는 ‘한국야구 100년 사상 최고 투수’ ‘선동열과 최동원의 고교시절보다 낫다’는 찬사가 잇따르지만 ‘구속(球速)에 비해 볼끝이 다소 무디고 슬라이더와 포크볼 등을 구사하지만 변화구의 각도가 아직은 밋밋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의 성장 여부가 한국 야구의 최대 관심사로 등장했다. 다만 광주동성고는 이번 청룡기에서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 아쉬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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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좋은글을 올려주세요
윤몽룡,김승수,홍재진,유대성,선우영수,문복기,강기섭,김종수,홍희섭으로 이어지는 70년대의 스타들, 가슴 뭉클 해 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