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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정신 이어받아 대학생들이 구국일념으로 독도수호 克日운동등 나라사랑 실천 동참을..
시민단체 활빈단(대표 홍정식)은 4.19혁명 47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생들을 향해 '4.19혁명정신'을 계승해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구현해 "정의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국익을 위한 애국대열에 앞장서라"고 촉구했다.
활빈단은 청년학도들이 4.19혁명을 일으킨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를 이어받아 호시탐탐 독도침탈야욕을 노정화하며 군국침략주의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해 중국대학생들의 거센 反日운동과 같이 "민족자존수호 차원의 克日운동과 중국의 백두산침탈및 동북공정을 분쇄하는 국제켐페인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활빈단은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主導勢力)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조직적인 투쟁 목표나 계획도 없는 상황속에서도 "위대한 민주혁명으로 승화된 4.19혁명의 민주화 횃불로서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라"며 동북아에서 열강들의 각축으로 "조국 한반도가 위태로울때 대학생들이 침묵하는 것은 진정한 젊은이의 자세라 아니다"고 강조하며 젊은이들이 국민행동 대열의 전선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또한 활빈단은 오는 대선에 대비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원리를 실천하기 위해선 정치권내 불순한 음모와 공작을 분쇄하여 진정한 민권의 승리를 이끌 참된 투쟁력 배양도 당부했다.
이와함께 활빈단은 19일 4.19 기념탑에서 한국 헌정발전사에 있어 영원불멸의 가치와 의의를 남기고저 고귀한 피를 희생한 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이젠 60대중반인 전국의 4.19세대층이 손주벌 되는 젊은학도들에게 조국애 고취에 앞장서 주길 요구했다.
아울러 활빈단은 청와대를 향해 참민주주의 구현을 위해선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원칙을 세우고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에서 강인하고 신바람나게 활기찬 정부로 가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하고 특히 서민경제·사회적 기반 확충및 소외된 무산계층에 대한 활빈복지정책에 주력할 것도 촉구했다.
이어 활빈단은 노무현대통령에게 "利가 義를 이기면 亂世이고 義가 利를 이기면 治世"라며 정파를 초월해 소신과 결단력을 보인 한미FTA협상 타결과 같이 남은 임기동안 "독선과 오기에 찬 정치를 접고 상생상화와 국익을 위한 치국에 전념하라"고 요구했다.
앞으로 활빈단은 제2의 안중근,윤봉길의사와 같은 의열애국청년행동대원 양성,온실속의 부유층 젊은이도 유흥비등 용돈을 아껴 의행을 실천하고 기업체,사회단체는 의로운 활동으 하는 NGO에 장의금(奬義金)후원,각군장성과 장관 국회의원등 고위공직자들에게 자기아들부터 조국을 생각할 줄 아는 義로운 청년이 되도록 독도수호등 애국운동에 솔선수범하도록 요청할 계획이다.
출처:시민단체 활빈단(活貧團) www.hwalbindan.co.kr ☎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선거는 온갖 방법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4.19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투표를 마치고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항의하며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왼쪽)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투쟁을 벌이고 있는 시민들.(1960.4.20) |
시위대에 의해 화분이 깨지는 등 어수선한 자유당의 한 사무실(왼쪽)과 창과 출입문이 파손되고 그을린 자유당 중앙당부. |
4월 19일 시위로 파손된 차량과 가옥. 격렬했던 당시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결국 하야성명을 발표한다. 12년간의 경무대 생활을 청산하고 이화장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1960.4.28) |
이기붕 국회의장은 4월 28일 일가족이 모두 죽음으로 비극적인 생을 마쳤다. 운구차량이 경무대를 나서고 있다. |
4.19혁명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서 통곡하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60.4.24) |
4.19혁명 이후 구속된 정치깡패들이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재판 장면.(60.7.6) 4·18 고대생 피습 사건으로 동대문사단의 보스 이정재는 사형을 당한다. |
4.19혁명 당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한 경무대 앞에서 현장검증이 실시됐다.(60.7.20) |
서울지법이 4.18발포명령사건 등에서 검찰 공소를 사실상 전면 파기하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열렸다.(60.10.11) 이는 사회질서 회복이라는 5.16군사쿠데타의 명분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