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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3.1독립만세 재현 행사
중앙교우회장 기념사
안녕하십니까!
저의 모교 중앙학교에서 오늘 3.1독립만세 재현 행사를 공동주관해 주시는 한국 시민 자원 봉사회 중앙회 유주영 회장님과 임원님들, 국가보훈처, 서울 11개 지구와 시민여단의 자녀 학생들과 샤프론학부모님들을 감사와 함께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3.1운동이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의미 있고 위대한 거사였다는 것은 널리 주지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저는 그 3.1운동의 계획 추진단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3.1 운동의 책원지가 된, 바로 이 자리 우리 중앙학교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당시 중앙학교의 교장 사택이 3.1운동의 산실이란 점을 다시 상기하고자 합니다. 1919년 당시 우리 중앙학교의 교장 사택은 지금의 강당자리에 있었는데 교주 김성수선생과 교장 송진우선생, 교사 현상윤선생이 함께 기숙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낮에는 각기 학교업무에 집중하던 이들이 저녁에는 함께 모여 민족의 운명을 개탄하며 나라의 독립을 숙의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1918년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있은 후에는 국내의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는 모의도 이곳에서 성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상순의 어느 날 아침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이곳으로 학교의 선배인 현상윤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때 일본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발표하료고 준비한 독립요구선언서의 초고를 보여주었습니다. 춘원 이광수가 작성한 그 선언서는 그곳에 맡겨졌으며 고하와 기당선생은 그날 아침 중앙학교를 방문한 육당 최남선 선생에게 이를 보였습니다. 이에 자극받아 육당 최남선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독립선언서를 집필하기로 한 것도 바로 중앙학교의 사택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3.1운동보다 앞서 일본에서 일어난 2.8독립운동의 거사 자금이 중앙학교에서 지급되었다는 점입니다. 거사 전에 당시 재정담당이던 와세다 대학생 나용균(羅容均)은 호남의 고향집에 와서 거사자금으로 700원을 만들어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 선생을 만나 180원을 더 받아 동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돈 880원은 지금 돈으로 수천만 원이 되는 큰 돈으로 실제 인촌의 지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수긍하게 됩니다.
셋째로 천도교의 참여와 기독교, 불교의 참여를 주도한 것도 중앙이었습니다.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이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학교 교장 최린을 만나고, 최씨가 천도교의 지도부인 오세창, 권동진과 의논하여 손병희 교주를 움직이게 된 것도 그렇거니와 송진우 현상윤 최린 최남선이 중앙학교 사택에 모여 회합하고 기독교대표 이승훈과 불교대표 한용운의 참여교섭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인촌과 고하 그리고 기당은 계동 김성수 별택에서 이승훈과 만나 기독교 측의 참가 동의를 받고 천여 원의 거사자금을 지원했던 것입니다. 3.1운동은 중앙의 사택뿐만 아니라 교주 인촌의 별택에서도 계속 추진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넷째로 이 같은 3.1운동 추진과정에서 중앙인들이 다수 참여한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48인에 포함되어 옥고를 치른 분 가운데 송진우와 현상윤은 당시 교장과 교사였고, 최남선과 임규는 전직 교사였습니다. 33인에도 48인에도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배후에 중앙학교 교주인 인촌 김성수선생이 있었다는 것을 넉넉히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민족의 대표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중앙에서 계획되고 추진되었다는 점은 중앙의 민족학교로서의 위상을 새삼 확인시켜줍니다. 전국 13도의 민족 선각자들이 전국의 학회를 통합해가며 세웠던 우리 중앙학교의 특별한 역사전통은 3.1운동의 책원지가 되고, 6.10만세운동의 선창과 주동 역할, 서울학생운동의 주동, 조선소년군의 탄생, 중앙고보 반제동맹, 중앙고보 5인 독서회사건 등 3.1운동과 그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졌다는 점을 중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3월 1일
중앙교우회장 백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