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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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만세사건(丙寅萬歲事件)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李炳立)·박하균(朴河鈞), YMCA 영어과의 박두종(朴斗鍾), 중앙고보의 이선호(李先鎬)·이황희(李晃熙), 경성대학의 이천진(李天鎭) 등이다. 이들은 순종의 국장일인 6월 10일에 많은 민중이 참배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계기로 3·1운동과 같은 대일항쟁운동을 유발하고자 격문(檄文)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날 전경찰과 조선군사령부 휘하 일본군 5,000명을 동원해서 경비에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경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면서 중앙고보생이 주창하여 독립만세을 부르며 격문을 뿌렸고, 이어 관수교(觀水橋)·경성사범학교앞·훈련원·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에서도 만세와 격문을 뿌려 많은 민중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날 200여 명이 붙들렸고, 그 영향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순창·정주(定州)·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에서 1,000여 명이 체포·투옥되었다. 이 밖에 사회주의계열의 권오설(權五卨)·박내원(朴來源)·민창식(閔昌植) 등도 6월 10일을 기하여 전국적 규모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사전에 상하이[上海]의 여운형(呂運亨) 등과 연락하여 격문 10만 장을 인쇄하는 등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6·10만세에 합세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