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를 1년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으려는 민주당의 기대주는 하워드 딘 버몬트주 지사였다. 민주당 좌파에 속했던 그는 지사 시절 보여준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고 있었다. 특히 미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인터넷 모금'을 실시하면서 기성 정치 모금에 부정적이었던 대학생 등 젊은 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민주당 후보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초반 분위기였다. 하지만 막상 예비선거에 돌입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의 정치 노선이 민주당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와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아이오와 코커스 직후로 기억된다. 기대에 못 미친 결과를 지지자들에게 전하면서 향후 각오를 다지는 자리였다. 그는 겸허히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아쉬움과 실망감을 드러냈다. 연설 말미에는 마치 정치 선동꾼과 유사한 '격정의 토로'로 분위기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CNN을 비롯한 미국 방송들은 온종일 이 부분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누가 봐도 메시지는 자명했다.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미국의 지도자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딘 주지사는 중도에 레이스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 머스키는 상원의원 출신으로 카터 행정부 시절 미 국무장관을 지낸 거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그 역시 감정 통제가 약하다는 여론에 밀려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72년 대선 예비전에서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주자였던 그는 일부 언론이 자신의 아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자 발끈했다. TV 인터뷰를 자청했던 그는 섭섭한 마음에 대담중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일부 동정론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여론은 "자기 통제가 약해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후보 경선에서 중도 탈락하고 말았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은 대선 1년 전부터 시작되는 긴 여정이다. 물론 낭비적이라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세계를 이끌어 갈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핵심은 후보 중 래디컬(극단주의자)과 감정 통제를 못 하는사람들을 걸러내는 것이다. 결국 잘 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지는 못하더라도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인물을 레이스에서 제거하는 것이 미국 선거제도의 백미인 것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격정의 토로'가 화제다. 본인으로서는 할 말을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지켜보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불안함이 커지고 있다. 특히 군과 동맹국인 미국을 자극하는 어법은 논리야 어찌 됐든 일국의 지도자로서 부적합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연일 벌어지고 있는 고건 전 총리와의 '말싸움' 역시 목불인견이다. 자신이 기용했던 총리를 "실패한 인사"라고 말한 것도 문제지만 고 전 총리의 대응에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밀어붙이는 대목에서는 '과연 대통령이 자기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인물인가'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국가의 지도자는 위기 순간에도 냉정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자칫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대통령의 오판 하나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돌이킬 수 없는 위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전 시절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 소련 국가원수에 어떤인물이 선출되느냐에 세계 이목이 집중됐다. 그들의 결정 하나로 인류에게 치명적인 '핵 가방'의 버튼이 가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링컨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헨리 트루먼 미국 33대 대통령의 행적을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앙정치 무대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그는 전임자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당시가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라는 급박한 시점이어서 과연 그가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하지만 동네 아저씨 모습의 이 고졸 출신 대통령은 냉정함과 결단력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톱 5'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결정하는 결단력을 통해 2차대전을 종식시켰다. 또 한국전쟁중에는 만주 공격을 주장하던 맥아더를 전격 해임해 인류를 3차 세계대전의 위험에서 구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에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트루먼 대통령. 전쟁의 와중에서도 국민을 안심시킨 그의 면모를 노 대통령이 한번 되새겨 봤으면 한다. [전병준 정치부장] < Copyright ⓒ 매일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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