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박물관이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사진 특별전을 개최했습니다.
중앙학교 18회 이선호 선배님이 육십만세운동을 선도한 사연도 곁드려 있기에 퍼 올립니다.
시간이 나면 한번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45회 공준수로부터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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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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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토 히로쿠니 공작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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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 나서는 고종의 모습(1918년1월15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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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관리들과 중추원 인사들,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군인과 경찰 고위 관계자들이 참가하여 총 3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중 이 사진은 일본 인사들이 중심이 된 사진으로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인물의 면면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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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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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쪽에 학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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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차림의 영친왕이 1918년 1월25일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사진첩 기록을 보면 그는 원아들의 재롱 섞인 유희를 감상했다고 한다. 원아 가운데는 그의 형제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가 포함되어 있었다. (1918년 1월25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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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이 조선 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도쿄 행 열차를 타기 직전의 모습이다.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를 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26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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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9일 고종 황제가 승하한 거처인 창덕궁 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사진은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 총독부 관계자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다. 정면 깊숙이 황제의 거처쪽에 일본식 제단을 중심으로 일본 전통 복식을 입은 제관이 가장 앞자리에, 조선의 전통 굴건 제복을 차려입은 유족이 그 뒤에 어색하게 선 모습은 쇠락한 황실의 처지가 도드라진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 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가와다. 그 옆에 화려한 견장의 제복을 입은 정무총감 야마가타의 모습이 보인다. 고유의 왕실의례조차 일본식을 강요당했던 당시 황실의 실상을 단적으로 증언하는 소중한 사진이다.
서울대박물관 제공 [2006/05/26 1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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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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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의 ' 대한제국멸망사 '(1906) 등에 실린 사진이다. - 호머 헐버트씨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 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이다. '시해된 왕비 '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 Konigin) 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 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황후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 설명과 함께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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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 사진 오른쪽 ;독일어로 ‘Palastdame’(궁녀), 영어로 ‘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조선 왕의 시종)란 설명이 붙었음.
아래 사진 대원군 - 이하응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 이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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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일출 심상 소학교 시절의 마지막날 덕혜옹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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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별회 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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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와 동급생, 선생님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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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 입구의 홍살문 -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 전하지 않는 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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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에 참여한 나인들 -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나인들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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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황제(순종) 장레식 (국상), 인산습의 광경을 사진사가 카메라에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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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으로 향하는 인산 행렬 - 인산행렬 중의 죽안거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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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인정전 -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 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궐이다. 다른 궁궐들이 그렇듯 창덕궁 역시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거나 변형되어 본 모습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 일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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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가족사진 -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는 이 사진에 대해 모두 모여 함께 일본 요리로 식사를 한 후 찍은 사진이라고 전한다. 즉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는 가족사진인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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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 가마에 탄 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 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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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리는 영친왕 -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들에게 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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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 영친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 관리들의 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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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 1918년 1월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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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양관 - 운현궁 내에 자리 잡은 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 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 소유였다가, 해방이후인 1946년에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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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말 착공되어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1층(반지하)에 시종인들의 거실을 두고 2층에 접견실과 홀, 3층에 황제와 황후의 침실, 거실을 두었다. 19세기 고전주의적 양식을 답습하여 총 면적 1,264평으로서 일제강점기 전 기간중 가장 규모가 큰 순석조 건물로 세워졌다. 이후 석조전은 고종이 주로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이다가 1933년부터 창경궁 이왕가박물관의 분관으로서 일본 근현대미술품을 전시하는 장소로 전용되었다. 뒤이어 1938년 개관된 석조전 신관에 이왕가박물관의 전통미술품이 전시되고 2동의 건물 모두가 전시장으로 쓰였다.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공간이 전시공간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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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 -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선생 탄신 100년 기념으로 선생이 생전에 촬영한 사진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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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 -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사진이 발견됐다. 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은 25일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황실 사진을 공개했다. 1962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형제, 민영환의 사위)선생의 유품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당시 조선 황실의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촬영자는 미상. 이 사진들은 31일부터 열리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과 백오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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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하는 궁녀들 -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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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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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황족 한자리에 - 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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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62세 생일 기념 - 이 사진은 1882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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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처음 마주친 것은 DVD물로 만들어진 조선황실의 기록이었다. 아는 것은 아는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실은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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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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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1926년 4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을 토하는 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 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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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그 해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6년 2월에 이미 통감을 설치해 국정을 간섭하게 됐으니 조선은 망국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른 시점이었다. 통감 설치 이후 일본인이 정부 각처의 차관으로 임명되고 행정력을 모두 장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한다. 이어 일제는 1908년 경제 수탈을 위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09년 법부와 군부를 각각 폐지해 사법권과 군수통수권까지 일본에 넘어갔다.
일제가 조선에 빼앗을 것은 국권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거센 폭풍우 몰아치는 들판에서 깜박거리는 등불이었던 조선은, 1910년 8월29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매국노가 앞장선 한일합방 조약이 맺어지며 불이 꺼지고 만다. 대한제국 멸망 후 순종(1874~1926)은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퇴위 당하고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돼 창덕궁에 갇혀 한 많은 세월을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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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그 이전인 1898년 커피를 즐기던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커피에 독을 넣었다는 일제 독살설도 있다. 커피 맛을 잘 아는 고종은 한 모금 마시다가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다 마셔버려 두뇌에 이상이 왔다는 독살 미수사건의 일설도 전해진다.
1926년 4월25일 승하한 순종은 27일 소렴을 하고 29일 대렴을 마친 뒤, 빈전(殯殿·발인 전까지 관을 두는 곳)을 창덕궁 선정전에 설치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고종의 홍릉 경역 왼쪽 줄기에 능을 정하고 5월7일부터 산역을 시작했다.
순종의 능호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승인할 리 없었고 황실은 고종과 마찬가지로 편법을 동원한다.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 광무8년(1904) 33세로 황태자비로 승하해 경기 용마산 내동에 안장됐었다. 순종은 즉위하자 순명효황후로 추상하고 민씨의 유강원(裕康園)을 유릉(裕陵)으로 추봉했다.
일제로서도 이미 능호를 받은 유릉을 격하시킬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일. 더욱이 황실에서 무덤을 천장하고 부부를 합장시키겠다는 데야 제 아무리 일제라도 간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일제가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조선의 황제가 죽은 분노를 터트릴 민중들의 움직임이었다.
순명효황후가 죽은 지 21년 후인 1926년 6월4일 오전 6시, 황후의 유해는 구릉(舊陵)에서 발인해 금곡으로 향한다. 6월5일 오전 6시 황후는 오른쪽 황제의 자리를 비워두고 왼쪽에 자리 잡는다.
닷새 후인 6월10일 장례식을 마친 융희황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나왔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의 대표자 박용규, 곽대형, 이광호, 이선호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 18회 졸업생 ) 등이 주도해 사립고보생 2만4000명을 동원했고, 연희전문의 이병립, 경성대학의 이천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박하균, 박두종, 이병호 등이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했다. 이는 학생들이 주도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6·10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일제가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시켰지만 순종은 조선 민중에게 여전히 황제였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조선총독부는 미리 경찰과 군인 7천명을 동원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독립의 염원을 외치는 조선의 함성을 막을 수 없었다.
뒤이어 을지로, 종로3가, 동대문, 청량리에서 학생들은 토지제도의 개혁,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쳤고 시민 수만 명이 이에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 터지게 불렀다. 순종의 인산일 하루 동안 체포된 학생이 1천명에 달했다.
"지금 한 병이 침중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죽는 순간까지 순종의 가슴에 한 맺혔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없었지만 순종의 혼백은 6·10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다. 떠나는 순간, 아직 순종의 염원이 이뤄지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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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한국전쟁을 겪고 낙선재에서 1966년 2월 3일 73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에 순종과 순명효황후와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고종의 홍릉과 같은 구조로 조성된 유릉에 오른다. 유릉의 석물은 홍릉의 황당한 우주괴물 수준보다는 훨씬 뛰어난 솜씨지만 왕릉만도 못한 크기의 황제릉은 망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옛날 순종의 삶과 황실의 몰락, 일제의 압박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나 숲으로 둘러싸인 적막 속에 유릉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이렇게 역사는 흘러가는 것인가. 꽃잎이 분분하게 떨어지는 어느 날, 홀로 이곳을 다시 찾아 조선 마지막 황제의 고독을 함께 나눠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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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뜻을 지닌, 무슨 내용의 사진인지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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