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 역사전쟁, 이렇게 될 줄 알았다, <font color=blue>최광식(62회)</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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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韓·中 역사전쟁,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한국사 왜곡이 드디어 실상을 드러냈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동북공정의 가시적 성과로 18편의 보고서를 발간하고 그동안의 연구결과들을 홈페이지에 띄웠다. 이들의 연구라는 것들은 고조선사부터 근대사까지, 영토로는 한강 유역까지 왜곡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정부는 2년 전의 구두 약속만 믿고 중국의 역사왜곡 움직임에 안일하게 대응해 오다 허를 찔린 꼴이다. 고구려재단 일을 맡아 보며 그동안 정부의 대응 모습을 보아 온 필자로서는 일찍부터 예견해 온 상황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2004년 3월 발족한 고구려연구재단은 고구려사·고조선사·발해사 등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성과를 출판해 학계와 대중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도록 하는 데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한·중학술회의를 두 차례 가졌으며, 북한과도 두 차례에 걸쳐 학술회의와 현장답사를 진행했다. 또한 외국학자들과의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2004년 가을 고구려연구재단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사립학교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 속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 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이 구성되면서 재단의 활동은 난항에 빠졌다. 5월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걸 만든다며 학계와 시민단체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청취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미 공무원들이 시안을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그 시안을 보고 ‘정부가 역사연구를 주도해 나가서는 안되며, 중국의 역사왜곡과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는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연구와 정책도 별도로 대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정부측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고 그 시안을 밀고 나갔다. 8월 공청회에서 토론을 해 달라고 해 가 보니 발표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법학자였으며, 사회는 경영학자가 담당하고 있었다.
정부는 그러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을 압박해 동북아역사재단에 흡수 통합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개진했으나 전혀 변화가 없었다. 더구나 2006년 들어와서는 예산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통합 흡수를 기정사실화했다. 중국 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정부 내 어디에도 없었다.
8월 20일 고구려연구재단이 해체되자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준비했던 총서들을 출간했다. 또한 백두산공정을 공표, 이제까지 숨기고 있었던 동북공정의 목적인 영토문제를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국은 2004년 8월 구두 5개항을 합의하며, 더 이상 역사왜곡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왜곡 내용이 적힌 지안(集安)시 박물관의 머릿돌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역사교과서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를 제외시킨 것이 단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항의하지 않고, ‘지방정부 차원’이라거나 ‘실험본 교과서는 아직 채택률이 적으니 정본(正本)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식으로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축적해 나가고 마침내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마무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 당국은 이러한 중국 당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교과서 왜곡은 이미 교과서가 개정된 뒤에 시정을 촉구하는 사후약방문식이 아니라 왜곡된 교과서가 확정되기 전에 시정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자주’를 주장하는 정부가 중국에 대해서는 왜 이리 눈치를 보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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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발족한 고구려연구재단은 고구려사·고조선사·발해사 등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성과를 출판해 학계와 대중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도록 하는 데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한·중학술회의를 두 차례 가졌으며, 북한과도 두 차례에 걸쳐 학술회의와 현장답사를 진행했다. 또한 외국학자들과의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2004년 가을 고구려연구재단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사립학교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립 속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 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이 구성되면서 재단의 활동은 난항에 빠졌다. 5월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걸 만든다며 학계와 시민단체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청취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미 공무원들이 시안을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그 시안을 보고 ‘정부가 역사연구를 주도해 나가서는 안되며, 중국의 역사왜곡과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는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연구와 정책도 별도로 대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정부측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고 그 시안을 밀고 나갔다. 8월 공청회에서 토론을 해 달라고 해 가 보니 발표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법학자였으며, 사회는 경영학자가 담당하고 있었다.
정부는 그러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을 압박해 동북아역사재단에 흡수 통합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개진했으나 전혀 변화가 없었다. 더구나 2006년 들어와서는 예산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통합 흡수를 기정사실화했다. 중국 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정부 내 어디에도 없었다.
8월 20일 고구려연구재단이 해체되자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준비했던 총서들을 출간했다. 또한 백두산공정을 공표, 이제까지 숨기고 있었던 동북공정의 목적인 영토문제를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국은 2004년 8월 구두 5개항을 합의하며, 더 이상 역사왜곡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왜곡 내용이 적힌 지안(集安)시 박물관의 머릿돌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역사교과서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를 제외시킨 것이 단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항의하지 않고, ‘지방정부 차원’이라거나 ‘실험본 교과서는 아직 채택률이 적으니 정본(正本)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식으로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축적해 나가고 마침내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마무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 당국은 이러한 중국 당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엄중히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교과서 왜곡은 이미 교과서가 개정된 뒤에 시정을 촉구하는 사후약방문식이 아니라 왜곡된 교과서가 확정되기 전에 시정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자주’를 주장하는 정부가 중국에 대해서는 왜 이리 눈치를 보는지 모를 일이다.
최광식·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전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입력 : 2006.09.07 19:00 14' / 수정 : 2006.09.07 23:52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