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강원도 어느 산골의 사단 직할 보충대가 인민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국군 사병 鄭亮燮(정양섭·中東高 45회)씨는 당시 열아홉 살이었다. 인민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오고 있었다. 鄭씨는 발목에 관통상을 입어 도주할 수 없는 상태였다. 鄭씨를 포함한 10여 명의 국군포로가 인민군들에 의해 들판으로 끌려 나왔다. 한 인민군 군관이 鄭씨에게 물었다.
『너, 집이 어디야!』 (인민군 군관)
『서울입니다』 (鄭씨)
『그럼 학교는 어디 다녔어!』
『中東입니다』
인민군 군관은 깜짝 놀라더니 鄭씨에게 『中東 몇 회냐』고 물었다. 鄭씨는 45회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2년 선배구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인민군 군관은 鄭씨의 손을 잡으며 『내일쯤 우리들이 후퇴할 것 같으니 숲 속에 숨어 있다 살아서 돌아가라』며 鄭씨를 풀어 주었다.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은 중동고등학교는 쟁쟁한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李秉喆(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中東 26회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사학자 李丙燾(이병도) 선생과 국문학자 李熙昇(이희승) 선생이 이 학교 출신이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성인기씨, 송월주 前 조계종 총무원장도 中東에서 공부했다. 저항詩人 金芝河(김지하), 文國現(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 兪弘濬(유홍준) 문화재청장, 梁柱東(양주동) 교수, 金武星(김무성) 한나라당 국회의원, 禹濟昌(우제창) 열린당 국회의원 등이 中東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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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수학여행. |
李熙昇·金珖燮의 母校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을 쓴 巴人 金東煥(파인 김동환) 선생은 1921년 中東을 졸업했다. 金珖燮(김광섭) 시인은 中東 18회 동문이자 中東학교의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우리말을 지키는 데 온몸을 던졌던 李熙昇 선생도 中東 출신이다. 또한 동국大 前 총장 宋錫球(송석구)씨, 연합뉴스 張永燮(장영섭) 사장도 中東을 나왔다.
이 밖에도 영화배우 김희라·이병헌·차태현, 「겨울연가」의 尹錫瑚(윤석호) PD, 개그맨 심현섭, 소설가 安正孝(안정효)씨도 中東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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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중동학원 입학시험 응시 장면. |
끈끈한 결속력 中東고등학교 동문들은 끈끈한 동문애를 자랑한다. 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동지애가 강한 집단을 꼽으라면 호남향우회, 高大교우회, 해병대전우회에 이어 中東동문회가 꼽힌다』고할 정도다.
中東高 출신들은 지금도 만나면 선후배 간의 절도와 예의를 지키고, 응원가를 함께 부른다고 한다. 中東高 동문들이 거칠다는 일부의 부정적인 평가는 中東 동문들의 끈끈함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동문은 『中東 기질은 해병대 기질을 닮았다』고 했다. 또 다른 동문은 『남자로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中東에서 배웠다』고 했다.
1980년대까지 中東고등학생들은 학교 배지와 명찰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 명찰은 학년별로 색깔이 달랐다. 후배들은 멀리 선배들이 보이면 명찰 색깔을 보고 인사를 했다. 그냥 지나치면 「응징」이 뒤따랐다고 한다. 中東高 76회인 千京捕(천경포·43)씨는 서울 종각 네거리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랑 정독도서관에 가기로 했었어요. 종각 앞에서 친구를 만나서 종로로 걸어가는데, 제 옆으로 3학년 선배가 지나갔어요.
저는 선배가 지나가는 것을 몰라 경례를 못 붙였지요. 그 선배가 뒤에서 큰 소리로 저를 부르더니 팔굽혀펴기 100회를 시키셨어요. 친구도 보는데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생각하면 참 재밌고요』
열린당 廉東淵(염동연·58회) 의원은 中東 출신 선후배 위계질서에 대해 『때로는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동문회에서 모임을 하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선배들이 우리가 한 기수 아래라고 일단 말을 깝니다(웃음). 머리가 허옇게 돼서도 옛날 학교 다닐 때 선후배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금방 동화돼 버립니다. 딱딱하게 격식만 차리는 사회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中東 선후배들과 함께 있으면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요. 따뜻하지요』
「거칠다」는 평가 |
서울 강남구 일원 1동 618번지에 위치한 中東고등학교. |
中東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成百彬(성백빈) 부위원장이 「中東人은 거칠다」는 표현에 대해 설명했다.
『거칠다는 표현이 반드시 폭력적임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남자다움, 넘치는 패기와 기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깡패 학교」라는 말은 사실 일제시대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시 일본 중·고등학생들이 한국 학생을 희롱하거나 못 살게 굴면, 中東 선배들이 일본 학생들을 많이 때렸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종로경찰서에는 매일 저녁, 中東 출신들이 여러 명씩 잡혀 들어갔었습니다』
현재 中東高 교사로 재직 중인 金恩泰(김은태·51·中東高 65회)씨는 『사람들이 中東高 학생을 무서워하던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때는 학교 배지를 달고 다닐 때예요. 동네 불량배들이 학생들을 많이 괴롭힐 때지요. 그래도 불량배들이 中東高 학생은 못 건드렸어요. 한번 건드리고 나면 떼로 몰려와 꼭 복수를 하고 마니까요. 그래서 中東 배지가 시내에 동이 날 정도였어요. 다른 학교 학생들도 집에 갈 땐 中東 배지를 달고 다녔거든요』
『참 싸움을 많이 했어요』 (팬택 박병엽 부회장) 팬택 박병엽 부회장의 얘기다.
『거친 기질인지 남자다운 기질인지 몰라도 다른 학교 학생이나 불량배들과 싸움을 참 많이 했지요. 학창 시절 보충수업 시간에 친구 한 명과 월담해서 인근 분식집에서 군것질을 하고 놀다 온 적이 있었어요. 다시 담을 넘어서 반으로 오니 보충수업이 끝나서 애들은 없고 담임선생님만 저희를 기다리고 계시더라구요. 선생님은 우리가 놀러 간 줄 모르시고 어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싸우는 줄 알고 혹시나 해서 전화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中東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인 한나라당 金武星(김무성·64회)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들이 대부분 학교 선배님들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기질은 그 선생님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中東의 항일운동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항일운동하다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사람들을 白濃(백농) 선생이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학교 전통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이 포함된 겁니다. 그런 게 학생들에겐 中東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훈련병 선배에게 인사한 조교 후배 中東의 결집력은 비단 학창 시절의 추억에만 머물지 않는다. 中東 출신들은 언제·어디서, 초면·구면을 가리지 않고 「中東 몇 회」 출신인지를 먼저 물어본다. 기수가 헤아려지면 그 자리에서 이들은 바로 「형·동생」이 된다. 이명균씨는 軍복무를 논산훈련소에서 했다. 빨간 모자와 호루라기를 차고 있던 그는 훈련병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훈련 조교였다.
『새로 훈련병들이 들어왔는데, 인적사항들을 살펴보니 中東高 선배가 있었습니다.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됐지만, 훈련병들 앞에선 제가 고등학교 후배인 티를 전혀 안 냈어요.
둘만 조용히 있을 때 「제가 中東 후배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긴장하셨는지 반기는 기색도 잘 안 비치시더라고요. 제가 선배님 모시고 훈련병들은 구경도 못 하는 PX에 갔어요. 훈련병들이 좋아하는 단 음식을 많이 대접해 드렸습니다』
李씨는 『中東 출신으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더욱 中東에 감사하게 됐다』고 한다.
『경조사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기본적인 것 말고, 척박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친형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백이면 백 中東 선배입니다. 직장 상사가 中東 선배이면, 남 몰래 더 잘 챙겨 주시는 경우도 많았고요.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中東 후배라고 하면 더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백두대간 행사 하면서 10년 아래 후배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친동생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초면인 데도 어색하지가 않았어요』
千京捕씨는 『사회 생활은 나의 일을 하면 되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히 동문들의 도움을 받진 않았다』면서 『그래도 잊지 못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 대청댐으로 낚시를 하러 갔어요. 낚시할 땐 그냥 편하게 작업복 입는 기분으로 고등학교 때 입던 교련복을 입고 가는데, 대청댐에서 어느 분이 제 교련복에 있는 中東 마크를 보셨어요. 「내가 中東 선배다」 하시면서 그날 식사를 제공해 주시고 용돈까지 주셨어요. 대청댐에서 고등학교 선배한테 용돈 받은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잘 믿지 않더군요』
政界에서 두각 나타낸 中東 출신들 中東高 졸업생인 梁一東(양일동·작고) 前 국회의원은 「中東 80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방 후 오늘날까지의 정계, 특히 역대 국회의 저명한 투사 가운데 우리 中東 출신이 독특하게 두각을 나타냈고, 현금도 정계를 위시해서 경제계·문화계·법조계 등 각계 각층에서 뚜렷한 성좌를 차지하고 있다. 최순주 前 국회 부의장, 전진한 의원, 윤재술씨, 前 中東 교장이었던 이교선씨, 윤치영 前 서울특별시장, 손석두씨, 안용백씨, 손경섭씨, 최병권씨, 김병순씨 등 역대 국회의원들이 있고, 현재 정쟁법 해당자 가운데에는 김태선씨와 필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법조계의 한격만 前 검찰총장, 변옥주씨 등과 학계의 양주동 박사, 오화섭·신석호·성백선·고석구·최종인 교수 등과 고광만씨, 언론계의 성인기씨, 백인엽 예비역 중장 등 실로 다채롭고 유능한 인물들이 다방면에 있다>
열린당 사무총장을 지낸 廉東淵 의원,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金武星 의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韓光玉(한광옥) 前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의원, 안동선 前 새천년 민주당 의원, 열린당 梁承晁(양승조)·鄭長善(정장선) 의원 등이 中東 출신이다.
경제계에서도 中東 출신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李秉喆(이병철) 前 삼성그룹 회장, 최순길 前 신동아그룹 부회장, 朴政遠(박정원) 한진해운 사장, 金英雄(김영웅)(주)우방 사장, 李銓甲(이전갑) 현대자동차 부회장, 손연호 경동보일러 회장, 이용한 (주)원익 회장,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박병엽 팬택그룹 부회장 등이 中東 출신이다.
백두대간 100개봉 동시 등반 中東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中東 동문들은 「백두대간 100개봉 동시등반」 행사를 치렀다. 2005년 9월25일. 졸업생과 재학생·교직원·동문 가족 등 1500여 명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같은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 거주 동문과 가족 15명은 「마운틴 발디」에 올랐다. 동문들만 흥이 난 것은 아니었다. 동문 가족들도 中東의 가족으로 함께 즐겼다. 「백두대간 100개봉 동시 등반」 행사에 참여했던 59회 김호동 동문의 아내 정재윤씨는 『中東人의 아내로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2005년 세 명의 여성이 남자고등학교의 명예 동문으로 선정됐다. 열린당 金榮珠(김영주)·金善美(김선미) 의원, 한나라당 李惠焄(이혜훈) 의원이 주인공이다. 모두 中東 출신과 결혼한 여성의원들이다. 故 沈奎燮(심규섭) 의원의 지역구를 이어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된 金善美 의원의 회고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고 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때 中東 출신 남편의 선후배·동기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어요. 저희 남편이 70회였는데 저도 中東 70회라고 여긴 겁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문의 힘이 뭔지 알았어요. 얼마 전에는 70회 명예 졸업생으로 받아 줘서, 저는 「中東여고」 출신이라는 농담을 하고 다닙니다』
원로 동문 朴元峯(박원봉) 서울어학원 회장은 中東 43회 출신이다. 취재 중인 기자를 中東고등학교 후배로 생각했던지 朴회장은 기자에게 『中東 몇 회냐』는 질문을 먼저 했다.
朴회장은 1950년 中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다른 여러 동기들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古稀(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中東고등학교와 관련한 일에는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中東 출신이니까』라고 짧게 답했다.
中東고등학교 100년은 한국 근대사 100년과 맞닿아 있다. 中東은 황실이나 서양 선교사, 민간 유지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다. 일제에 의해 설립된 공립학교도 아니다. 中東은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졌던 民草(민초)들에 의해 설립된 「민족학교」다.
1906년, 오규신·유광열·김원배의 세 선생이 관립외국어학교의 교사 일부를 빌려 설립한 「한어 야학」이 中東학원의 전신이다. 1909년 5월10일, 사립 中東학교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 서울大 총장을 지낸 白濃 崔奎東(백농 최규동) 선생이 1914년 종로구 수송동의 가옥을 빌려 학교를 옮기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배움에 대한 욕구가 넘쳐나자 中東의 학생 수는 1000명을 넘었다. 입학과 퇴학이 자유로워 뒤늦게 배움의 즐거움을 깨우친 만학도들과,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다른 학교를 퇴학한 애국 청년들이 中東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中東학교는 넘치는 학생들로 인해 가르칠 선생이 부족해 3부제 수업을 실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1927년 中東학원은 민가 2동을 구입해 연평 110평의 2층 벽돌집 교사를 신축했다. 中東학원은 1920년부터 우수학생들을 국내외로 유학 보내고, 학업을 마친 후에는 모교의 교사로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훌륭한 애국 교사들이 탄생했다. 항일 민족운동에서 선봉적인 역할을 담당한 中東은 이렇게 탄생했다.
6·10 만세사건과 광주학생운동 졸업생 申奭鎬(신석호·작고) 前 고려大 문리과대학 교수는 「中東 80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中東 학생들이 참가한 항일운동은 첫째 6·10 만세운동이다. 연희전문·中東·중앙 등 서울시내 각 학교 학생이 많이 참가하였으나, 이 사건의 주모자는 연희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이고 배후 조종자는 당시 유명한 사회주의자 권오설인데, 이병립은 필자와 함께 中東학교를 졸업한 동기생이요, 권오설은 中東의 중퇴자이다. 다음으로 광주학생사건 당시에 中東이 또한 일선에 나서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3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모욕한 말을 던지므로 말미암아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이것이 다시 한국인 승객 대 일본인 승객의 싸움으로 확대하고, 기차가 광주역에 도착한 후 시민이 이에 가담하여 한국인 대 일본인의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군경과 소방차를 동원하여 한국인을 난사 난투하여 무수한 사상자를 내었다. 이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서울을 비롯한 각지의 학생들이 일제 타도와 한국 독립의 기치를 들고 혹은 성토대회 혹은 동맹 휴학을 하였는데, 이때 中東학교 학생은 전원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거리로 뛰어 나가다가 경관에게 제지되어 행진을 하지 못하였으나, 120여 명이 검거되었다>
외부 탄압이 내부 결속 높여 줘 일제 당국은 거친 학생들이 많다며 中東을 탄압했다. 외부의 탄압은 내부의 결속을 더욱 높여 줄 뿐이었다. 교직원·학생이 모두 한마음이었다. 이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金武星 의원의 말이다.
『1967년 6·8 부정선거 때 중앙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方聖熙(방성희) 교장선생님께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어요. 교장선생님이 「젊은 청년들이 불의를 보고 저항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희생당할까 싶어서 걱정이다. 오늘 너희들 뜻을 이만큼 알렸으니 이 정도로 끝내길 바란다」고 하시면서 저희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千京捕씨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제가 高1 때니까 1981년이었던 것 같아요.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해서 우리 학생들이 화가 많이 났어요. 학교에서 단체로 시위를 간 건 아니었는데, 저도 화가 나서 일본대사관 앞에 갔거든요. 가서 보니, 中東 배지를 단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1969년 삼선개헌 당시, 서울 시내 13개 고교가 연합하여 시위를 계획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성백빈 부위원장은 『시위는 좌절되었다』고 했다.
『그때 경복·배재·휘문·경신·中東 등 학교들이 연합해서 큰 시위를 계획했었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 대표였던 金武星 의원이 주동해서 삼선개헌 반대 운동을 하려다가 좌절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고교생 시위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어요』
金武星 의원의 말이다.
『경복高부터 시작해서 안국동 로터리, 혜화동, 신설동까지 가면 남자고등학교가 13개 있었습니다. 학교 대표들을 일대일로 만나서 연합 시위를 계획했는데, 연락 과정에서 말이 새나갔습니다. 경찰에서 학교로 경고를 했나 봅니다.
덕수궁 안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대표들이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결정하기로 했는데, 학교 나서는 길에 정문 앞에서 선생님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저는 교장실에 감금됐고, 그때 덕수궁에 나갔던 다른 학교 대표들은 경찰에 붙잡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비장하게 단발을 결심했다』 |
6·25 직후 환도기념. |
본과 1회 졸업생인 尹濟述(윤제술·작고) 前 신민당 국회의원은 『비장한 각오로 단발을 하고 中東에 입학했다』고 회고했다. 시골의 스승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新학문에 대한 꿈을 갖고 상경한 윤씨는 「中東 80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몇 달 후에 상투잡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상경은 하였으나, 입학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이고 실은 상투 자르기가 몹시 괴롭기 때문이었다. 노상에서 놀림도 받았고 친구의 희롱도 당할 만큼 당하면서도 소년 갓장이로 종로 네거리를 1년 남짓 雄志(웅지)를 키우면서 오고 가고 하였다.
결국 상투문제는 비장한 용기로 이발사에 일임하기로 하였지만 그때만 해도 儒道(유도)의 유습이 남아 있던 때라 儒子(유자)로서는 일대 용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면 나 자신 일소를 불금한다>
中東의 100년 역사에는 한국 근현대사 100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위기도 있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국군은 이미 후퇴했을 때였다. 인민군은 1950년 6월27일 의정부를 거쳐 서울 창동까지 침입해 오고 있었다. 시민들은 당황했고, 시내는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中東학원 교무주임이던 박태화 선생은 땅을 파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여 학교의 귀중 문서·학적부, 中東야학교 시대의 졸업 대장, 고등과 이후의 졸업 대장 등을 땅속에 묻었다. 中東의 귀중한 학적부와 졸업생 명단은 이렇게 보존될 수 있었다.
1954년 2월9일자 조선일보는 中東 학원의 화재를 보도한다.
<오랜 역사의 빛나는 서울 中東학교 교사가 7일 전소되었다. 中東 중학교 교사는 英(영) 연방군의 전방 기지 사령부가 빌려서 합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 방화 원인은 모 연방 군인이 오일 난로에 불을 다려 놓고 그대로 외출한 탓으로 과열로 교실의 판자에 불이 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18개 교실을 전소한 同 화재의 손해액은 부동산 27,000,000환에 동산 300,000환을 합하여 27,300,000환에 달하였다. 현재 中東학교 학생들은 교사가 명도될 날만 기다리고 교사 옆 텐트로 된 가교사에서 수업 중에 있다>
中東학원은 재단·동문·교직원·지역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학교를 원래 모습 그대로 신축 복구하였다.
中東 인수한 삼성 李建熙 회장 『선진 私學 벤치마킹하라』 심각한 경제적 난국에 부딪힌 적도 있었다. 수송학원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수송재단의 부채를 떠맡게 된 中東은 결국 재단의 부도로 인해 1992년 7월 관선 이사가 학교를 맡게 된다. 관선 이사 휘하의 中東학원은 2년 가까운 혼란기를 겪었다. 모 종교단체가 中東高를 인수하기로 했었다. 동문들이 반대하며 모두 발 벗고 나섰다. 『민족사학을 종교재단으로 넘길 수 없다』고 동문들은 당시를 회상했다.
100주념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成百彬 부위원장의 말이다.
『白濃 선생의 작은 아들이 당시 이사장이었는데, 학교 재정 상태가 투명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경제적 난국에 부딪혔죠. 모 종교재단으로 中東高가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었고요. 동문회에서는 「故 李秉喆 삼성 회장이 中東 출신이니, 삼성에 인수를 독려해 보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李建熙 회장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안동선씨가 동문회장이었는데 그래도 李建熙 회장을 만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 김무성 의원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이어서 李建熙 회장과 中東 동문회의 만남을 주선할 수 있었죠.
中東 동문회는 「학교 이름은 절대 바꿀 수 없다」, 「설립자가 白濃 선생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두 가지 조건만 걸었습니다. 그래서 삼성이 학교 발전 기금으로 150억원 정도를 내놓고 中東을 인수했습니다. 그 이후 「촌지 안 받기 운동」을 하고, 좋은 선생님들 모셔오고, 대우도 좋아졌고, 학교도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 6월 中東을 인수한 삼성은 삼성 간부와 中東 간부 등 6人으로 구성된 태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李建熙 회장은 『당장 외국에 나가 선진 학교를 보고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태스크 포스팀은 바로 비행기에 올라 영국·프랑스·미국·일본을 돌아보았다. 부시 대통령 父子가 나왔다는 미국 필립스 아카데미와 일본 미쓰이 상사의 도인타쿠엔 학교를 벤치마킹했다.
寸志 받지 않는 학교 |
中東高 설립자 백농 최규동 선생. |
교사 연봉도 다른 학교에 비해 높은 편이다. 촌지를 절대 받지 않아 학부모들로부터 불친절하다는 소리까지 나올 때가 있다고 한다. 中東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安廣福(안광복)씨는 『삼성 인수 이후 깨끗한 운영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삼성 인수 후 변화에 대해서 中東 총동문회장인 沈在坤(심재곤·54회·前 환경부 기획관리실장) 계명大 환경학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교사의 연구를 지원하는 데 학교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中東학원 부설 중등교육연구소가 1997년에 설립됐습니다. 충분히 검증된 교육 정책을 학교 자체적으로 수립합니다. 中東은 체벌이 제일 먼저 없어진 학교이기도 합니다. 교원 평가는 이미 10년 전부터 실시됐고, 촌지는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 교사들이 학부모 앞에서 당당해졌다고 말합니다.
「교사들이 너무 불친절하다」는 학부모가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삼성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中東은 현재 발전하고 있습니다』
『학생 선발권, 학교가 가져야 한다』 |
中東高 교훈·교가 |
中東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中東고등학교 김병택 교장은 『분명한 교육 이념을 실천하고 특성화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학생 선발권을 학교가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21세기형 경쟁력을 갖춘 人材(인재)를 육성하려면, 세계적인 수준의 명문 사립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학교의 자율성입니다. 10년 전부터 中東高는 외국의 명문高들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신임교사들이 2주간 미국을 돌며 30년·50년·100년 앞선 서양의 사립高를 보고 왔습니다. 100년 된 中東은 새로운 100년을 열며 세계 명문高와의 경쟁을 원합니다』
삼성재단은 매년 학생 8명과 교사 4명을 해외연수시킨다. 中東高 교사들은 다른 학교에 비해 수업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어, 대학원을 다니며 연구 활동을 병행할 수 있다. 中東高에는 석박사 교사가 전체 교사 수의 반을 넘는다. 매학기가 끝날 즈음 학생 대표가 교사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 교사들은 그 평가 결과를 당당히 받아들인다.
새 100년을 준비한다. |
김병택 中東高 교장 |
沈在坤 총동문회장은 10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저희가 작년에 발대식을 가졌습니다. 작년부터 학창 시절에 즐기던 축구·바둑·당구 대회를 기수 대항전으로 시작했고, 개교기념일 직전에 결승전을 열 계획입니다. 작년 9월에 백두대간 100개 봉우리 등정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3월10~16일까지 국립극장에서 「혈맥」이란 연극을 공연합니다. 남자배우는 모두 中東 출신 현역 연기자들입니다. 대본은 中東 27회 김영수씨가 쓰셨습니다. 이미 여러 편의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쓰신 분입니다. 연출은 中東 54회 민동훈씨가 맡습니다. 무대감독은 中東 65회 기국서씨가 맡았습니다. 모두 현역 연출가들입니다.
오는 4월15일에는 남산 순환도로에서 올해 100주년을 맞는 보성·휘문·숙명·진명·中東의 5개교 동문들이 연합하여 소년소녀가장돕기 걷기대회를 실시할 계획입니다』
中東 57회인 한국산악연맹 李仁楨(이인정) 회장은 올해 中東 10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등반을 추진하고 있다. 老小를 넘나드는 中東인들의 학교에 대한 열정을 다른 학교 동문들은 흉내 내기 어렵다.
지난 2월7일 中東고등학교 졸업식장, 中東 99회 졸업생들이 세상 속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中東의 다음 100년이 시작된 것이다.●